“으흠, 으흠.”'몇 번이나 메논 선생의 헛기침 소리가 계속되었지만 레이미아는 시선이 간 방향에 있는 종려나무의 우듬지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결국 옆에서 지켜만 보던 루카가 조심스레 팔목을 잡아 흔들었다.'“응? 아, 벌써 끝이 난 건가? 내가 어디서부터 읽으면 되더라…….”'메논 선생이 왕조의 흥망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레이미아가 경청한 뒤에 의문점에 대해 질문을 던지거나 이야기한 부분을 다섯 번 낭송하고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는 것이 보통의 수업 방식이었다. 보통 레이미아는 호기심이 왕성해서 질문을 그냥 넘긴 적이 없는데 오늘은 질문은커녕 수업조차 거의 듣지 않는 게 명백했다.'다른 어린 학생들에게 하듯이 매를 들지는 못했지만 메논 선생은 들고 있던 두루마리로 툭툭 레이미아의 이마를 때리면서 혀를 찼다.'“그럭저럭 총명하다고 칭찬해 드렸더니 칭찬을 한 제 입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있지 않으면 수업을 거르게 되실 분이 벌써부터 이리 게으름을 피우시면 어쩌십니까?”'“게으름을 피우려고 그런 것은 아니네. 하지만 자꾸 헛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군. 안 되겠어. 오늘 수업은 이쯤 하지. 오늘 분은 숙제로 해서 어떻게든 공부해 놓을 테니 내일 다시 수업을 하기로 함세.”'한숨을 쉬며 레이미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메논 선생도 옆에 두었던 지팡이를 들고 일어났다. 뒤에서 루카와 시종들이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먼저 앞서 걸어가면서 선생은 레이미아에게 물었다.'“황도에 가시는 일이라고 하면 다른 분들은 설레고 기뻐할 일인데 어쩐지 레이미아님은 근심이 더 크신 모양입니다.”'“부족한 게 너무 많다보니 솔직히 겁이 날 지경이네. 나 한 사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개의치 않으나 그것이 오라버니에게까지 미치고, 더욱이 가문의 수치가 될지도 모르지 않나.”'“그러나 하겠다고 나서신 건 레이미아님 본인이시지요. 누가 억지로 등 떠민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실은 등을 떠민 사람이 있다. 황자가 벌컥 일을 터뜨렸다. 황도로 가자는 황자의 제안에 레이미아는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으나, 그 다음날 아침 식사 중에 황자가 레이드에게 이미 일이 결정된 것처럼 말해 버린 것이다. '레이드, 그대를 대신해서 레이미아가 황도로 가 결혼 승인을 얻어올 것이네 -라고 터무니없이 당당하게 말이다. 레이미아는 식사를 하다 하마터면 의자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처럼 놀랐다. 그러나 레이드가 너무도 기뻐하는 모습에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그렇지. 내가 하겠다고 나섰어. 내가 할 일이라면 해야지. 오라버니께서 그리 기뻐하시는데 말이야.”'괜찮겠느냐 몇 번이나 되묻던 레이드의 얼굴을 떠올리며 레이미아는 한숨 반 웃음 반의 표정을 지었다. 그 착한 분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황도가 대수이랴 싶었다. 저 무시무시한 야만인들의 나라라는 우바크 스압이라도 가고야 말겠다.'“지금이라도 솔직히 겁이 난다 말씀하십시오. 타우마혼 공이시라면 웃으시면서 없었던 일로 해주실 겁니다.”'“싫다네. 내가 무모한 건 알지만 하겠다고 했으니 나는 할 것이야. 완벽하진 못하겠지만 최선에 가까운 길로 갈 것이고, 신께서도 그런 나를 축복해주리라 믿어. 뭐지, 내 말이 그리도 우스운 거야?”'“아닙니다. 속설이 틀린 게 없구나 싶어 웃던 참입니다.”'“속설이라니?”'메논 선생은 딱딱하기만 한 줄 알았던 얼굴에 묘하게 따뜻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속설이냐고 끝끝내 캐묻는 것은 우아하지 못한 일이라 레이미아는 찝찝한 느낌을 그대로 덮어야 했다. 성으로 돌아와 헤어지기 직전에 메논선생이 레이미아를 향해 다른 이야길 꺼냈다.'“황도로 가는 길에 동반할 사람을 밖에서 구하시는 것도 좋겠지만, 성에도 쓸 만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타하룸은 천년의 수도입니다. 그만큼 견고한 곳도, 그만큼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원에 가까운 도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십여 년 넘게 살다 온 사람이 이 성에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글쎄, 누가 있을까. 아, 혹여 차헤를 이르는 것인가? 마음이 있어도 그리 아픈 사람을 어찌 먼 길에 데려가겠나.”'“‘사람은 난공불락의 성에 있다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고, 화살이 빗발치는 전장에 있다고 즉시 죽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죽고 싶다고 해도 죽지 못하는 죄를 지고 사는 사람들도 세상엔 있는 법이지요.”'느닷없이 역사서 중에 나오는 글귀를 한 번 인용하더니 메논은 절을 하고는 물러갔다. 구부정한 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레이미아는 티렌의 처소 쪽으로 길을 잡았다. 가는 길에 그녀는 오늘도 티렌의 상태를 살피고 나오는 의사와 마주쳤다. 인사를 한 뒤 옆으로 비켜가는 그를 지나쳐 보내다가 문득 다시 불러 세웠다. 차헤의 용태를 봐 달라 부탁한 의사였기에 본 김에 차헤는 차도가 있는지 물었다. 의사는 난색을 표했다. 노환인터라 백약이 무효하다는 식이었다. 그러다 변명하듯 말했다.'“약이 그토록 듣지 않는 사람은 제가 살다 살다 처음 봅니다. 무슨 약을 써도 반응을 보이질 않아요. 설사 황제폐하께서나 쓸법한 최고의 영약이라고 해도 그 사람에겐 독약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무슨 뜻이오?”'“아무 효과가 없다는 면에서 말이지요.”'의사를 보내준 뒤 레이미아는 티렌의 처소를 몇 걸음 앞에 두고 멈춰 섰다.'“안 들어가십니까?”'“차헤에게 가야겠다.”'루카의 물음에 그리 답한 뒤 돌아서서 걸음을 빨리 하는 레이미아의 표정이 사뭇 무거웠다.'햇살이 넘쳐나는 바깥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헤의 방은 어두웠다. 창의 격자문을 내리고 휘장까지 쳐서 꼭꼭 닫아둔 데다가 의사가 주고 간 약들을 그대로 방치했는지 퀴퀴한 냄새까지 났다. 환기를 시키라고 한 다음 나중에 방을 깨끗이 치우라고 하인들에게 일렀다. 그리고 루카를 비롯한 시종들을 다 나가 있게 하고 레이미아는 차헤의 옆에 앉았다. 차헤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지만 레이미아는 싸늘히 말했다.'“안 자는 것을 알고 있어. 눈을 뜨고 일어나 앉도록 해. 무례한 것도 정도껏 해야지.”'“자비로운 척하시는 것은 다른 하인들에게나 하시지요. 고귀한 분의 자비에 감격하는 인간들로 주위를 채우고 싶으신 것 아니셨습니까.”'“그리 보였나? 자네는 얼굴만큼이나 머릿속도 딱딱하게 굳어버린 모양일세. 고지식한 게 아니라 어리석구먼.”'레이미아의 조소에 비로소 차헤가 눈을 떴다. 흐릿한 눈으로 물끄러미 천장을 응시하다가 툭하니 말을 이었다.'“제게도 좋았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 시절을 모두 한 명의 주인을 위해 바쳤지요.”'“그래서, 이제 와 생각하니 후회가 되는가?”'“후회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의 이 몸이 애석할 뿐입니다.”'“죽고 싶어도 쉽게는 죽지 못하는 몸이 된 것이 말인가?”'넘겨짚은 물음에 차헤의 눈이 또르륵 레이미아에게 와서 머물렀다. 레이미아는 빙긋 웃었다.'“내 아버님이 바람기를 누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이 성에는 미녀가 넘쳤고, 성 밖에도 아버님이 찾아다닌 미녀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지. 대공비가 마음고생이 심했으리란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만해. 내 할머님은 대공비를 사람도 아닌 괴물처럼 이야기하곤 했지만, 나는 솔직히 말하면 이해가 되기도 해. 자기 남자를 나누어 갖는 건 자존심이 있는 여자라면 못할 일이지. 나 같으면 그런 남자는 버리고 떠나는 쪽을 택했겠지만 대공비는 다른 선택을 한 거지 않나. 남을 상처 입히면서 결국 스스로의 마음을 더 크게 해하시는 길 말이야.”'“대공비께서 하신 일이 아닙니다. 제가 한 일입니다. 제가 그분이 괴로워하시는 걸 보다 못해 한 일입니다. 죽이려고 작정하고 한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몇 번의 실수가 있었지만, 그 뒤론 직접 제가 시험해본 약만을 썼습니다.”'“독약을 몸소 시험해 보다니. 그 충정이 놀랍구먼. 자네는 의사가 되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부채의 깃털을 매만지면서 레이미아가 짧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