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워! 이 흉측한 것을 당장 내 눈앞에서 치우지 못해!”'“마님, 마님, 제발요. 제발 주인님께, 주인님께 한 번만 말씀 올려 주세요.”'“그 양반이 내 말을 들을 사람이었으면 내가 이러고 살 것 같아? 너희들은 뭣하고 서 있느냐? 당장 이것을 끌어내란 말이다, 당장!”'“마님, 마님! 살려주세요, 제발 제 아기를, 이 아기만은…… 마님, 마님…….”'“들리지 않게 해! 저년의 목소리가 내 문지방을 넘으면 네 연놈들 모두 이틀간 쫄쫄 굶을 줄 알아!”'시중을 들고 있던 하녀를 비롯해 소란을 듣고 여주인의 처소로 온 하인들 모두 여주인의 표독한 말과 표정에 벌벌 떨었다. 자비라곤 약에 쓸 데도 없지만, 자신이 한 말만은 칼같이 지키는 여주인의 성미를 아는 이상 우물쭈물할 겨를이 없었다. 나이사의 딱한 처지를 아는 하녀들은 차마 그녀를 어찌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못 본 척했다. 남자 하인들은 애가 끓는 듯 절박한 나이사의 간청을 귀머거리처럼 외면하면서 묵묵히 여주인의 명령대로 그녀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깡마른 어린 소녀에 불과한 나이사의 몸은 세 남자의 손에 너무도 쉽게 질질 끌려갔다.'“제발…… 살려 주실 수 없으시면…… 죽기 전에 아버지의 얼굴이라도 보고 가게…… 제발요. 쿨레압, 쿨레압은 주인님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시죠? 도와주세요. 우리 아기, 이렇게 죽으면 너무 불쌍하잖아요.”'여주인의 처소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이사를 데려와 내려놓던 남자들 중, 가장 연로한 남자의 팔에 매달리면서 나이사가 말했다. 쿨레압이라 불린 반백발의 하인은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걸치고 있던 잔뜩 낡은 망토나마 벗어 나이사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부르튼 입술이 보라색으로 질린 걸 보고 짐작했던 대로 쿨레압의 손에 닿는 나이사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디찼다. 그러나 연한 은빛의 렐마 보석 같은 회색 눈동자를 담은 눈에선 그치지 않고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품에 꼭 끌어안은 아기의 얼굴에 뺨을 문지르면서 쿨레압에게 말했다.'“아기가 많이 아파요. 어제 저녁부터는 물조차 제대로 못 넘기고 계속 토했어요. 열도 이렇게 뜨겁고. 숨 쉴 힘도 없어서, 이젠 울지도 못해요. 밤새 마라 신께 빌었는데…… 제 기도가 부족했는지 계속 아프기만 해요. 죽지는 않겠죠? 네, 쿨레압? 겨우 7일 열일뿐인데, 죽지는 않겠죠? 네?”'쿨레압은 떨리는 나이사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괜찮을 거란 희망적인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었다. 가만히 옆에 앉아서 나이사의 품에 안긴 아기의 얼굴을 쓸어 만져보던 쿨레압은 흠칫 놀라 손을 들었다. '아기의 몸은 어미인 나이사보다 더 차디찼다. 열의 기운은 한 점도 없었다. 이미 무언가를 짐작해 가느다래진 눈으로 쿨레압은 다시 손을 들어 아기의 코와 입 주변에 가만히 대보았지만 결과는 역시나 같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서 자신의 아내가 죽기 전에 받은 마지막 아기였던 나이사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나이사, 루반은 이미 마라 신의 품으로 돌아갔구나.”'그 조용한 말에 눈물로 가득한 나이사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다 그녀는 다시 아이의 뺨에 자신의 뺨을 대어보고는 말했다.'“그럴 리가요. 이렇게 뺨이 따끈따끈한데. 봐요, 아저씨. 쿨레압, 이렇게 뜨겁잖아요. 아직 열꽃은 안 피었지만 이렇게나, 이렇게나 뜨겁잖아요. 아프지도 않으시면서 그렇게 허튼 소리를 하시다니요. 이렇게나…… 이렇게나 뜨거운데.”'“나이사. 나이사, 정신 차리렴. 마음 단단히 먹고. 이러다 너까지 잘못 되면 내가 죽어서 네 부모를 어떻게 보겠니?”'“아니에요, 아니에요. 루반, 루반 눈 떠보렴. 엄마 좀 보렴. 루반. 주인님이 아시면, 꼭 널 위해 의사를 불러 주실 거야. 루반, 제발. 제발 눈 떠서 엄마 좀 보렴……. 루반! 마님, 마님! 주인님을 불러주세요. 아기가 죽을 것 같아요. 제발, 가기 전에 얼굴 한 번만 보고 가게 해주세요. 마님, 마님!”'고개를 저으며 흐느끼던 나이사는 아기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자, 다시 주인마님의 처소를 향해 달음질쳤다. 얼어서 곱은 맨발은 차디찬 언 땅을 밟으면서 피가 터질 지경이었지만 나이사는 몰랐다. 마님의 처소 앞 화강암 바닥에 무릎을 찧으면서, 그리고 엎드려 머리를 댓돌에 찧으면서 땡땡 언 몸의 여기저기에 상처가 생기고 피가 흘렀지만 그래도 몰랐다. 그녀는 주룩주룩 쏟아지는 눈물 속에 애타게 한 사람만을 찾았다.'“마님, 마님!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제 아기를 살려 주세요……! 주인님께, 주인님께 아기가 아프다고 말 한마디만이라도…….”'“혀를 잘라! 저년의 혀를 잘라버리란 말이야, 당장!”'왈칵 덧문이 열리더니 여주인이 나타나 엎드려 있던 나이사에게 청동 화병을 집어던졌다. 청동 화병은 앙상한 나이사의 어깨에 맞고 화강암 바닥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화병에 꽂혀 있던 크라토 꽃 한 무더기와 함께 차가운 물까지 흠뻑 뒤집어쓴 나이사에게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몸이었지만 그녀는 아직 살아있었던 것이다. 물이 뚝뚝 듣는 얼굴을 천천히 들자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두 눈에도 피가 고여 들었다. 그런 눈으로 나이사가 천천히 말했다.'“마님, 자비를……. 부디 자비를…….”'아무리 억척스런 여주인이라고 해도 피눈물을 쏟아내는 나이사의 모습에는 흠칫했다. 그 찰나를 비집고 쿨레압이 서둘러 나이사를 감싸면서 말했다.'“용서해 주십시오, 마님. 지 새끼가 죽어서 살짝 정신이 나간 모양입니다. 조용히 단속시킬 테니, 부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흥! 어차피 오래 살아봤자 똥 무더기에서 구를 게 뻔한 아이, 지금이라도 죽어준 것에 감사는 못할망정! 당장 치워, 또 한 번 저 년 곡소리가 내 귀에 들리면 이번엔 네놈의 혀를 뽑아놓을 줄 알아!”'굽실거리는 쿨레압을 싸늘하게 노려보고는 쾅 덧문을 닫으며 여주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빛이 사라지고 다시 암흑 속에 남은 나이사는 멍하니 창문을 올려다보면서 여전히 중얼거리고 있었다.'“자비를…….”'“나이사, 자, 일어나자. 이러다 너까지 큰일 난다. 아기는 이리 주고.”'“손대지 마세요! 제 아기예요, 제 아기란 말이에요! 주인님께 보이기 전엔 아무 데도 안 보내요. 마라 신이라도 제 아기를 빼앗아 갈 수는 없어요!”'“나이사, 나이사!”'아기를 가져가려는 쿨레압의 손에서 홱 몸을 돌린 나이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엄청난 속도로 뜰을 가로질러갔다. 하인들의 숙소가 있는 쪽의 어둠으로 사라져 가는 그녀를 보면서 쿨레압은 그만 한숨을 쉬고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까지 상황 돌아가는 걸 지켜보던 다른 하인들도 씁쓸한 어깻짓과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가면서 그들이 내일분의 식사를 걱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쿨레압은 무정하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주인이 건드린 하녀가 낳은 아기가 죽은 일은 고작해야 한 끼의 식사보다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쿨레압은 가슴이 아팠다. 나이사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이보다는 좋은 운명이었을 것을.'“아니지. 이런 곳에선 태어나는 것이 죄지……. 또 눈이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