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듯한 공대. 건널 수 없는 깊은 협곡이 놓여 있는 듯 멀고 먼 거리감. 그의 품에 안겼던 그 여인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낯선 분위기. '소중히 악기를 품고 있던 연약한 악사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날카로운 전사의 기백을 내보이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는 반월도 외에도 그녀의 검은 허리띠에는 곡선으로 잘빠진 샴쉬르가 매달려 있었다. 할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에레미아는 양손에 받쳐 들고 있던 커다란 반월도의 손잡이를 단번에 비틀었다. 처음부터 분리되도록 고안된 듯 검집 없이 만들어진 반월도의 커다란 날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작은 물건 하나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손잡이를 세워 다시 옆으로 꺾었다. 반으로 갈라진 손잡이 안에는 손잡이부터 검집까지 눈처럼 흰 잠비야가 고이 잠자고 있었다. '백의 잠비야. 이스타니아를 건국한 초대 라자인 타마라의 잠비야. 오래전 뮤족의 수장에게 내린 약속의 증표가 백여 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라지드는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일말의 의혹마저도 날려버린 증거물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받아야 한다. 그것이 약속이니까. 오래전 초대 라자인 타마라가 떠나는 뮤족을 얽매기 위해 건넸던 잠비야. 후대에 세 번은 라자의 부름을 받아 신하로서 검을 세우리라 약속했다는 증거. 첫 번째는 백오십 년 전 남 대륙에서 있었던 하르마탄 제국과의 전쟁에서, 두 번째는 백 년 전 일어난 반란 진압 때 나타났다. 그때마다 놀랄 만한 공을 세우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일족. 전설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아이들의 옛날이야기에 곧잘 등장하는 뮤족. 전사의 부족이라 칭송받는 일족이다. 사막에 살고 있는 라족이 뛰어난 검술 실력을 이어가고 있다지만, 그들은 은둔자이자 고행자였다. 다섯 부족 중 가장 뛰어난 전사와 검술을 보유한 부족은 다름 아닌 뮤족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스타니아의 통일 전쟁은 성공하지 못했으리라 일컬어지는 전사의 부족. 그런 뮤족을 이끄는 족장이 이울 하룸이라 불리는 미아라는 건가. 아니, 이제는 에레미아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에레미아 뮤…… 에레미아 뮤…… 에레미아 뮤란 말이지.”'보름 동안 익숙했던 미아라는 이름 대신 낯선 이름을 주문처럼 몇 번 읊은 라지드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주 낮고 억눌린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져 조용한 밤의 장막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미친 사람처럼 웃어젖히는 그를 에레미아는 보석처럼 투명한 눈빛으로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그녀의 상처가 더 깊었기에. 사내의 힘에 굴복한 것도 서럽거늘, 날이 밝자마자 창녀처럼 돈을 받고 내쳐진 느낌이란……. 모멸감과 수치심을 감추고 당장이라도 숨어들어가 목을 따버리겠노라고 펄펄 뛰는 기예단의 다른 사람들을 다독거려야만 했던 심정을 이 사내가 알까. 그 참담함을 씹어 삼키고 이 자리에 서야만 하는 심정을 짐작이나 할까. 모르리라. 절대로 알 수 없으리라. 자신의 상처를 핑계로 다른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도 똑같은 상처를 내고 있다는 것을…….'방과 정원을 쩌렁쩌렁 울리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이번에는 에레미아가 기다렸다. 그의 답을. 약속의 말을. 오랜 세월 굴레가 되어 자유를 얽어맨 맹약을 벗을 수 있는 답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의 부름에 응했으니, 그에 부응하는 답을 받아야만 했다.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이 마침내 깨어졌다.'“그대들의 맹약이 신실함을 이스타니아의 라자인 라지드 샨이 증명하노라. 마지막 약속이니, 백의 잠비야를 다시 거둠으로 그대들의 자유를 인정하노라.”'그것은 무려 삼백 년 만에 허락받은 완전한 자유였다. 뮤족의 완벽한 독립. 그러나 나라를 건설하거나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뜻하는 것이다. 바람의 기질을 타고난 뮤족이 태고의 기질로 돌아가도 좋다는 인정. 아직 불러낸 라자의 일이 남았지만, 상관없었다. 그것이 카자한 산맥의 흙을 모두 파내어 반대쪽으로 옮기는 일이라 해도 일족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해낼 테니.'에레미아가 내민 백의 잠비야를 받기 위해 손을 내민 라지드는 잠비야와 함께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가운 아래로 다시 좁은 소매 옷을 걸쳐 흰 살결이 보이지 않았다. 목깃도 높았다. 겉으로 보이는 살결은 얼굴과 손뿐이었다. 한 걸음 성큼 다가선 라지드는 붙잡은 손을 더 세게 쥐며 그녀의 눈동자를 노려보았다.'“미아…… 에레미아라……. 멋지게 날 속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