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바람이 차갑게 부는 겨울이었다. 전날 오토바이를 타고 몇 시간을 미친 듯 달리며 스릴을 즐겼던 지언은 감기 몸살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바깥의 한기보다 더 썰렁한 집에 혼자 있기 싫어 아픈 몸을 이끌고 학교로 향했다.'등교 시간이 훨씬 지난 학교 주위는 한산했다. 짙은 그레이 색의 깔끔한 교복 재킷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넓은 어깨를 움츠리며 인상을 찌푸린 지언의 반듯한 입술 사이로 따뜻한 숨결이 비어져 나왔다. 차가운 공기와 부딪힌 입김이 하얗게 모습을 드러내었다.'춥다.'그때, 바지 주머니 부근에서 진동이 느껴져 지언은 부르르 몸을 떨고 있는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지금 이 시간에 등교하지 않은 지언에게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은 단 한 명, 이서뿐이었다. '통화버튼을 누르며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다 대었다.'“여보세요.”'[안 오냐?]'익숙한 목소리에 벌어져 있던 교복 재킷을 여미며 대답했다.'“가고 있어.”'[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아니.”'[얼른 와라.]'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 속으로 찔러 넣고 다시 몸을 웅크리며 느릿하게 교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등 뒤에서 타박타박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언은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았고,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 한 소녀를 볼 수 있었다.'지언이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건물과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중학교 교복을 입은 소녀가 죽을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도망을 치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쏜살같이 다가오는 그 모습에 지언의 입술이 반사적으로 벌어졌다.'이내 지언의 바로 앞에까지 달려온 소녀는 가쁜 숨을 토해내며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두 손으로 짚었다. '지언은 앞에 선 소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것도 잠시, 저 멀리서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는 중학교 학생 주임 선생님이 보였다.'“민은지, 너 거기 안 서!”'“헉!”'등 뒤에서 들려오는 살벌한 고함 소리에 소녀는 흠칫하며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고등학교와 중학교 건물이 한 담벼락 안에 존재했지만 등교를 하는 교문은 달랐다. 중학생들이 등교를 하는 뒷문에서부터 그들의 쫓고 쫓기는 혈투가 시작된 듯 보였다.'어깨를 넘은 기다란 생머리, 학교 규정을 어긴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등교 시간이 훨씬 지난 때였다. 지언은 자신의 앞에서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토해내는 소녀, 은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무심한 표정으로 몸을 돌리며 발걸음을 재개하려 했다.'하지만 교복 소매를 부여잡는 다급한 손길에 다시 뒤돌아보아야만 했다. 스친 바람의 흔적으로 빨갛게 얼어 있는 은지의 얼굴을 응시하던 지언이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뭐야.”'“도와주세요.”'지언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은지가 힐끗 눈빛으로 뒤를 가리켰다. 시선을 따라가자 점점 가까워지는 학주의 몸체가 보였다.'“허리 좀 숙여주세요.”'“뭐?”'“제발요.”'“싫다면?”'지언은 비스듬히 얼굴을 기울였다.'“부탁드려요.”'담을 타 넘으려는 생각인 듯했다. 은지는 급한지 발을 동동 굴리며 잡고 있는 지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어서요, 어서요! 안 그러면 저 빡빡이 된단 말이에요.”'잔뜩 울상을 지은 채 애원하는 은지의 모습에 찰나 동안 머리를 빡빡 민 어색한 소녀의 형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거친 일갈이 귓속에 꽂혔다.'“민은지!”'흠칫하며 뒤를 돌아본 은지가 무감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지언을 향해 살려달란 눈빛을 계속 보내었다.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은 채 학주는 점점 더 가까이, 은지의 숨통을 조이며 다가오고 있었다.'그 순간, 인상을 잔뜩 구긴 지언이 느릿하게 허리를 숙이며 은지의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은지가 담을 넘을 수 있도록 들어 올려 주었다. 지언의 품에 안겨 공중에 붕 뜬 은지는 두 팔을 쭉 뻗어 담벼락을 손으로 짚었다. 그와 동시에 숙련된 솜씨로 담을 넘어갔다.'탁!'단단한 담벼락 너머에서 안전한 착지를 알려주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뒤이어 그녀의 쾌활한 목소리도 귓속으로 파고들었다.'[고마워요! 보답할게요!]'타박타박, 타박타박.'운동장을 가로질러 건물 쪽으로 뛰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어렴풋해졌다. 담벼락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지언은 미친 듯 달려오고 있던 학주를 쳐다보았다. 그는 기력이 다 했는지 헉헉거리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도망자를 도와준 공범의 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