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쾅!’'류의 발길질에 단단한 옥양나무 문이 떨어져나갈 듯했다.'‘드디어 왔군.’'아리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흘렀다. 그녀의 미소를 환희의 몸짓으로 오해한 사내가 아리의 위에서 그녀의 가슴을 덥석 물고 촉촉이 적셨다. 아직 류가 방에 들어온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사내는 분홍 꽃봉오리를 희롱하듯 혀로 달구며 잇새로 살짝 깨물었다. '아리는 류의 난폭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상상하며 사내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그러자 사내가 환희의 표정을 지으며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바보 같은 사내였다. 자신에게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사랑이라는 한 마디에 무릎을 꿇은 어리석은 사내였다.'아리는 희미하게 웃었다.'이용한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그에 합당한 쾌락을 제공했으니 사내가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이제 이 사내에게 볼일은 다 끝이 났다. '아리는 류가 어서 이 사내의 엉덩이를 걷어차길 바랐다. 드디어 류와의 지긋지긋한 싸움을 오늘 부로 끝내는 거다. '아리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증오와 증오가 거듭될 때마다 10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이제 아리에게 남은 것은 지금을 위해 남겨둔 한 줌의 차가운 감정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이 순간만 지나면 곧 스러져 재가 될 것이다. 그러면 아리의 맘속에는 잔잔한 평화만 남으리라. '아리는 독버섯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사내를 채근하듯 엉덩이를 들썩였다. '‘스르릉’'그와 동시에 류의 혈월(血月)이 사내의 목에 겨누어졌다. 서늘한 기운이 열기에 들떠 있던 피부를 차갑게 식혔다. '혈월. 핏빛 달. 이 시대 최고라 일컫는 검사(劍士)의 애검. '날카로운 예기를 뿜는 혈월의 기운에 사내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리는 자꾸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꼬챙이에 꾀인 개구리 같이 사내의 얼굴이 참담하게 변한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죽은 자의 칼’이라고 불리는 류가 그토록 무서웠던가? 이만한 배짱도 없이 자신과 사랑 놀음을 할 생각을 했던가?'류는 지독히도 싸늘한 얼굴이었다. 아내의 부정에 분노한 지아비의 얼굴도, 배신당한 사랑에 서글퍼하는 연인의 얼굴도 아닌 무표정.'그저 자신의 안식처를 침범한 벌레를 쳐다보는 듯한 불쾌함과 그 미미한 존재에 대한 조소만이 희미하게 입가에 걸쳐져 있을 뿐이었다.'사내는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옷을 챙겨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랑스런 연인 아리가 심히 염려가 되는 듯, 두려운 가운데서도 걱정하는 기색을 낱낱이 드러낸 채 옷을 끌어안으면서 아리를 바라보았다.'“죽고 싶은가? 이 상황에서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이라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 테지?”'얼음과 같은 류의 목소리가 사내의 이성을 일깨웠다. '그렇다. 남의 부인과, 더더구나 그 주인의 침상에서 놀아난 죄. 현장에서 참살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다. '사내는 제발 저 악마와 같은 냉혈한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연인 아리를 단지 몇 번의 손찌검만으로 용서하길 바랐다. 그것도 간절히.'“가요. 내 걱정은 말고.”'아리가 그를 안심시키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류와 단 둘이 남아 어서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고자 하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내에게는 저를 걱정하는 연인의 달콤한 배려로만 들렸다. 사내는 아리가 염려되는 가운데서도 사랑의 충만감이 가슴을 뿌듯하게 채우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물러가지만 그녀를 꼭 되찾으리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