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주야, 지환아. 당장 나 어떻게 되는 거 아니다. 의사도 장담 못한다고 했지만 오래 사는 사람은 1년도 살도 2년도 살고 그런다고 그랬어. 다 마음먹기 달렸다고. 그래도 사람 목숨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또 내가 좀 더 지나 더 아프게 되면서 정신이라도 흐려질까 싶어서 미리 말하는 거야. 너희들도 마음의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고.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 솔직히 위암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 멀쩡하다.”'“말이 돼? 말기라서 수술도 안 되는데 안 아프다는 게 말이 되냐고?”'“그러게. 신기하게 난 별로 모르겠다. 그냥 평상시랑 다를 바가 없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다만 내가 부탁이 하나 있다.”'“뭔데요?”'“들어줄 수 있냐?”'“아, 뭔지 들어봐야 알지. 그냥 무조건 들어줘?”'“그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버지 마지막 부탁인데 무조건 들어줘.”'“그런 게 어딨어? 당장 안 죽는다며?”'“모르잖아. 그러니까 무조건 들어줘.”'무조건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우식이 영 수상쩍었지만 그래도 지환은 그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지막 부탁이 될 수도 있는데 이러다 갑자기 아버지 돌아가시고 혼자 남으면 이게 한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가위에 눌려 살고 싶진 않았다. '“알았어요. 들어드릴게요.”'“난주야, 너도 들어줘야 한다.”'지환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우식은 이번에는 난주에게 다짐을 받고자 했다.'“네.”'난주는 우식의 물음에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뭔 줄 알고 그냥 바로 대답해? 그러다 들어줄 수 없는 거면 어쩌려고.”'지환에게는 무조건 들어달라고 억지를 썼지만 정작 난주에게는 우식도 조금 망설여졌다. 우식 역시 자신이 하는 이 부탁이 너무도 무리하고 어처구니없는 부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난주에게는 힘든 일일 수도 있었다. 자식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한 자신이 이제 그 못난 자식을 난주에게 부탁하는 게 너무도 미안했다. '“나 죽기 전에 니들 짝 찾아주고 싶다. 그렇다고 아무나 는 내가 싫다. 나는 난주야, 네가 우리 지환이 좀 데리고 살아줬음 좋겠다.”'“아버지, 얘는 가족이잖아.”'우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환이 펄쩍 뛰었다. 마치 못할 짓을 시킨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지환의 반응에 난주는 또다시 작은 상처를 입었다. 지환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또 이렇게 그의 반응에 상처를 입고 마는 자신은 아직은 너무도 바보 같은 여자였다.'“너희 둘이 피가 섞인 것도 아니고 가족처럼 가깝게 지낸 거지, 엄밀히 말해서 가족은 아니지. 그리고 이건 뭐로 보나 난주가 손해야. 그래도 내가 난주나 돼야 눈 감지, 아니면 죽어서도 너 같이 못난 놈 걱정하느라 제대로 쉴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런다. 네가 오죽 못났으면 이래, 내가.”'“아무리 그렇다고 동생 같은 애를 데리고 사는 놈이 어딨어? 그건 근친상간이지.”'노골적인 지환의 언사에 결국 우식은 지환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입 다물어, 이 녀석아. 너는 난주가 그러겠다고 하면 잔소리 말고 조용히 따라가. 네가 오죽 못나면 내가 이래. 너는 이놈아, 아무나 돈 빌려주고 1년 만에 회사 말아 먹을 놈이야. 우리 우림 식구가 몇인데 너 한테 맡겼다가는 다 같이 굶어 죽어. 그러게 좀 차분히 사업 이을 궁리나 했음 오죽 좋아. 이건 말만 이사지, 아는 게 있나, 일을 열심히 하나, 제대로 된 게 하나가 없어. 난주 봐라. 너보다 다섯 살이나 어려도 대학원 다니면서도 회사 일에 이렇게 열심인 거 너는 난주 보기 부끄럽지도 않냐.”'“아무튼 그래서 무조건 난주랑 결혼해?”'“해. 난주가 해주겠다고 하면 무조건 해.”'“야, 이난주. 네가 결정해. 너 나랑 결혼해서 살 수 있어? 나는 너 여자로 안 봐. 알지? 나한테 너는 가족일 뿐이다.”'지환은 안 된다고 하라는 듯 눈을 부라렸지만 그 순간 난주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할게요.”'“야, 너 미쳤어? 네가 나랑 결혼을 왜 해? 너 유학 가고 싶다며? 준비 다 해 놓고선 갑자기 결혼을 왜 해? 너는 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아무리 우리 아버지가 좋아도 그렇지. 자식도 아닌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 굳이 안 따라도 돼. 난주야, 정신 차려.”'지환이 펄쩍 뛰며 그런 난주를 말려보려 하지만 또다시 우식에게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아파요. 무슨 암 환자가 이렇게 힘이 세?”'“아프라고 때렸다, 이놈아. 너는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 난주야, 고맙다. 내가 너한테 이렇게 큰 짐 맡기고 가는 게 미안하지만 그래도 네가 데리고 살면서 사람 만들어 다오. 유학이야 천천히 가도 되고. 또 굳이 너는 유학 안 가도 일 하면서 배우는 것도 커. 실무와 학문은 다르지만 실무 익히고 학문 그 뒤에 익혀도 나쁘지 않을 거다. 난주야, 정말 고맙다. 그래도 내가 네 덕에 마음의 짐 하나 더는 구나.”'“아부지는 내가 짐이야?”'“그래, 이놈아. 죽는 마당에 너는 내 마음에 천근만근 돌덩이다. 그냥 조용히 있어. 너는 무조건 난주가 하자는 데로 따르기만 하면 돼.”'우식은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했는데 그걸 난주가 한 번에 해결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이보게, 이림이. 내가 많이 미안하네. 자네 귀한 딸한테 내가 너무 큰 짐 맡기는 거 아는데 그래도 세상에 단 둘이 남는 이 녀석들, 남보다야 그래도 가족 같은 둘이 낫지 않겠는가. 내 자네한테 미안한 건 거기 가서 자네 만나 갚겠네.’' '그리고 3년 뒤…….''“내 말 못 들었어?”'“들었어.”'“그럼 뭐라고 말을 좀 해. 나 기다리잖아.”'“내가 너 이런 모습에 질렸어. 알아?”'“네가 나한테 질린 애정이라도 있었어? 우린 말 그대로 파트너였을 뿐이잖아. 언제고 내게 관심 가진 적 없는 네가 지금 하는 말 조금 우습다.”'난주는 냉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지만 난주의 그 말에는 지환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인 이유로 한 결혼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이혼을 원하는 건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여자가 생겼다는 말로 이혼을 하자는 마당에 어찌됐든 자신이 화 낼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그제야 지환은 자신이 이번에도 역시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상황을 무마해보려고 하지만 역시나 난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네 말 다 들었어. 그런데 일단 나한테 단 몇 분이라도 생각 정리할 시간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닐까? 네 말 듣자마자 내가 ‘그래’ 라고 말하면 네 기분은 그저 좋기만 할까?”'하긴 ‘이혼하자’는 말에 바로 알았다고 답하면 그것 역시 기분이 나쁠 것도 같다. 언제나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난주는 자신보다 똑똑하고 어른스럽고 잘났다. 바로 난주의 그런 점이 지환은 싫었다. 여자란 모름지기 자신보다 조금 못나야 품어줄 맛도 나는 게 아니겠는가. 어수룩한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만 없는 난주는 솔직히 인간미가 없었다. 그러니 3년을 살고도 이렇게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거겠지. 그러니 이렇게 된 게 자신의 잘못인 건 아니었다. ''“그래. 결정 내렸어?”'“그렇게 해.”'난주의 너무도 담담한 말에 지환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뭐?”'“네 뜻대로 하자고. 그런데 몇 가지 그 전에 제안이 있어.”'‘그럼 그렇지. 네가 순순히 물러난다 그럴 때 내가 이상했다.’ '지환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지자 난주는 다 예상했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너를 위한 제안이니까 일단 들어나 봐. 무조건 내 말을 따라 달라는 건 아니니까.”'“말해봐.”'이혼해주겠다는 데 말 몇 마디 더 못 들어주겠는가. 지환은 담담히 들어주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고작 30초를 넘기지 못했다.'“일단 그 여자에게 너 돈 없다고 말해.”'“뭐?”'“그 여자가 어떤 여잔지 나는 알고 싶지도 않고 누군지 알 필요도 없어. 어차피 헤어지는 마당에 내가 그러는 건 좀 우습지. 우리가 서로 미칠 듯 사랑해서 한 결혼도 아니니까.”'솔직한 자신들의 상황인데 말하면서도 입맛이 썼다. 고작 이렇게 정리될 걸 3년이라는 시간동안 대체 자신은 뭘 한 걸까? 바보같이 3년이라는 시간동안 그의 등만 바라본 것이다. '“그런데?”'“그렇지만 나는 아버님의 유언을 잊지 않았어. 너를 끝까지 챙겨 달라는 그 말씀 이제는 못 들어드리게 됐는데 마지막으로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좀 알아야 되지 않을까?”'“좋은 여자야.”'‘너랑 달리 내 말도 잘 듣고 순종적이고 거기다 예쁘고 여성스럽고. 아무튼 너랑은 완전 반대야.’'지환의 그 말에는 담담하자고 견뎌내자고 마음먹었던 난주의 심장이 또다시 누군가가 거세게 움켜쥔 듯 아파왔다. 그러나 난주는 언제나처럼 꾹 참아냈다. 자신은 이난주니까. 어떤 아픔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음공주 이난주니까. '“그렇겠지. 그렇지만 나로서는 객관적인 어떤 증거 같은 게 필요해. 물론 네가 왜 그런 거까지 신경 쓰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내 생각에는 너를 위해서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난 지금도 만족하는데 무슨 증거가 필요해?”'‘뭐가 이렇게 복잡해? 좋으면 그냥 살면 되잖아. 굳이 증거까지 필요해?’ '그러나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난주에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또 혼이 날 게 뻔했다. '“그 여자가 과연 원하는 게 구지환 이라는 남자인지 아니면 구지환 이라는 남자 손에 쥐어진 돈인지 알게 뭐야? 알다시피 너 돈 좀 있는 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네 씀씀이에 넘어간 건지 아니면 진짜 진실한 사랑이 늦게 찾아온 건지 알게 뭐야? 너는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이런 경우 내가 이혼하고 나간 뒤 네가 그 여자랑 재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 여자가 편할 것 같아?”'하긴 난주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한테야 뭐 소 닭 보듯 했지만 누가 봐도 완벽한 며느리에 아내였으니까. 더군다나 바깥일까지 잘해서 모두들 안 사람 잘 들어와서 회사가 번창한다고들 입이 모아 칭찬을 하곤 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자신이 난주와 이혼을 하면 자신이 욕먹는 건 당연할 테고 덩달아 유나까지 이상한 여자가 되는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난주는 자신의 말에 어느 정도 지환이 수긍한다는 생각이 들자 말을 이었다.'“많이 속이라는 것도 아니야. 딱 한 달만 돈 없이 생활해봐.”'“말만 돈 없다고 하라는 게 아니라 아예 돈 없이 살라고?”'지환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구던가. 마르지 않는 지갑 구지환이 아니던가. 그런데 돈 없이 어떻게 살라고? '“힘들겠지. 힘들 거야. 너 이제껏 그렇게 살아 본 적 없으니까. 그렇지만 고작해야 한 달이야. 그 한 달 동안 너는 미래 너의 생활에 대한 어느 정도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 거야. 이 상황에서 이혼하면 너만 나쁜 사람 되는 거 너도 잘 알거야. 나 나름 열심히 살았으니까.”'‘그걸 꼭 저렇게 지 입으로 말하고 싶을까? 암튼 쟤도 은근 잘난 척 대마왕이야. 하기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잘나긴 했지. 공부 잘해, 일 잘해. 다만 여성적인 매력이 부족할 뿐이지. 근데 그게 너무 커. 네가 조금만 여성스럽고 살갑게 날 대했다면 우리 사이도 조금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이제와 이게 다 무슨 쓸데없는 생각이냐. 이제 나한테는 유나가 있는데.’'“그럼 정확히 어떻게 하라는 거야?”'그렇게 지환은 이혼을 위해 한 달간의 빈대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