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Masquerade''[1] Disillusion''“부탁이야. 내가 죽일 놈이란 거 알아. 하지만 한 번만 나 봐 줘. 나한테 이거 일생일대의 기회야.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이제 그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어. 내가 잡기만 하면 그거 바로 내 차지가 된다고. 제발, 제발 도우야. 내가 이렇게 사정할게. 나 좀 놔주라. 제발.”'“놔 줘? 제발 놔달라고? 그 말할 때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 안 해? 지금 오빠가 나한테 이런 걸 내밀면서 놔달라고 하면 내가 뭐가 되니? 지금이라도 그렇게 빌지 않으면 내가 약혼식 가서 깽판이라도 칠까 겁이 나는 거야, 뭐야!”'도우는 손에 쥐고 있던 분홍색 봉투를 성문의 얼굴에 후려치듯이 집어던졌다. 잔뜩 구겨진 봉투가 그대로 맥없이 카페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성문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것은 맞은 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구경이라도 난 양 그들 쪽을 보고 있는 걸 단 일 초도 잊지 않고 있는 그의 시선의식증 때문이었다. 이성문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를 그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허영심의 결정체나 다름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도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그가 일하는 은행에서 한 시간 가량이나 떨어진 이곳에서 약속을 정한 것도 최대한 아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일 게 틀림없었다.'애써 침착하고 미안해하는 얼굴을 만들기 위해 애쓰면서 성문이 말했다.'“너 그럴 애 아니란 거 알아. 도우 네가 얼마나 얌전하고 반듯한 앤지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그리고 너 정이 많고 따뜻한 애란 것도 알아. 그러니까 이렇게 힘들게 부탁하는 거야. 염치없지만 나, 가게 해줘. 나한테 그 사람 필요해. 우리 집 사정 같은 거 더는 말하지 않아도 알 거고, 거기다 그 사람이라면 나 삼십 년 걸릴 길, 십 년 안에 가능해. 내가 발버둥쳐도 못 미쳤을 높은 곳도 이젠 꿈이 아니라고. 그냥 딱 하나 네가 나 자유롭게 가게 해주면 난 평생 너한테 고마워하고 살 거야. 그러니까 도우야, 사람 하나 살린다 치고 우리 깨끗하게 끝내자.”'“……깨끗하게 끝을 내? 우리가 4년을 사귀는 동안 내가 오빠 뒷바라지 하고, 오빠 집 사람들한테도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잘했잖아. 식만 안 올렸지 오빠 어머니도 나라면 며느리처럼 잘 해주셨어. 취직하고 자리만 잡히면 결혼하자고 했던 게 일 년이 됐니, 이 년이 됐니? 고작 육 개월도 안 된 말인데 기억 못해? 그런데 이제 와서 나한테 하는 소리가 깨끗하게 끝을 내자는 거야? 은행장 막내딸인지 뭔지가 그렇게 좋아? 인두겁 쓰고 어떻게 나한테 이래? 오빠도, 오빠 어머니도 갑자기 사람들이 그렇게 안면몰수하고 데면데면하게 굴더니만 이제 와서 덜렁 약혼식초대장을 내밀어? 정말 어떻게 이래……? 어떻게 오빠가…… 오빠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주스 잔을 잡은 도우의 손이 격하게 떨렸다. 그걸 본 성문이 움찔하면서 그녀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봤다. 마치 그녀가 분에 못 이겨 주스라도 그에게 뿌릴까 걱정하는 폼으로 살짝 뒤로 물러나 앉는 걸 보면서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잔뜩 충혈 되었던 도우의 눈에 또 다른 감정이 스며들었다. 경멸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양복도 못 보던 거다. 은행 면접까지 합격했단 소식을 듣고서 큰 맘 먹고 도우가 사주었던 양복 세 벌은 처음 한 달 이후론 본 기억도 없다. 초입행원이 할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싶어서 그의 연락이 뜸해진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간혹 만날 때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고급스런 양복을 휘감고 있는 그를 보면서도 당장에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서 월급 받은 걸 죄 옷에 쏟아 부었다는 그의 변명을 순진하게 믿었었다. 두 달 전에 신형인 게 분명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온 그를 보았을 때도 아는 형이 급히 처분한 걸 싸게 얻었다는 그의 말을 고스란히 믿었다. 마법의 지갑이라도 얻은 사람처럼 커진 씀씀이며, 까다롭게 변한 그의 취향까지 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변화라고만 생각했다.'그러나 이제 눈을 가리고 있던 막이 한 겹 사라지자 보이는 사실은 얼마나 간단명료한지. 그저, 그는 하나의 전형이었을 뿐이다. 갖은 고생을 견디고 엘리트의 반열에 오른 고학생이 화려한 세계에서 풍파 하나 없이 피어난 아름다운 꽃의 향기에 취하고 만 거였다. 그 꽃을 꺾으면 그 자신의 구질구질한 과거 역시 향기로운 하나의 미담으로 승화될 거란 착각은 덤이고. 삼십 년 가까이 시장에서 국밥집을 하면서 삼남매를 키운 홀어머니의 맏아들. 내로라하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한눈팔지 않고 공부에 매진해서 원하던 은행에 합격했지만 아직 그의 밑으로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는 동생들이 둘이 있다. 물론 어머니도 연세가 있으시니 계속 식당일을 하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그러니 눈앞에 온 기회가 얼마나 유혹적이었겠는가. 꽃은 아름답고 그 뒤에 펼쳐진 화원은 그에겐 천국처럼 눈부셨을 것이다. 평생의 짐으로 따라다녔을지도 모르는 ‘가족’이란 존재에 대한 책임감도 그가 맘먹기에 따라서 순식간에 가볍디가벼운 것이 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권세와 명예에 대한 그의 야망을 가족에 대한 헌신이라는 명분으로 그럴싸하게 가리면서, 마치 돈과 힘에 눌려서 어쩔 수 없이 피눈물을 머금고 돌아서는 가련한 남자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파인애플 주스를 뒤집어쓸지도 모른다는 염려로 자꾸만 쭈뼛거리며 셔츠 목깃을 어루만지고 있는 소심함이라니.'“깨끗하게 끝내려면 뭘 어떡해야 하는 거지? 약혼식 일주일도 안 남은 이 시점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끝나는 게 돼? 잘 가라고 박수쳐 주고 악수나 한 번씩 하고 헤어지면 되나? 아니면 내가 약혼식에 나타나서 깽판부리지 않겠다는 각서라도 써주면 될까? 뭘 어떡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나 누구랑 헤어져 본 적이 처음이라서. 오빠는 혹시 알아?”'맥이 풀려서 흐릿하게 웃으면서 도우가 물었다. 성문은 그녀가 누그러졌다고 생각했는지 짐짓 가까이 다가앉으면서 헛기침을 하더니 문득 양복상의 안에서 하얀 봉투를 하나 더 꺼냈다. 그러더니 그것을 조심스레 도우 쪽으로 밀었다.'“이건 또 뭐야? 결혼 청첩장도 함께 주는 거야? 보통 약혼이랑 결혼 그렇게 차이 나게 안 하던데. 약혼하면 일이 개월 사이 두고 결혼하고 그러더라. 오빠도 그래?”'“열어봐.”'“은행장 따님은 결혼식을 어디서 하시려나, 한번 구경이라도 해볼까. ……뭐야 이건?”'건성으로 봉투를 들어서 그 안을 확인한 도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봉투를 열고 그 안을 쳐다보는 자세 그대로 눈만 움직여서 앞에 앉은 성문을 얼려죽일 것처럼 노려본다. 그런 그녀의 싸늘함을 제대로 캐치 못했는지 성문은 다시 헛기침을 한번 하고 대답했다.'“얼마 안 돼. 아직 내가 쓸 수 있는 돈이 별로 없어서, 어머니한테 말씀 드렸거든. 어머니도 너한테 굉장히 미안해하고 계셔. 사람이 이러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씀 하셨지만 결국 못난 아들 때문에 나쁜 사람이 되실 수밖에 없는 거지. 그거 현재로썬 나랑 어머니가 끌어 모을 수 있는 전 재산이나 다름없어. 성의라고 생각하고…….”'“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