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緣風''''''프롤로그'''대흥(大興) 23년 태진국(太進國)''''''찬 기운을 품고 있는 봄바람도 어느덧 따가워진 햇볕을 막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시릴 정도로 흰 빛을 뿜어내는 옥돌 계단으로 올라서는 남자의 얼굴은 바닥을 장식한 딱딱한 옥돌과 같이 차갑게 굳어있었다.''“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계시나이다.”'' 다가오는 윤을 향해 반색하는 내관을 보며 윤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낸 무언의 암시를 눈치 챈 내관이 목청을 길게 내리 뽑았다.''“폐하, 담왕(潭王) 들었사옵니다.”''“들라 하라.”'' 위엄 있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금사남목(金絲楠木)과 화류목(樺榴木)으로 건축된 웅장한 태극전(太極殿)은 건물 자체만으로도 고풍스럽게 그지없었으나 내부는 더욱 더 웅장하고도 화려했다. 고운 장식 기둥을 감싸고 다섯 개의 발톱을 허공에 뻗고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 같은 두 마리의 용은 황제의 지엄한 권위를 나타내 주었고, 보와 방(枋), 천장의 표면에는 솟구치는 용과 상서로운 구름, 화초 같은 문양을 금실로 그려 넣어 장식성을 더했다. 하지만 윤의 눈에는 오로지 현란할 정도로 수많은 용들로 둘러싸인 황금 옥좌 한가운데 앉아 있는 황제의 얼굴만 들어올 뿐이었다.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을 밟으며 천천히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딘 윤은 황제를 향하여 천천히 예를 다한 후 비로소 무거운 입을 열었다.''“찾으셨다 들었사옵니다.”''“그렇다. 짐이 긴히 너와 의논할 일이 있어 불렀느니라.”'' 의논이라는 황제의 말에 놀란 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황제는 윤의 의문을 잠재우려는 듯 덧붙였다.''“상왕(湘王) 역시 짐이 불렀느니라.”'' 윤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상왕 단이 윤을 마주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윤은 아우의 미소 속에 담긴 조소를 똑똑히 보았다.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의문들이 잔뜩 휘몰아쳤으나 윤은 그것을 애써 뒤로 한 채 침착하게 물었다.''“어찌하여 이 태극전이옵니까?”''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그 속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태극전은 공식적인 의례를 집전하는 곳. 그저 간단한 이야기였다면 굳이 이곳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럼에도 황제는 이곳으로 황자 둘을 불러냈다. 윤은 분명 무언의 압박을 시행하려는 황제의 내심이 무엇인지 우회하여 물어본 것이었다. '' 황제의 눈가에 미미한 떨림이 일다 순식간에 사라졌다.''“신월국(申月國)으로 떠나라.”'' 그저 간단한 한 마디. 순간 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무슨 말씀이신지…….”''“네 직접 그곳의 정세를 살피란 말이다.”'' 의혹으로 가득하던 윤의 얼굴이 경악으로 인해 급속도로 일그러졌다. 윤은 본능적으로 옆에 있는 단의 얼굴을 살폈다. 과연 단의 얼굴에는 조금 전보다 더욱 짙고 의미심장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간자(間者:첩자)가 되란 말씀이시오니까? 하오나 그런 일이라면 더욱 능숙한 자들이 많지 않사옵니까?”''“이미 결정 난 사안이다.”'' 황제는 단 한 마디로 윤의 반박을 내리 눌렀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다.''“왜 하필 소자를 보내려 하시옵니까?”'' 그리고 이미 결정 난 사항을 이곳에서, 더구나 단의 앞에서 단언하시는 이유는 무엇이옵니까?'' 윤은 진정 묻고픈 말을 결국 내뱉지 못했다. 황제는 착잡함으로 물든 윤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짐이 신월을 치기로 결정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신월을 치지 않고서는 우리 태진이 번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너도 잘 알 것이라 믿느니라.”''“소자, 그렇게 생각지 않사옵니다!”'' 말 한마디로 황제의 뜻을 일축해버린 윤의 단호한 목소리에 황제의 노한 시선이 뒤따랐지만 윤은 개의치 않았다. 윤의 흰 얼굴은 어느새 마음 속 흥분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벌겋게 물들었다.''“신월이 비록 근자 쇠락해가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전통과 힘이 남아 있는 곳이옵니다. 맹수가 힘이 약해졌다 하여 맹수가 아니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그렇다면 두 마리의 맹수가 한 자리에 공존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아시겠군요, 형님?”''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단이 마침내 기다렸다는 듯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윤은 단의 얼굴을 바라보며 격하게 터져 나오려는 다음 말을 삼켰다. ''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고 더 이상 반발해 봐야 진만 빠질 일이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윤은 침울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억지로 들고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네 아니라도 이미 많은 준비를 해 놓은 것은 사실이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황실 일족이 직접 그들을 접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명백한 축객령에 윤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문을 나서다 문득 자신의 옆에서 말없이 걷고 있는 단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길게 이어진 계단을 내려오자 윤은 굳었던 입을 다시 열었다.''“왜 이런 일을 벌이는 게냐?”''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지만 단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후리후리한 키에, 흰 피부와 푸른 눈동자. 아라족(阿羅族)의 피를 이어받은 윤의 얼굴이 단의 눈동자 속에 박혔다.''“왜 이 일의 배후에 제가 있다 생각하시는지요? 심히 궁금합니다.”''“부정하지는 않는구나.”''“이미 마음속으로 단정해 놓았다면 부정해 봐야 확신만 심어주는 일 아니겠습니까?”''“멀리 쫓아버릴 만큼 그렇게도 내가 마음에 걸리더냐?”'' 비감(悲感)으로 가득 찬 윤의 어조에 침착하던 단의 얼굴에도 분노와 비웃음이 적당히 배합된 감정의 덩어리가 서서히 떠올랐다.''“날 그렇게 비겁한 놈으로 몰지 마십시오. 내 맘만 먹었다면 형님이 지금껏 무사하리라 보십니까?”''“그만 두자.”''“왜, 불리할 것 같으니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겁니까?”'' 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같은 성정. 단은 확실히 부황의 성격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적통인 아우를 잡고 백날 말해 봐야 하소연밖에 되지 않는 법이다. 윤은 현실과 타협했다.''“고맙다. 난 네 덕에 그나마 숨을 돌리게 되었구나.”'' 윤의 말에 단의 얼굴이 급속도로 차갑게 냉각되었다. ''“내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 비단 그것만은 아닐 거요. 앞으로 조심하시오.”'' 윤이 말뜻을 미처 헤아리기도 전에 단은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져갔다.'''''' 쨍그랑. 파삭! 퍽!''“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다니, 이런 바보 같은 놈들! 중신이라는 것들도 모조리 쓸모없는 것들뿐이야.”''“쯧쯧, 무슨 일로 그리 심기가 미편하신 겁니까, 어마마마?”'' 시비들이 구석에서 와들와들 떨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단은 못마땅한 얼굴을 한 채 안으로 들어서다가 결국 바닥에 산산조각 나 흩어진 수많은 오색의 칠보 도자기와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금동 향로를 보고 말았다. 순간 단은 얼굴을 펴고 피식 웃었다.''“저것들이 얼마나 값나가는 것들인데 이리 험하게 내던지셨사옵니까?”''“네 짓이냐?”'' 씩씩거리는 모후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단은 또다시 웃었다. 같은 질문을 고대로 다시 받은 이 상황이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것인지? 소자 잘 모르겠사옵니다.”''“바로 내일이다, 내일! 내일이면 모든 근심이 다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무슨 근심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시치미 떼지 마라. 황제께서 어지(御旨)를 내리시기 전에 미리 네게 은밀히 언질 하셨을 것 아니냐? 넌 황제의 내심을 알았을 텐데 왜 미리 내게 귀띔해주지 않았냐는 말이다. 그랬다면 좀 더 일을 앞당겼을 텐데.”''“형님을 제거하려는 계획 말인가요? 물론 전 알고 있었사옵니다.”' 순순히 시인하는 단의 말에 간신히 화를 억누르던 방황후의 얼굴이 격한 분노로 물들었다.''“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 알고는 있느냐? 이는 다 널 위한 길이다!”''“허울뿐인 황자를 죽이는 일에 절 끌어들이는 일 말이시옵니까?”''“그놈은 장자다!”''“허나 이름 없는 아라족 여인 소생이지요.”'' 단은 모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일부러 또박또박 말했다. 방황후는 아들의 어조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주춤했다. 단은 그런 모후를 외면한 채 의자에서 일어서 침상 한 귀퉁이에 박혀 있는 수틀을 집어 들었다. 분명 지난 번 탁자 위에 곱게 놓여져 있던 그것은 황후의 격한 화를 입어 찌그러지고 찢어져 있었다. 분홍색의 고운 비단 바탕 위에 모란꽃을 사이에 둔 암 수 한 쌍의 새가 지저귀는 모습이 세밀하고도 생동감 있게 펼쳐진 것을 응시하던 단의 얼굴이 차츰 어두워졌다.''“형님을 미워하시는 이유가 오로지 저 때문이시옵니까?” ''“무, 무슨 소리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냐? 당연히 다른 이유는 없다!”'' 어느새 다가와 단이 든 수틀을 확 빼앗아 버리며 방황후가 싸늘하게 외쳤다. 그러나 단은 그런 방황후의 행동에도 굴하지 않고 비릿한 조소를 베어 물었다.''“그래요?”'' 묘한 어조로 단이 중얼거리자 방황후의 불같은 분노는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미묘한 말투와 절대 사람을 믿지 않고 심중을 저울질하는 저런 행동은 황제의 그것과도 같았고, 그녀는 바로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믿어 드리지요. 하지만.”'' 단이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모후의 얼굴을 응시했다.''“전 이제 어미 품속에서 젖이나 달라 징징대는 어린애가 아니옵니다. 전 맹수의 자식이지요. 맹수는 자식을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자식은 스스로 올라서야 하는 겁니다. 그런 보호, 반갑지 않사옵니다. 아시겠는지요?”''“그래서 스스로 복을 차버리는 짓을 하는 것이냐? 어찌하여 백리세가와의…….”''“그만! 그 일은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사옵니다.”'' 방황후의 말을 잘라버린 단의 전신에 얼음 같은 냉기가 퍼져 나갔다. ''“이젠 이 어미가 필요 없다는 것이겠지? 아니 그러한가?”''“어마마마 같은 사람을 더 늘리란 말씀이시온지요?”''“그런!”'' 방황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모후의 얼굴을 쳐다보는 단의 얼굴은 은연중에 살기마저 서려 차가운 가면과 같았다.''“외척의 발호는 사양이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리라 믿사옵니다. 그럼 소자 이만 물러가옵니다. 편히 쉬시오소서, 어마마마.” '' 단은 말이 끝나자마자 절도 있게 몸을 굽히고는 물러섰다. 방황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단의 서슬 시퍼런 기세에 눌려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권세와 외척의 정점에 황후가 도사리고 있는 것을 통렬히 꼬집는 단의 말에 그녀는 사라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 단은 요영전(耀霙殿)을 빠져나오자마자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가슴 속의 근심과는 상관없이 맑고 깨끗했다. 그것이 윤의 담담한 눈동자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스치자 서서히 입 꼬리가 비틀렸다.''“시간은 벌어 주었으니 당당하게 돌아오시오.”'' 단은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