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이런 게.’'섹스. 아찔한 그 단어에 대단한 무언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별 볼일 없는 게 그와의 섹스라는 사실이 허무하다. 효림은 어슴푸레한 빛에 물든 그를 바라보며 낮은 한숨을 뱉었다. 그 순간 한 방울, 두 방울. 그녀의 볼 위로 뜨거운 액체가 흘렀다.'‘땀일 거야.’'입술을 비틀어 물며 애써 부정해 보지만, 이건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남자의 눈물이 확실하다. 고집스럽게 닫혀 있는 입술만큼이나 맹렬한 투지로 불타던 맹수의 눈에서 치명적인 오류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이상한 생각하지 마. 절대 아니야. 그 여자 때문에 우는 게 아니야.’'꽁꽁 싸매 놓았던 감정의 끈이 후루룩 풀려나는 느낌이다. 비틀어 문 입술이 터져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에 감돈다. 마음 같아선 흠씬 패주고 싶지만 역시나 그녀의 손은 반대로 행동한다.'“현우 씨…….”'아기 어르듯 그를 안고 토닥이자 움직임을 멈춘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빈틈없이 몸을 겹친다. 거대한 몸 때문에 가슴이 돌덩어리에 눌린 것 같이 갑갑하다. 몸을 조금 비틀자 그가 단단한 팔로 움직이지 못하게 가두고 가늘고 여린 목에 얼굴을 묻는다.'가쁘게 고르는 숨. 그의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숨에 묻어나는 것 같아 쓰리고 아프다. 그래서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은 굴곡진 등을 쓸며 더욱더 신중하게 위로해 주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위로를.'“괜찮아요. 괜찮아…… 괜찮아.”'주문이라도 되는 듯 거칠던 숨이 서서히 차분해진다. 효림의 입가에도 비로소 미소가 그려졌다.'이 남자를 처음 본 건 2년 전 여름이었다. 까맣고 커다란 남자가 배낭 하나 달랑 짊어지고 정선의 산골을 찾아와선 대뜸 이곳에 머물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악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 겉만 봐서 어떻게 알겠는가. 효림은 어떤 끔찍한 사연을 가지고 온 사람일지 모르니 그를 받아들이는 것에 신중하자고 했다. 정말 끔찍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라면 초동 선생의 명예에 누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초동 선생은 효림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를 이곳에 머물도록 허락했다.''-주먹이 거친 남자는 둘 중 하나란다. 거친 인생을 살았거나, 고단한 삶을 살았거나.''그는 고단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 고단함이 이곳에서 치유 받도록 도와주라고 했다.''-세상 떠도는 먼지도 다 사연을 가진 법이다. 그러다 성질 누그러지면 가라앉는 날이 오지. 너무 깐깐하게 굴지 마라.''하지만 초동 선생의 당부에도 효림은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마치 기름통 짊어지고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제동장치 고장 난 낡은 기관차 같은 불안함이 싫었다. 겨우 안정을 찾은 효림에게 별로 달갑지 않은 불안함이었다. 그래서 더욱 단점만 보려 했다. 까만 피부는 까매서, 커다란 덩치는 곰 같아서, 웃음기 없는 단단한 입술은 냉정해 보여서, 표정 없는 얼굴은 감정 없는 석상처럼 그래 보여 싫었다. 그건 착한 효림이 평생에 단 한 번 가졌던 나쁜 선입견이었다.'그 선입견은 오래 기승을 부리지 못하고 누그러졌다. 사람 겪어 봐야 안다는 말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진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까만 피부는 그가 얼마나 부지런한 사람인지 이해시켰고, 커다란 덩치와 투박한 손은 그가 뭐든 거뜬히 해낼 수 있는 맥가이버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굳게 닫혀 있는 입술도 어느 순간 남자다운 과묵함으로 비쳐졌다.'효림은 마음이 가면 곰보 땜보도 곱게 보인다는 말을 서서히 실감했다. 그러다 마음과 눈이 완전히 열린 건, 가을로 향하는 길목 그쯤이었다.'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산골 마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첫째도 둘째도 젊은 남자의 힘이다.'겨울이 일찍 찾아오는 산골은 늦은 여름부터 월동 준비를 시작하는데 평지 걷기도 힘겨운 노인들이 산에 오르내리며 땔감을 해대는 일이 그리 만만치 않은 일이어서, 그때만 되면 동네 곳곳에서는 앓는 소리가 곡소리처럼 들리곤 했다.'번거롭고 귀찮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일. 울면 겨자 먹기로 겨우겨우 해 오던 일을 그가 오고 할 필요가 없어졌다.'그는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산을 오르내리며 한 집씩 장작을 패다 뒤꼍에 쌓아 놓는 일을 한 달이 넘게 반복하면서도 군소리 한번,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쌓인 장작을 보는 것이 쌀독 가득한 양식을 보는 것만큼이나 든든한 마을 어르신들은 홍길동 부럽지 않은 그의 활약을 보며 산골 마을에 더없이 귀한 보배가 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매일 밤 온몸을 파스로 도배하고 밤새 끙끙 앓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도 다음 날이면 아픈 내색 하나 없이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던 사람. 효림은 점점 그에게 빠져들었고, 산골 처녀의 짝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그렇지만 누군가를 혼자 좋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무도 몰래 좋아하다 끝내면 되지, 가볍게 생각했던 그것은 마음이 깊어질수록 지독하게 잡고 흔들어 댔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마냥 설레던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욕심이 개입되고, 짝사랑은 지독한 늪으로 변해 버렸다.'잠시 잠잠하던 그가 여린 살점을 베어 물곤 아침에 흔적이 남을 만큼 집요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뜨거운 숨결은 아리고 잘근거리는 이 사이에 씹히는 살점이 쓰리다. 기교도 감정도 없이 그저 자신의 욕구만 채우면 그만인 몸짓, 의미 없는 움직임에 불과한 그의 키스가 외사랑에 힘겨운 효림을 더욱 서럽게 만든다.'무엇을 위한 위로일까? 순진한 여자의 동정을 가지면서도 격정이 섞인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는 남자를 무슨 수로 위로를 하려 했던 것일까. 어쩌면 위로는 자신을 위한 핑계일지도 모른다. 허물어져 버린 틈을 이용해 그의 여자가 되고 싶었던, 마음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여자의 허접한 핑계일지도.'‘비참하다, 서효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