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출발해 볼까?”'배를 쑥 내민 두 여자가 올라타자 차는 기다렸다는 듯이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이제 그만 출발하자고 짐을 들고 나간 지 30분 만의 일이다. 기다리는 동안 짜증이 날 만도 할 텐데 두 여자만큼이나 운전을 하는 남자도 꽤 즐거운 듯 연방 웃음을 달고 있었다.'유리창 너머로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산등성이 위로 한 움큼씩 떠 있는 구름은 갓 뽑아낸 실처럼 그 말간 순백의 색이 투명할 정도였다. 너무 선명하게 대비되는 색을 바라보며 미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왜, 또 발로 차?”'“응, 간만에 외출을 했더니 좋은가 봐.”'“축구 선수가 나오려나 왜 그렇게 발길질이 심하다니. 우리 훈은 제 엄마 힘들까 봐 발로 차는 것도 간지러울 정도인데.”'피식하고 웃자 미순은 농담 아니라며 자신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임신 중독증 때문에 붓기가 심한 미순은 아이가 조금 작다고 했고, 부른 배만 아니면 전혀 임신을 한지 모를 정도로 마른 미라는 개월 수보다 아기가 크다고 했다. 자연분만을 할 수 없는 미순 때문에 결국 같은 날 수술을 받기로 했지만 그다지 두렵지는 않았다. 지금보다 더 지독한 악몽은 없을 테니까.'“언니, 이 아이 말이야. 그냥…….”'“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언니나 형부는 그 생각 절대 안 변해. 그러니까 네 몸이나 잘 챙겨.”'“나중에, 나중에 이 아이가 커서 날 원망하면…….”'“그런 일…… 절대 없어. 누가 안다고.”'그래, 그럴 테지. 한 생명이 자신을 통해 빛을 보게 되었다는 건 아무도 모를 테지. 다시 세상으로 나가면 언니와 함께 보낸 몇 달은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릴 테니까. 뚝 끊어진 몇 달을 잊은 채 그렇게 살아가게 되겠지.'멍청하게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워낙 불규칙한데다 몇 달씩 건너뛴 적도 있어서 임신을 했을 거라고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아무리 둔해도 그렇지 어떻게 임신한 것을 모를 수가 있어. 너 바보니? 바보야?’'봉긋한 배를 안고 언니 미순을 찾아간 그날, 미라는 수도 없이 등짝을 얻어맞았다. 퇴근하고 돌아온 형부가 두 사람을 떼어놓을 때까지 방 안엔 퍽퍽 등을 때리는 소리, 하나뿐인 동생을 제대로 살펴주지 못해 그런 거라며 가슴을 치며 자책하는 언니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자신 안에 새로운 생명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너무 늦지 않게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수도 없이 생각했었다. 그랬다면, 그랬다면.'“언니, 형부 고마워요. 평생 잊지 않고 살게.”'“아니, 잊어. 단 한 조각도 네 머릿속에 남겨두지 말고 전부, 싹 잊어.”'늘 다정한 언니지만 이런 대화만큼은 칼같이 잘랐다. 언니의 아이와 같은 날 태어난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 그녀와 전혀 무관한 존재가 되는 거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다시 고개를 돌린 미라는 무심한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을의 끝자락을 곱게 수놓고 있는 단풍과 사철 푸른 소나무가 어우러져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들이 끝도 없이 지나갔다. 언제나처럼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마치 자신이 서 있는 이 좁은 공간만 세상에서 동떨어진 것 같은 느낌, 그날 이후 일어난 많은 변화와 달리 세상은 어쩌면 무심하게도 잘도 돌아가는지 울컥 복받쳐 오르는 서러움을 꾹꾹 누르며 미라는 나직이 노래를 불렀다.'“바람이 놀러왔나 봐. 우리 아기 손을 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