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번화가인 메디슨 스퀘어광장 쪽으로 가다보면 80년 이상 된 건물들 사이로 '아니사'라는 화려한 고급레스토랑 간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 겨울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묘하게 만드는 수많은 꽃들이 풍성하게 피어있는 코너 옆으로는 이곳을 방문했던 유명 인사들의 사진이 줄지어 걸려있었고 대형 샹들리에 은은한 불빛 아래 2층 VIP룸 앞에는 ‘아니사’가 자랑하는 8등신의 웨이트리스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아니사’는 손님과 웨이트리스가 결혼을 하거나 연인이 되어 나가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며, 드나드는 수많은 부자들과 고위층사람들이 그녀들에게 주고 가는 팁과 주급은 웬만한 직장인들의 1달 보수와도 같았다. 그러므로 재색(才色)을 겸비한 많은 지원자 중에서도 몇몇 행운의 여인들만이 들어갈 수가 있었으니…… 속설로는 이곳에 들어가기가 하버드나 브라운 대학에 들어가기보다도 더 힘든 곳이라고 알려질 정도였다.''“저기 VIP룸에 너의 단골손님이 한 시간 째 계속 널 찾고 있었어.”'제시카는 길고 흰 손가락으로 2층 VIP룸 한 쪽 구석을 가리켰다.''그는 천천히 대답을 하며 홍차가 반쯤 남아있는 찻잔을 테이블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1년 동안 그녀의 단골손님이 되기까지 유난히 까탈스런 성격으로 사실 그녀에게 적지 않게 애를 먹였던 사람이다. 하얀 피부에 짙은 갈색 머리와 갈색 눈을 가지고 있는 그는 동서양의 아름다움을 가진 혼혈인 것 같아보였다. '“제가 내일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당분간 여길 못 올 것 같네요.”'고급스런 넥타이에 멋진 슈트를 입고 앉아있는 멋쟁이 손님은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무척 다정한 얼굴이었다. '“이건…… 그동안의 감사의 표시로…….”'“예……?”'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에게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네주고는 말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1990년 어느 따뜻한 봄 날.'귀여운 얼굴에 유난히 작은 체구……5살 개구쟁이 한미주. '어린 미주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빠의 얼굴도 모른 채 얼마 전 이사 온 동네 변두리 세탁소에서 수선 일을 하는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미주는 아주 독특한 계집아이였다. '또래 여자애들과는 놀지를 않고 늘 사내아이들과만 부산스럽게 뛰어 놀았다. ''어두워진 대문 앞에서 벌써 해가졌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딸을 걱정스레 기다리고 있던 엄마는 울면서 달려오는 딸을 보자 가슴이 철렁 했다. 개구쟁이 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언제나 말썽을 부리기 때문이었다.'“왜 그래? 미주야?”'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 자신을 찾으며 울며불며 달려오자 엄마는 두 눈이 동그래졌다.'“무슨 일이야?”'엄마는 딸에게로 단숨에 달려가 안겼다.''그리고 한 달 뒤…… 두 모녀는 미국행 비행기 안에 있었다.''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는 며칠 동안 사탕은커녕 풍선 껌 하나도 못 씹어봤다. 날마다 이 시간이면 엄마 몰래 문방구에 들러 그렇게도 먹지 말라 던 맛있는 불량 식품들을 사 먹곤 했었는데…… 가끔씩 덤으로 알사탕도 주는 동네 ‘수정문방구’ 주인아줌마도 보고 싶어지고, 코흘리개 영식이…… 찌질이 대식이…… 바보 용이 모두 다 보고 싶어졌다. 그 중에서도 매일같이 신기한 물건들을 가지고 놀러 나오는 단짝 환희…… 울보 환희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에잇!”'탁.'미주는 이내 시무룩한 얼굴이 되더니 애꿎은 바닥의 돌만 냅다 찼다. ''하얀 레이스 커튼 사이로 강렬한 오후햇살이 들어오자 잠에 푹 빠져 있던 안드레는 눈을 떴다. 그는 피곤함에 충혈 된 눈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풍성한 흰색 셔츠의 열려진 단추를 하나 둘 채우며 창문으로 다가가 창문을 열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남자는 여인을 힐끔 쳐다보더니 낡은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로 걸어왔다. 그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무릎 위에 얹고 있던 비단 보따리를 테이블 위에다 올려놓았다.'탁.'“제 이름은 그레이스한. 에릭밀리건조를 찾아주세요.”'남자는 동양여인이 내미는 보따리를 풀어 보았다. 보자기 안에는 오랜 시간을 말해주 듯 색이 바란 육각형 모양의 보석함이 들어있었고 보석함을 열자 백 달러짜리 미화(美貨)가 수북이 들어 있었다. ''“혹시……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잘못되거든…….”'“무슨 일이 있어도 에릭밀리건조 라는 사람을 꼭 찾아야 한다. 알겠지?'“에릭밀리건조……?”'“응.”'“그 사람이 누군데?”''수석매니저가 퇴근하기까지 아직 5분이 더 남았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조금 전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손님이 주고 간 봉투 생각이 났다.'미주는 치마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더니 하얀 봉투를 꺼내 천천히 열어보았다. 봉투 속에는 놀랍게도 8000$이나 하는 'Freedom of the Seas'호 크루즈 티켓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크루즈티켓을 든 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온 몸이 얼어버렸다.''그는 재빨리 그녀의 가방을 자신의 목에다 걸더니 발그레해진 얼굴로 자신을 보며 배시시 웃고 있는 그녀를 들쳐 업었다.'“야? 이환? 지금 뭐하는 거야?”'술 취한 여자를 등에 업은 채 앞만 보며 저 만치로 걸어가고 있는 이환에게 장 감독은 소리를 질렀다.'“저 오늘 촬영 못합니다.”''“만일 크루즈에 그 아이가 타지 않거나, 8일간의 크루즈 여행에서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체이스에게 이 열쇠를 전해 주게. 아들에게 남기는 못난 애비의 마지막 유언장이 들어있는 금고열쇠라고 말일세.” '“알겠습니다.”'그는 부사장에게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아…… 참! 그리고…… 그 그림말일세. 그 날…… 크루즈에 잊지 말고 꼭 싣게나.”'“염려 마십시오. 사장님.”''“아버지가 사업을 하답시고 한국이란 나라에 가서 15년이란 세월동안 가족은 나 몰라라 하지만 않았어도 우리 엄마는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시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단 시간에 그렇게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외할머니와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라구요.” '체이스는 아버지 생각에 또 다시 화가 나는지 소리를 높였다.'노부인은 화가 난 외손자의 말에 당황이 되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그동안 파티만 열고 살던 네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얼마 전 나를 찾아왔더구나.”''환희의 전화가 울렸다.'“네. 이환입니다.”'-도련님께서 어제 오후에 부탁하신 에릭밀리건조 라는 사람을 찾았습니다.'“한미주? 드디어 네가 찾고자 하던 그 에릭밀리건조라는 사람을 찾았다.”''이번 크루즈의 일정은 12월 19일인 오늘 미국의 ‘마이애미 항’을 출발해 크리스마스인 내일은 ‘뉴욕 항’에, 그리고 7박 8일 아름다운 서부 ‘카리브 해’를 모두 운항한 마지막 날은 영국 남부인 ‘아우스 햄튼 항’으로 입항 할 예정이다.''선실 앞에는 유람선을 타기 전 미주의 뒤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던 바로 그 중년신사가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누구세요?”'“체이스?”'문이 열리자 그는 얼굴이 환해지며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갔다.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이 심하게 울렁거리던 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잠잠해졌다. 그러자 고개를 들던 미주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한참을 모르는 남자의 품에 안겨있었다는 사실이 인지되면서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그녀는 그의 품에서 얼른 나왔다.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7년 전 경매를 통해 36.290$(42억)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사서는 꿈에 부풀어 그녀가 있을 것 같은 한국으로 갔다.''아름답고 고요한 ‘카리브 해’에는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바다 위 뽀얀 물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마치 거대한 한 마리 고래와 같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보트 하나가 유람선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186센티미터의 키에 모델인 듯 호리호리한 체격 거기다 최신 유행의 짧고 세련된 새까만 머리. 입고 있던 목욕가운을 벗으며 옷걸이에 걸어 놨던 자신의 새 의상으로 갈아입는 그의 모습은 마치 화보촬영을 하고 있는 것 같았고 몸에 딱 끼는 조끼위로 연한 갈색정장을 걸친 그의 모습은 순정만화책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남자주인공 같았다.''그녀는 이상하게도 갑자기 줄이 끊어져버린 십자가 목걸이를 주워들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이거 뭔가 불길한 징조 아냐?’''“십 칠년을 지켜온 우리의 사랑이야.”'“그 사랑 네가 먼저 깨버렸어. 잊었어?”''“이왕 이렇게 된 것 그냥 미주 씨랑 사귀지 그래.”'“뭐? 무슨 소리야?”'“그럼 너는? 너는 어떤데?”''그녀는 드디어 환희에게 했었던 3시간짜리 하소연을 시작하며 울기 시작했다. '‘그레이스 한?’'체이스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에릭밀리건조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네? 이 목걸이는 싸구려가 아닌데요?”'“네? 무슨…… 말씀이신지?”'“이건 값이 400.000$ 이나 하는 하나 밖에 없는 귀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안드레? 저 사람이 안드레 오빠라고? 안드레 오빠가 어떻게 이 크루즈에 타고 있는 거지?’'그녀는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미주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선실로 들어갔다. 안드레가 자신을 데리러 온다는 말에 심장이 벌렁거려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 한미주…… 휴…….”'그녀는 가슴에 손을 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아저씨? 뭐하고 계셨어요? 그건……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잖아요?”'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미주의 얼굴을 한 동안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한 평생 찾아 헤매던 어떤 그리운 여인이 자꾸만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 그림 가질래요?”'“네?”''“그리고…… 이 분의 선실에는 아버지가 오랜 시간 간직해 오던 사진 속 그 해바라기 목걸이도 있었어요.”'“해바라기 목걸이……?”'“네.”'“너는 그것을 어떻게……?”''크루즈의 도착을 보기 위해 갑판 위에 나와 있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두 남녀가 보였다. 그들은 미주와 체이스…… 두 사람은 아직 아무런 혈육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모르던 남이였을 때보다 오히려 더 불편한 사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병원에서 자주 만나며 시간을 보내던 배스는 어느 날 자신의 첫사랑이던 미주에게 용기를 내어 프로포즈를 했다. ''“쫄따구?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퇴원 소속을 밟고 있던 그녀는 병원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환희를 보자 한 걸음에 달려가 얼싸 안았다. ''미주와 헤어진 체이스는 에릭밀리건의 회사로 가 아버지의 유언대로 스미스 부사장에게 열쇠를 건네받아 금고를 열어 유언장을 읽었다. 유언장에는 미주의 존재를 몰랐던 그가 아들인 체이스에게 모든 재산을 상속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그런데 미주야? 저 그림 진짜일까?”'갑자기 환희가 그녀를 안은 채 벽에 걸려있는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가리켰다.'“설마! 진짜겠어? 진짜면 돈이 얼만데…… 그런데…… 진짜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