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후는 갑작스레 둘만 남게 된 게 뻔히 준비된 두 분 어르신의 계획이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할 말을 잊었다. 어떻게든 점심만 먹고 자리를 뜰 참이었는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그렇다고 손님만 남겨 두고 자리를 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떡한다. 어떡하지?’'그러나 걱정스러운 마음 한편에는 왠지 모를 기대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기대감인지 알 수 없지만 자꾸만 그 마음이 커져 가고 있었다.'“전 괜찮으니까 바쁘신 일 있으시면 볼일 보세요.”'유정의 말에 진후는 그제야 내내 외면했던 유정을 바라봤다.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는 유정이었지만 되레 진후는 그 말에 그간 쌓은 미안함이 더욱 커져 버렸다. 딱히 자신이 이리 대해도 좋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옹졸한 마음으로 인해 그녀에게 자꾸만 상처를 주는 것만 같아 진후는 그저 미안했다. '“바쁜 일 없습니다.”'“그럼 우리 뭐하죠?”'유정은 말을 하고 보니 ‘우리’라는 말이 그들 사이에 과연 어울리는 단어였나 싶어 잠시 멈칫했다. 혹여 그 말로 인해 상대가 더 불편해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진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요. 제가 재밌는 사람이 못돼서…….”'늘 사는 게 바빠서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상대를 편하게 하는 화술이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그런 그도 한때는 사랑하는 이에게만은 그 누구보다 달콤한 사람이고 싶었지만 말이다. 그조차도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그는 공정하고 좋은 상사일 뿐 재미난 사람은 아니었다. 간혹 오랫동안 함께 일한 부하직원들조차 그를 여전히 대하기 어렵다 말하기도 했으니 상당히 재미없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법은 잊은 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요. 저도 재미없는 사람이거든요.”'그러나 아마도 유정의 그 말은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한 거짓말일 것이다. 많은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유정은 참 재밌는 사람처럼 보였다. 보기만 해도 행복함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해 줄 것만 같았다.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겁이 났다. 자신으로 인해 그 행복이 사라질까 봐.'“괜찮으면 잠깐 정원에 나갔다 와도 될까요? 여긴 벌써 봄이 왔나 봐요. 볕이 참 좋아요.”'유정의 말에 창을 바라보던 진후는 창 가득 들어오는 햇볕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느새 봄이 찾아와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것만 같은 나무들이 그제야 그의 눈에 들어왔다. 왜 그는 이제껏 몰랐던 걸까? 날마다 지나는 나무들 사이에 꽃망울이 맺혀 있음을 왜 알지 못했던 걸까? 아니, 왜 그의 눈에 오늘 꽃이 들어온 걸까? 내내 그에게는 그저 앙상한 나무로만 보였는데 말이다.'모르겠다. 유정을 만난 이후로 언제나 흑백이던 그의 세상에 자꾸만 색이 덧칠되고 있었다. 그저 까맣던 나무가 어느새 연둣빛 잎으로 물들고 있었고 언제나 어둡던 세상이 어느새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진후는 그런 변화가 두려웠다. 자꾸만 자신이 머무는 이 세계가 변하는 게 두려웠다.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던 그에게 유정은 두려운 존재였다. 자신을 변하게 만들고 자신의 마음속 깊이 잠가 버렸던 마음을 두드리는 유정이 그저 겁이 났다. '진후가 머뭇거리는 사이 유정은 어느새 바깥으로 나갔던 모양이다. 창을 통해 햇볕을 쬐는 유정의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유정은 길 가운데 놓인 돌 위를 콩콩 모둠발로 뛰고 있었다. 노란색의 옷을 입은 유정의 모습이 마치 작은 병아리처럼 귀여워 보였다. '“쿡. 쿡.”'진후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너무도 놀랐다. 이렇게 웃어 본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이렇게 웃어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유리를 떠나보내고 자신은 웃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한 죄를 가진 자신은 웃을 자격조차 없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벌했다. 그런 시간이 그에게는 당연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모르게 자신이 그동안 뭔가를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왜 그렇게 스스로를 벌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유리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지 않았을 텐데, 언제나 자신이 웃는 모습이 제일 좋다던 유리였는데 왜 그리도 웃음에 인색했던가. '유정으로 인해 진후는 잊고 있던 오래전 기억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런데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아팠던 기억들이 오늘은 그저 아름다운 기억들도 그의 가슴속을 채우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탓일까? 아니면 창밖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유정 때문일까. 모르겠다. 그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유정은 언제나 이 돌 위를 걸을 때면 해 보고 싶었던 모둠발 뛰기를 시작했다. 역시나 생각대로 너무도 재밌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뒤로 큰 창이 있음이 떠올랐다. 아이처럼 콩콩 뛰는 모습을 진후가 다 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대체 뭐라고 생각했겠어? 아마도 어리다고 생각했겠지? 아, 창피해.’'유정은 한참을 망설이다 살짝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그는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그를 보니 아이처럼 콩콩 거렸던 모습이 부끄럽지 않았다. 웃을 때의 그는 너무도 달랐다. 햇살처럼 해사한 그의 웃음이 유정의 가슴에 또다시 돌을 던지고 있었다. 해사한 그의 웃음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이 좋았다. 더불어 그의 웃음이 언제나 자신을 향했으면 좋겠다는 욕심마저 생겼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고작 두 번 본 게 전부인 남자. 고작해야 두어 시간을 함께한 남자인데 고작 그 짧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왜 자꾸 이렇게 마음이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자신이 왜 이리도 그에게만은 쉽게 마음이 열리는지. '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서둘러 손을 내렸다. 그리고 부끄러운 마음에 후다닥 그가 볼 수 없는 곳으로 달려갔다. 모르겠다. 왜 그렇게 도망치듯 자리를 옮겨 버린 것인지. 아마도 이런 자신의 마음을 그가 알게 될까 봐 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자신의 마음을 안다면 부담스러워할 게 뻔했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게 분명한 사람. '그의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왜 그 순간 떠오른 건지 모르겠다. 밥을 먹는 사이에도 몇 번이고 남자의 시선은 그 반지에 머물렀고 또 몇 번이고 남자의 손가락은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애틋한 손길이 떠오르자 유정은 이내 우울해졌다. 하필 처음으로 누군가를 담았는데 그 상대는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고 있다니. '조금 억울했다. 처음인데 누군가를 처음으로 마음에 담았는데 왜 하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버린 일이었다. 그저 순간 그가 자신의 가슴으로 들어와 버렸다. 이제와 그를 가슴에서 멀어내 보려 해도 그게 쉽지 않음을 유정은 알 수 있었다. 그의 웃음을 본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뛰는 데 어떻게 그를 잊을 수 있을까.'그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노력하면 그와 시간이 쌓이면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자꾸 그런 욕심이 생겨났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시간이 쌓인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유정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모르겠다. 자꾸만 부질없는 욕심이 생기고 있었다. '하아.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한숨 쉬는 건 나쁜 버릇이에요.”'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유정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돌아보니 어느새 진후가 자신의 곁에 서 있었다. 언제 온 건지 알 수 없지만 유정의 가슴은 이내 따뜻해졌다. 눈빛 한 번 제대로 주지 않던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신이 보이지 않으니 찾으러 나와 준 사람이었다. 차가운 척 냉랭하게 굴던 사람이지만 그 마음까지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 주는 것 같아 자꾸만 마음이 간질거렸다. '진후는 유정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렇게 끝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낯선 이에게 웃음을 보여 준 것만으로도 옳지 않은 일이라 그렇게 생각하고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그의 머리뿐인 모양이다. 그의 몸은 자신도 모르는 새 어느새 신발을 신고 그녀를 찾아 나서고 있었다. '유실수를 좋아하는 아버님은 마당 이곳저곳에 유실수를 심어 놓으셨다. 그녀가 서 있는 건 사과나무 아래였다. 가을이면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 향에 입에 침이 고이곤 했었다. 그런데 고작 푸른 잎이 돋아나는 지금 그의 입안에 상큼한 사과 향이 가득 고인 것만 같았다.'사과나무 아래 선 유정의 볼이 마치 익어가는 사과처럼 붉었다. 봄이 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바람이 찼던 모양이다. 더 있다가는 감기가 걸릴지도 몰라. 단지 그 때문이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려고 가는 것뿐이야.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그게 아님을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곁에 다가가고 싶어 핑계를 찾고 있음을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들어가요. 아직 바람이 차요.”'유정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반짝이는 그 눈망울이 너무도 고와서인지 그의 가슴이 간질거렸다. 자꾸만 눈이 가는 사람. 자꾸만 마음이 가는 사람. 그런 사람을 진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 앞장섰다. 자신의 발자국 소리 뒤로 가벼운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피아노 건반을 건드리듯 가벼운 그 통통거림이 그의 마음에도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