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일을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천 번을 함께 밥을 먹고, 백여 편의 영화를 함께 보고, 이백 번을 함께 자는 동안 사랑이라 불렀던 감정들이 점점 무뎌지고 있는 슬픈 현실 앞에서, 우리는 마주하게 된다.''이별 장면에선 항상 비가 오지, 열대우림 기후 속에 살고 있나? 재치 어린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사랑은 축복을 받은 듯 눈부시게 맑고 청명한 날에 해야 하고, 이별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거나 하다못해 우중충한 안개라도 잔뜩 낀 날에 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헤어지자고 말을 하는 사람도, 또 이별의 말을 듣는 사람도 이별의 감정이 고스란히 배인 얼굴을 상대방에게 보이는 것이 고역일 테니까. 비가 온다면, 속이 쓰린 쪽에서는 뿌옇게 흐린 날씨를 핑계 삼아 눈가에 고인 눈물을 숨기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고, 속이 시원한 쪽에서는 우산을 이용해 표정을 숨기는 것이 쉬울 테니까.'나는 지금 이별을 하고 있다. 비는 오지 않는다. 분위기 있는 카페도 아니고, 빗방울이 고여 뚝뚝 떨어지는 운치 있는 버스 정류장도 아니다. 당장 뛰어 들어가 대성통곡을 하거나 혹은 다른 남자의 전화번호를 찾아 애교 띤 목소리로 자유의 몸임을 알리는 여우 짓을 할 수 있는 집 앞도 아니다. 햇살이 가장 많이 내리쬐는 회사의 옥상, 간혹 불어오는 바람, 나른한 점심시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나의 연인, 아니, 연인이었던 남자.'“결국 이렇게 결론이 나버렸네.”'감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 그렇다고 이 남자가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는다.'우리는 삼 년을 만났고, 마음껏 사랑하면서도 싸우고 화내고 울고 투정했던 평범한 연인이었다. 화가 나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서글플 때는 어떻게 눈물을 참는지 알 만큼 오래되었다면 오래된 만남이었다. 지금 녀석의 마음은 ‘모르겠다.’이다.'“너의 결론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틀렸니?”'봄의 햇살치고는 옥상이 달구어질 만큼 뜨거웠다. 그에 보상하듯 한줄기 바람이 불어 눈부시게 새하얀 녀석의 와이셔츠가 탄탄한 가슴으로 달라붙어 휘날렸다. 재킷은 입지 않은 채였고, 팔 부분은 팔꿈치까지 접어 올려 언젠가 함께 가서 고른 고급 손목시계가 드러나 보였다. 상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지후에게, 내가 ‘남자는 시계만큼은 좋은 걸 차야 해.’라고 억지로 주장했던 바로 그것이었다.'찾아보면, 그의 모습에서 나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산뜻하고 깔끔한 헤어스타일도 이발소로 달려갈 지후를 자신이 미용실로 이끌었던 것이고, 어쩌면 와이셔츠는 언젠가 자신이 지후의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다 태워먹어 몰래 새로 사다 놓은 그것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이 함께한 우리 두 사람의 시간을 증명해 주는 것들이다.'“아니라고는 대답할 수 없지?”'자포자기한 지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그렇다고 원한다고도 대답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