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백조은 환자분은 더 이상…….”'조은은 의사의 말을 끝까지 다 듣지 못했다.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울어대는 엄마 때문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단장님 때문에 도대체 의사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그래도 일상생활에는 아무 지장 없을 겁니다. 가벼운 조깅이나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의 운동은 얼마든지 가능해요. 그러니 너무 상심 마시고 내일부터는 통원치료를 하시면서 물리치료를…….” '고장이 난 게 이 빌어먹을 발목이 아니라 혹시 귀가 아닐까 의심이 됐다. 두 조각, 세 조각으로 갈라진 의사의 말이 이명처럼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다행입니다. 영원히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큭큭, 킥킥킥.”'세뇌라도 시키려는 듯 끊임없이 다행이라 말하는 의사를 향해 조은은 끅끅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래, 다행이지. 평생 휠체어에 앉아 살지도 모를 처지였는데 이렇게 내 발로 걸어 병원 문을 나설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이야. 열심히 통원치료를 받으면 뛰어다닐 정도까지 될 거라는데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 있어?'양말 신고 구두 신었던 시간보다 더 긴 시간 내 발에 신겨 있던 토슈즈를 다신 신을 수 없게 된 것 쯤 무슨 상관이야? 20년을 해온 발레를 이젠 못하게 되었다는데 그게 뭐 어때?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무대 위에서 춤추는 것밖에 없던 내가, 할 줄 아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는데. 그게 얼마나…… 다행한 일이야.'4개월 만에 환자복을 벗고 제 옷을 입던 조은은 조금 넉넉하기까지 했던 스키니 진이 작아져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병원에 갇혀 먹고 자고 했으니 살이 안 찌려야 안 찔 수 없었을 것이다.'“다이어트부터 해야…….”'억지로 바지를 끌어올리며 혼잣말을 하다, 이내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이제 그 지긋지긋한 다이어트 따윌 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지금도 일반 여성들의 체형보다는 훨씬 낭창낭창 가녀리기만 한 그녀였지만 예전에는 이보다 2인치는 더 말랐었다. 살이 쪘단 사실에 걱정이 되던 것도 잠시,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든 오늘의 현실이 그녀의 몸을 얼어붙게 했다. 이젠 얼마든지 살이 쪄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얼마든지. '병원 문을 나서니 정신을 아찔하게 할 정도로 달콤한 아카시아 향이 조은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높고 높은 푸른 하늘, 토끼 구름, 아기 구름. 꽃도 피고 새도 우는 최고로 좋은 날씨다, 오늘은.'열 남자 다 넘어가고 말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조은은 그렇게 다시 세상으로 발을 내디뎠다. 사뿐사뿐 몸에 익은 나비 같은 걸음들이 그녀의 뒤를 따르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정작 그녀는 조금도 슬픈 티를 내지 않았다. 살짝 눈을 감고 턱을 45도 정도만 들어 올린 채 살갗에 와 닿는 달달한 아카시아 향기를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만 반복할 뿐. 마치 물 위를 미끄러져가는 나뭇잎같이 부드럽고 유연한 그녀의 걸음걸음은 절대 흐트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