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시간이라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호텔 커피숍 안에 자리를 잡은 서 사장의 앞에 수연은 손을 모으고 앉았다.'싸늘한 말이 시아버지의 입에서 내뱉듯 나왔다.'“서운하드냐?”'수연은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저녁 시간 내내 맺혔던 울분 때문인지 곧 솔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네.”'이제 막 대학에 입학했고, 앞에 앉은 분의 장남과 결혼한 지 고작 5개월에 접어든 신혼의 수연이다.'긴 머리를 등 뒤로 늘어뜨린 청순한 모습에 청바지와 새하얀 폴로 티셔츠의 가벼운 차림은 신입생의 풋풋함을 나타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호텔을 오가는 사람들의 잘 차려입은 모습에서는 이질감이 있어 보였다.'서필규 사장은 웨이터가 가져온 물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는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았다.'마치 가격을 매기는 것처럼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수연은 피하지 않았다. 무관심한 타인에게나 어울릴 법한 서늘한 시선을 애써 태연한 척 받았다.'“아버님, 죄송하지만 아까 제게 왜 그러셨는지 여쭈어도 될까요?”'수연은 겉으로 보기에는 의연했다. 하지만 무릎에 올려놓은 손은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쉴 새 없이 옷자락을 쥐어뜯으며 움직였다.'“듣고 싶니?”'“예.”'서필규 사장은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주문을 위해 수연에게 의향을 묻듯 몇 겹으로 늘어진 턱을 까딱였다.'“전 차가운 오렌지주스로 주세요.”'“난 아이스커피로.”'주문을 마치고 차를 가져왔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서 사장의 입이 열리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웨이터가 가져온 아이스커피 잔이 바닥을 보이고서야 서 사장은 뜸을 들였던 것을 만회하는 듯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아버지 연락은 받았니?”'“예.”'뜬금없이 논점이 바뀌어 버렸다. 미국으로 치료차 떠난 아버지에 대한 안부였다. 서필규와 부친은 어릴 적 친구였기에 그녀는 안부를 챙기는 것이라 생각하며 무심코 대답을 했다. '“많이 좋아졌다지?”'“……예.”'처음에 선뜻 나온 것과 달리 이번엔 느낌이 이상해 수연이 느릿하게 대답했다.'자신에 대한 얘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마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사람처럼 서 사장은 병환 중인 부친 윤 교장을 들먹거렸다.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수연은 참고 기다렸다.'“내 아들 종훈이와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 생각이다. 너에게도 이혼보다는 혼인무효 소송이 더 나을 테지? 아직 창창한 나이니까.”'“네에?”'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말하고 있다. 혼인 무효라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직 혼인신고도 못한 그녀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이었다.'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서 사장을 수연은 믿고 의지했었다.'암에 걸린 아버지를 미국의 저명한 암센터까지 보내주셨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부친의 마음걱정을 덜어주고자, 수연을 자신의 자식과 맺어주자며 혼인까지 제안한 고마운 분이었다. 자청해서 찾아와 부친에게 당신 딸을 달라던 그런 분이 서 사장이다. '내 아들의 며느리로 삼겠다, 잘해주겠다 호언했던 분이 마치 그런 적이 없던 양 시치미를 떼고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하고 있었다.'서 사장의 얼굴을 올려보며 수연은 무릎에 올려놓았던 손으로 청바지를 힘껏 쥐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말해 서 사장의 말은 어폐가 있었다.'“저희는 아직…….”'결혼신고도 아직 하지 않은 부부라는 말을 그녀가 채 입에 담기도 전에 서 사장은 단호히 잘라 말했다.'“아니, 했다. 후회할 줄 알았다면 성급한 결정을 하지 않았겠지만, 너희가 결혼을 한 직후, 양가에서 합의하여 미리 혼인신고를 마쳤다. 이런 상황을 예측했다면 일을 번거롭게 만들지 않았겠지만, 어쩌겠냐? 우리 인연이 이것 밖에는 안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날 이해해다오.”'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쓴웃음만 짓고 있는 서 사장의 모습에서 수연은 자신을 내치려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그런데 왜……, 아!”'순간 식사를 하던 내내 남편인 종훈만 바라보던 은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비굴할 정도로 그녀의 비위를 맞추던 시아버지의 얼굴까지 모두 떠올라 버렸다.'미워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을 할 정도로 서 사장이 그녀를 하찮게 취급한 이유인 모양이다.'“그 사람도 아나요?”'수연의 시선은 정확하게 서 사장을 응시했고, 놀란 듯 조금은 격앙되었던 말투도 이제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뭘, 혼인신고 말이냐?”'“예.”'“그래.”'남편의 동의를 받았다는 말에 수연은 입술을 물었다.'그녀만 빼고 모두 한통속이 되어 속인 것에 화가 치민다기보다는 갑자기 시댁에서 내쳐져야 할 자신이 서러웠다.'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수가 없었다. 겨우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아니더라도 이제는 남편인 종훈과 사랑으로 맺어진 마당에, 스스로 자처해 후회할 짓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