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기다렸다.”'재판은 담담히 말하며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쥐고 있던 책을 소파에 툭 던졌다. 너무도 태연한 그의 모습에 지연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유진 씨와 함께 인천에 있어야 할 사람이 이곳에 있다니. 눈앞에 보이는데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재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식장 앞에서 헤어질 때 그 모습 그대로……. 아무래도 그곳에서 곧장 그녀의 아파트로 온 모양이었다. 지연은 혼란한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여긴 어떻게, 인천은? 유진 씨는?”'“네가 굳이 알아야 할 이유가 있나?”'재판은 메마르게 되물었다. 어딘지 차가움이 느껴지는 그 어조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말을 왜 그렇게……. 휴.”'오늘 같은 날 이렇듯 불쑥 그녀를 찾아온 데에는 무슨 중요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신혼여행도 안 가고 여기 이러고 있어?”'“글쎄, 무슨 일일까?”'재판은 대답 대신 오히려 나직이 되물었다. 마치 장난 같은 그의 태도에 지연은 일순 마음이 상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여전히 어깨에 걸려 있던 핸드백을 풀어 소파에 떨어트렸다.'“선배, 나 피곤해. 장난이라면 다음에 해.”'“장난이라.”'재판은 음미하듯 천천히 그 말을 되새겼다. 그러더니 돌연 표정을 굳히고 싸늘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다그치듯 물었다. '“내가 장난이나 치자고 지금 여기 이러고 있는 것 같아? 단순히 장난이나 치자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재판은 성큼 거리를 좁혔다.'“내가 아니라 너겠지.”'그의 입술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장난치고 있는 사람은!”'순간, 지연은 등골이 서늘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지연의 퇴보를 막으려는 듯 재판은 그녀의 귀밑 머리카락 아래로 오른손을 찔러 넣어 뒷목을 휘감았다.'“연애 놀음, 연애 장난. 그건 네가 했던 거잖아.”'재판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엄지로 볼을 쓸었다.'“아니야?”'“서, 선배…….”'지연은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