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바다, 수평선 언저리에서 낡은 고깃배 한 척이 느릿하게 지나친다. 서이말로 갯바위 낚시를 즐기던 바다 낚시꾼들을 가득 태우고 돌아오는 길일 것이다. 겨울, 바다 깊숙한 바닥에 엎드려 있는 감성돔을 깨우는 손맛을 만끽하고 있을 바다 낚시꾼들. 육지에서 바다로 길게 뻗은 방파제 위의 새빨간 등대를 향하고 있던 고운의 시선이 배를 따라 포구 쪽으로 향했다.'어느새 고운의 등 뒤로 해변과 마주한 낡은 건물들 유리창에 불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장승포에서도 하나 남은 양복점, 기사 식당, 반대편에 생긴 24시간 편의점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에도 기죽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오래된 슈퍼마켓, 1㎞쯤 떨어진―그녀의 모교이기도 한―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서서 떡볶이를 먹고 있는 후진 분식집, 튀긴 도넛을 좌판에 옮겨놓고 있는 기름 낀 유리창의 빵집이 이가 맞지 않은 듯이 불규칙하게 길을 채우고 있었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바싹 마른 고운을 집어삼킬 듯 매서웠다. 고운은 코트 깃을 여미며, 한때는 바다였던 매립지의 부서진 보도블록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추위에 새하얗게 질린 손을 빛바랜 갈색 코트의 주머니에 감추던 고운의 손끝에 동그랗고, 조그맣고, 딱딱한 물건이 닿았다. 꺼내보니 리본 모양으로 포장된 알사탕이다. 포장껍질을 벗겨 입 안에 넣어 한번 굴리니 그 달달한 느낌에 싸늘한 날씨만큼이나 굳어 있던 고운의 얼굴이 홍조가 생길 만큼 따듯하고 부드러워진다.'칠흑같이 어두웠던 해안도로를 휘돌아 달리던 어젯밤만 하더라도,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해 바람결에 날려 버려야 했던 그녀가 겨우 땅콩이 알알이 박힌 작은 사탕 하나에 미소 지을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다른 곳도 아닌 바다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웃을 수 있을 거라 믿었기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느닷없이 귀향을 감행하지 않았던가.'서울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네 시간을 달려오면서 이곳에 오면, 태어나 열아홉 해 동안 그녀의 요람이 되어주었던 그 바다를 앞에 두면 가슴을 꾹꾹 누르는 이 고통 속에서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고 바다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고운의 발걸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망설이던 첫걸음이 무색해질 만큼, 그녀의 앞으로 낡고 투박한 건물의 간판들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결국 원하던 것을 찾지 못한 고운은 지나가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저, 여기 병원은 어디 있나요?”'“병원이야, 저 핵교 뒤에 대일병원이 있지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