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 봐, 지금 제일 원하는 게 뭔지?”'“불…… 담배가 탈 수 있게 불을 좀 붙여 줘요.”'거친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은호의 음성은 사막의 식물처럼 메말라 있었다. ‘찰칵’ 하는 금속 소리와 함께 날씬한 주홍 불빛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또 원하는 게 뭐야?”'“물……목이 말라요.”'두꺼운 카펫 덕분에 아찔한 힐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언뜻언뜻 스치는 옷깃 소리와 냉장고 여닫는 소리로 제니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제니는 고맙게도 긴 머그컵에 가는 스트로우를 꽂아서 입술에 넣어 주기까지 했다. 식도를 타도 넘어오는 냉수에 머리가 망치로 두들겨 맞은 거처럼 지끈거렸다. '“또…… 말해 봐 원하는 걸.”'“……그냥 혼자 있고 싶어요.”'“지은호, 네가 진짜 원하는 걸 말해 봐.”'“…….” '“이런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잖아. 네가 바라던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이태성을 도발한 거잖아, 안 그래?”'풋, 은호의 입에서 한숨처럼 한 가닥의 웃음이 떨어졌다. 어지럽던 머릿속의 생각들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정리되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다. '“네가 덮고 있는 이불 속을 들춰 봐.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가르쳐 줄 거야.”'“…….”'“그 불편한 진실은 저 구석에서 자고 있던 네 이성을 깨워 주겠지.”'“하고 싶은 말씀이 뭐예요?”'“분노를 머금은 증오는 이성을 잃게 하지…… 이성을 잃은 사람은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없어. 종국에 가선 목줄을 내놔야 할 경우도 생기지.”'“지금 내 모습이 이성을 잃은 인간처럼 보인다는 건가요? 이태성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미련해 보이겠죠. 다른 사람들 눈엔…….”'“아니, 머릿속은 증오로 가득 차 있으면서 온전히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네 모습이 미련스러워 보일 뿐이야.”'은호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제니의 표정을 찾으려 애썼다. 담담하게 뱉어 내는 제니의 단어 하나하나가 심장을 옥죄어왔다. 입술 끝에 힘겹게 매달려 있던 담배에서 회색재가 떨어졌다. 버석하게 마른 재가 하얀 시트에 닿는 소리가 거대한 파도 소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또다시 옷깃을 스치며 뿌연 실루엣이 움직거렸다. 샤락거리는 소리가 희미해질 쯤 금속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천장에 매달린 레일을 따라 커튼이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검은 물감이 걷히고 푸른 기운이 방 안을 휘감았다. 은호는 푸른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리도록 차가운 새벽빛이다. 장막처럼 처진 커튼이 사라진 거대한 창은 온전히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하늘이 온통 푸른 비닐에 덮인 것처럼 숨 막혀 보였다. 손가락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타고 있는 하얀 막대기를 푸른 비닐에 대어 보았다. 타는 냄새도, 지직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뜨거운 불로도 뚫을 수 없는 단단한 비닐이었다. 은호는 가만히 덮고 있던 담요를 들어 보았다. 푸른 세상과 달리 여전히 어두운 그곳에선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지난밤의 더럽고 추악한 냄새다. 자신 몸뚱이 위에서 헉헉거리던 이태성의 모습이 떠오르자 욕지기가 밀려 올라왔다. 그가 자신 속에 쏟아 놓은 비릿한 액체들이 뱃속에서 요동치는 것 같아 얼른 담배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갑작스레 너무 많은 양의 연기를 마신 탓인지 잔기침이 치고 나왔다. 새우처럼 순식간에 몸이 오그라들었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순간에도 사지의 근육이 아우성을 쳐댔다.'“하지만 너무 이성적인 것도 곤란해. 셰익스피어에게 버림받은 햄릿처럼 될 수도 있으니까.”'“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적절하게 줄타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아니, 줄타기를 할 필요는 없어. 분노, 증오에 비장함이라는 감정만 덧붙여. 그럼 제법 해 볼만 한 싸움이 될 거야.”'“당신…… 나한테 왜 이러는 거죠? 당신도 이태성에게…….”'“아니, 난 단지……거대한 산이 무너지는 걸 눈앞에서 구경하고 싶을 뿐이야.”'“단지 재미난 쇼를 보기 위해 투자하고 있다는 건가요, 지금?”'“내가 왜 널 클럽에 들인지 알아? 너처럼 모순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품고 있는 애는 처음 봤거든. 촌스러울 정도로 순진한듯하면서도 심장을 서늘하게 할 만큼 퇴폐적인 기운이 동시에 풍겼어. 처음엔 그런 이중적인 느낌이 드는 이유를 몰랐는데 이태성을 쳐다보는 네 눈빛을 보고 알았지. 꼭 태풍의 눈 같았어. 거대한 폭풍을 몰고 다니는 조용한 태풍의 눈…… 그런데 이번 게임 꽤 조심해야 할 거야. 사람의 감정도 네 눈빛처럼 모순으로 똘똘 뭉쳐 있거든.”'“…….”'제니가 등지고 서 있는 세상은 어느새 붉은 빛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