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백호(白虎)는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요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온 몸이 노곤했다. 호랑이라는 종족이 어떤 종족이던가. 지상 최강이 아니던가? 특히 그는 모든 짐승들의 우두머리인 용족(龍族)의 백호였다. ''인간들에 의해 영물(靈物)이라 칭해지는 존재로 하루에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자는 시간이 많은 종족. 그런 그가 며칠 잠을 설쳤다. ''이 모두가 저 주인 때문이야! 백호는 책상에 앉아 주인의 하인인 경휘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주인을 노려보았다. ''“드디어 가셨군. 정말 피곤해.”''“쿡쿡, 이해하시오, 청룡님. 수한님도 초조해서 더 그러시는 걸 겁니다.”'초조하기도 하겠지. 저 주인의 몸에 전 용족의 미래가 걸려있으니 나라도 초조해 하겠다. ''백호는 방금 떠난 인간이 생각나자 기분이 나빠졌다. 그와 철천지원수 정도는 아니더라도 한 세상에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와 그 인간이 만나면 언제나 험악한 분위기로 마감한다. 그 인간은 백호를 죽일 놈 살릴 놈으로 욕하고 백호는 그 인간에게 다가가 꼬리를 휘두른다. ''“백호, 저 녀석은 왜 수한 선배를 미워하는 걸까?”''너는 안 미워하냐, 주인? 너도 학을 떼고 있잖아! ''“하기야 나도 지긋지긋한데 저 놈이라고 안 그리 느끼겠어? 이젠 사진만 봐도 경기가 든다.”''피곤한지 소파에 깊이 몸을 묻는 주인을 보며 경휘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당하는 놈 구경하는 거 재미 쏠쏠하지, 안 그래, 경휘 하인아? 남의 불행은 곧 나의 즐거움인 법. 백호는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하여튼 수고하셨습니다, 청룡님. 그래도….”''말을 흐리는 경휘를 보던 주인의 눈썹이 미세한 포물선을 그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주인의 감정 변화를 잘 모른다. 아주 미세한 부분에서 아, 이 인간이 지금 화나 있구나, 아니면 궁금해하고 있구나하고 알 수 있다. 그와 경휘 역시 다 년간의 경험에 의한 자료를 토대로 주인의 감정변화를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역시 경험은 무시 못해! ''“자주 오시긴 오시지요.”''“자주? 매일 오는 거잖아.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마자 이 청룡관(靑龍館)을 매일 드나들잖아. 청룡관 현관 문턱도 다 닳았을 걸.”''“그렇지만 맞선사진은 일주일에 한 번 밖에 안 들고 오시지 않습니까? 금요일 날!”''약한 한숨소리가 백호의 귀에 포착되었다. ''그랬다. 금요일. 그 지긋지긋한 인간이 여자 사진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날이었다. 금요일만 되면 그의 주인은 눈에 띄게 긴장을 한다. 한 시간 넘게 여자 사진을 보여주며 이 여인의 가족사항은 어떻고 취미는 저떻고 장래희망은 이렇고 지금 상황은 그렇고하며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주인을 괴롭히고 있었다. ''“생각나게 하지마. 금요일이 제일 싫은 날이 되어버렸잖아. 그만 두실 때도 되었는데.”''그 인간이 그만둬? 택도 없는 소리. 차라리 지구가 회전하는 걸 멈추길 바래라, 주인아! ''“그만두실 리 없으시죠. 청룡님께서 결혼을 하지 않으시는 한. 결혼하실 때까지 계속 여자사진 들고 오실 겁니다.”''충분히 그럴 인간이고, 반드시 그렇게 할 인간이지. 백호는 경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결혼이라…. 그게 문제지.”''왼손바닥으로 오른쪽 뺨을 쓱쓱 문지르며 주인은 생각에 잠겼다. ''결혼이라…. 정말 문제지. 아앗! 갑자기 떠올리기 싫은 일이 떠올랐잖아! 백호는 두 앞발을 머리에 얹으며 끙끙거렸다. ''“어라? 백호야, 왜 그러니? 화장실 가고 싶어? 잘 씻고 와라.”''아냐, 임마! 저게 지금 누구 보고? 백호는 경휘를 보며 나직하게 으르릉거렸다. ''“응? 아니야? 그럼 말고. 그만 으르릉거려!”''고개를 돌리며 청룡의 책상 위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르는 경휘를 보며 백호는 상대하기도 싫은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창가에 자신과 두 인간의 모습이 비쳐져 있었다. 백호는 창가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계속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그날 밤도 오늘처럼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었다. 봄이 일찍 찾아오는 청룡관 뜰이라고 하지만 꽃샘추위는 피할 수 없었다. 그날 백호는 청룡관 자신의 방에 드러누워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하품을 연이어 했다. 기분 좋은 포만감과 나른함에 잠겨 잠을 자려던 그는 돌연 뒷목 털이 쭈뼛 서는 냉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 노려보고 있는 느낌. 그를 압도하는 느낌. 그 느낌이 너무 오싹했다. 그는 순간 망설였다. 뒤로 돌아봐? 아님 모른 체하고 자는 척 해? '그도 고양이과에 속한 동물, 호기심이 이겼다. 백호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를 노려보고 있는 존재를 발견했다. ''''''그 저녁 생각만 하면 아직도 그의 털이란 털은 다 곤두선다. 간이 콩알만해졌다는 그 말이 어떤 때 쓰는 말인지 아주 잘 체험했다. 에휴, 이게 모두 저 팔푼이 같은 주인 때문이야! 백호는 모든 책임을 청룡에게 돌렸다.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시지요, 청룡님.”''“넌 그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오히려 왜 하고싶지 않냐며 닦달할 걸.”''“흠…,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결혼하실 마음 없으신 겁니까?”''흥! 무슨 말을! 아직 임자를 만나지 못해 저러고 있는 거야. 넌 주인의 하인이면서 그것도 아직 모르냐? 백호는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 그의 주인은 청룡이었다. 청룡이라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존재였다. ''청룡! 용족(龍族)의 지배자이자 모든 혈족의 수호자 그리고 지구 총사령관. 그의 주인이 가진 간판이었다. 그의 주인은 용족이었다. 그가 보통의 평범한 속세의 백호가 아니듯이 그의 주인 역시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이 지구와 우주를 한 손에 잡고 휘두를 수 있는 힘을 가진 종족인 용족이었다. 그것도 지배자의 신분이었다. 결계(結界)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용족을 지배하는 지배자. 그것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지 인간들은 모른다. 하기야 모르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지. 그게 더 속 편할 테니까. ''“결혼할 마음? 오늘 당장이라도 내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면 바로 결혼할 거야. 그게 우리들의 운명이지.”''씁쓸한 주인의 말에 경휘란 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운명의 상대란 용족인 주인의 운명을 같이 누리는 존재를 일컫는다. 용족은 운명의 상대와 삶과 죽음을 같이 누린다. ''“하지만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기다리실 겁니까? 운명의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를?”''“난 기다리고 싶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나. 너도 알다시피 나와 적룡, 흑룡, 백룡의 몸에 황금룡(黃金龍)이 봉인되어 있지. 나뉘어 봉인된 황금룡은 합쳐지려 하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해. 예언에 이르길 내 아들이 정식으로 황금룡을 계승할 거라고 하는데…. 뭐, 내가 예언 따위를 신봉하고 있다는 건 아냐. 미래란 그리되길 바라는 인간의 바람이니까. 그러나 수한 선배는 예언을 철저히 신봉하고 있지. 그래서 나보고 결혼하라 닦달하고 있는 거고.”''주인 말이 맞았다. 주인의 나이 30을 넘기자 그 인간은 초조해졌는지 처음에 은근하게 가해졌던 압력의 강도를 대폭 높였다. 하지만 어디서 그 여자들의 사진을 구해오는 걸까? 백호는 그것이 무척 궁금했다. 대통령 그만두더니 적령기 여자들의 사진 찍는 게 취미가 된 거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참으로 민폐를 왕창 끼치는 취미란 생각이 들었다. ''“청룡님의 운명의 상대라…. 저도 무척 궁금합니다. 혹여 그 사진들 속에 없었습니까?”''“사진 얘긴 하지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 해.”''“쿡쿡, 혹시 또 모르지요. 내일이라도 당장 나타날지. 때마침 내일부터 청룡님의 휴가기간이지 않습니까? 밖으로 나가서 찾아보시는 게 어떻습니까?”''그래, 내일부터 내 주인의 휴가다. 이전에도 휴가란 단어가 내 주인의 사전에 있긴 있었다. 하지만 그 휴가는 일의 연장에서의 휴가였다. 다른 날 보다 일이 조금 줄어들고 업무의 연장으로 다른 지역을 방문하는 횟수가 많아졌던 그런 휴가였다. ''하지만! 이번 휴가는 다를 것이다. 그건 장담할 수 있었다. 다르지 않으면 내가 곤란해. 백호는 저 주인을 어떻게 밖으로 끌어낼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휴가라….”''“네. 이번엔 특별히 모든 계획을 없앴습니다. 업무를 잊으시고 철저히 즐기시면 됩니다.”''잘 했어, 하인아! 백호는 경휘가 한 일이 시의적절(時宜適切)하다고 여겼다. 역시 일이 되려니 모든 것이 착착 풀려 가는 구나. 하기야 누가 일을 주관하고 있는데…. 아차! 비밀! 천기누설(天氣漏泄)하면 안 되지. ''“즐긴다? 즐긴다는 게 뭐지?”''“네?”''“무얼 즐긴다는 거지?”''“…청룡님?”''“어떻게 하면 즐길 수 있는 거지?”''“……?”''당황하는 경휘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백호는 주인 청룡이 말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주인은 즐긴다는, 인생의 행복을 누린다는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경험해 봤어야 알 거 아냐. 허구한 날 서류더미에 쌓여 있는데 즐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의무와 책임만 강요당해온 삶이란 걸 곁에서 보아오지 않았던가. ''주인이 누릴 수 있었던 권리 역시 참된 권리가 아니었다. 의무와 책임을 동반한 권리였다. 순수하게 인간으로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건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감정의 사치였다. 즐거움을 찾는 방법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백호는 그런 주인을 동정했다. 자신은 즐거움을 알고 있었다. 나른한 오후에 따뜻한 곳에 드러누워 부른 배를 두드리며 꾸벅꾸벅 조는 것에서 즐거움을 누렸고, 청룡관 너른 정원에 뛰어다니며 자신의 용맹을 과시할 때 즐거움을 느꼈다. 백호의 주인은 그런 면에서 백호보다 못했다. ''“흠…, 질문을 바꾸지. 넌 휴가 때 어떻게 보내지?”''“저요? 어…, 그러니까 친구와 만나서 술자리를 같이 하고, 한가하게 드러누워 보고싶었던 책도 보고, 여행도 가고, 등산도 가고…, 그렇게 보냅니다.”''“그런가? 휴가는 그렇게 보내면 잘 보내는 건가?”''“대…체적으로 그렇지요.”''다들 가족과 같이, 친구와 같이, 그것도 싫으면 혼자서 제 마음대로 뒹굴며 보내는 게 휴가지. 하지만 주인이 그런 걸 알리 없잖아. ''“그럼 내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거와 다를 게 없잖아. 나 역시 책을 보고 여행을 하고 있잖아?”''“소설책과 보고서는 틀립니다. 그리고 여행과 순방도 틀리구요.”''“그런가?”''“네!”''적절한 단어를 찾아 휴가에 대해 설명하려 애쓰는 경휘를 보며 백호는 한숨을 살짝 쉬었다. 백 번 설명해봤자 뭐해? 한 번 실천만 못한데. 하인 경휘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렇게 보내려 노력은 한 번 해 보지.”''“네, 청룡님. 그럼 오늘 업무는 이것으로 마치지요. 쉬십시오.”''휴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심도 있게 강의를 한 경휘가 진이 다 빠진 얼굴로 문을 닫고 나갔다. 백호는 문이 닫히는 걸 지켜보다 주인을 흘끗 쳐다보았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얼굴에 나타나지 않았다. 백호가 자랑하는 동물로서의 초감각에도 주인의 감정은 잡히지 않았다. 주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백호는 다시 얼굴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점점 많이 불어왔다. 방금 전보다 나뭇가지의 움직임이 많아졌다. ''내일이다. 주인의 휴가가 시작되는 내일, 예정되었던 모든 운명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지구의 운명도, 백호의 운명도, 주인의 운명도. '백호는 다시 떠오른 기억에 목덜미 털이 쭈뼛 섰다. 차가운 냉기와 같이 나타난 그분은 백호가 어렸을 때 봐왔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분을 좋아했어도 결코 그런 모습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백호? 창밖에 토끼라도 지나갔느냐? 사냥하러 나갈래?”''주인! 넌 내가 토끼 같은 조그만 동물이나 쫓는 한심한 동물로 보는 거야? 이리 봬도 난 모든 짐승들의 우두머리라구! 너랑 신분이 비슷하단 말야. 호랑이 중 가장 용맹무쌍한 용족 꽃미호(美虎)인 날 어찌 보고!''“왜 그런 귀여운 포즈로 날 보는 거지? 쓰다듬어 달라는 거냐?”''내가 말을 말지, 말을 말어! 백호는 청룡을 한껏 노려보다 벌떡 일어나 책상 앞 소파에 뛰어올라 몸을 눕혔다.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소파 등받이와 테이블을 번갈아 가며 탁탁 소리나게 쳤다. ''밉상 같은 주인을 그냥 저리 살라고 내버려둘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간 후환이 두려워서였다.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싸울 수나 있지.''에휴…. 내 팔자야! 내 호생(虎生)이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야? 칠칠맞지 못한 주인 만나 가지고 이 고생을 하고 있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근데 주인 놈, 연애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제 1 장 피보다''제 2 장 자존심 금이 가다''제 3 장 도망자 신분이 되다''제 4 장 길을 헤매다''제 5 장 여자 유혹하는 법''제 6 장 발바닥에 불이 나다''제 7 장 등산은 좋더라''제 8 장 백호, 주인을 바꾸다''제 9 장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죽은 불쌍한 개구리''제 10 장 사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제 11 장 제 꾀에 제가 넘어가다 ''제 12 장 들통나다''제 13 장 대결의 결말''제 14 장 평범한(?) 나날''제 15 장 피서지에서 일어난 일''제 16 장 꿈보다 해몽이 좋다''에필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