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 개자식님이 나를 뭐로 보고 바람을 맞혀?”'바글거리는 사람들 속에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검고 희고, 거무튀튀하고 허여멀건 사람들이 갖가지 인종적인 냄새를 피우며 그녀 주변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지만, 제주도는 고사하고 강원도에도 가보지 못한 그녀에게 영국의 히드로공항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여리고 떨리는 마음도 모르고 이곳으로 오게 만든 장본인은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다. 무려 삼십 분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한 자리에 장승처럼 서서 기다리고도 여전히 아는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공포를 넘어 분노를 느꼈다. 더 이상은 아름답고 착한 마음으로 기다려줄 수 없었다.'“흥, 내가 못 갈 줄 알고? 기다려!”'그녀는 유행이 지나도 한참이나 지난, 거기다 낡기까지 한 고물 여행 가방을 끌고 힘차게 공항을 나섰다. 이렇다 할 여행을 가보지 못한 그녀에게 여행 가방이 낡았다는 건, 생각해 보나마나 중고를 구입한 거였다. 아는 사람에게 졸라 빼앗다시피 산 그 가방은 낡은 것치고는 바퀴가 씩씩하게 잘 굴러갔다. 낡은 여행 가방처럼 그녀의 발걸음과 뇌에도 연륜이 묻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출국과 입국의 표시를 정확히 구별하지 못해 좁아터진 히드로공항을 땀나게 몇 바퀴나 돌고나서야 무사히 문 밖으로 나와, 버스가 늘어선 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주소 하나 달랑 들고 국제적 미아의 위기에 처한 그녀는 그나마 그동안 쌓은 훌륭하고도 훌륭한 보디랭귀지의 실력으로 KINGSTON으로 향하는 버스를 무사히 타게 되었다. '처음부터 택시를 타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건 어쩐지 개자식님한테 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얼마나 멀리 갈지 모르는 길을 비싼 택시요금을 물며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온 나라에서 용감무쌍하게도 버스를 집어 탄 거였다. '고속도로를 달리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모른다. 그녀가 얼핏 듣기로 런던 근교의 타운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나무만 늘어서 있는 걸까? 왜 높이 솟은 건물 한 채 보이지 않는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