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한가한 틈을 이용해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의학 용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넓고 화려한 사무실의 한 쪽에 마련한 PDP 화면에서는 출연 의사가 설명하는 ‘뇌수막종’의 여러 가지 형태와 증상들이 선명하게 비쳐지고 있었다.'화면이 바뀌고 ‘뇌 전문’ 신경외과 전문의, 의학박사라는 설명과 함께 나타난 전문가의 모습은 그의 음성만큼이나 준수했다.'리모컨을 집어 들어 텔레비전을 끄며 찬식은 코웃음을 쳤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것들 치고 제 뱃속 채우기에 혈안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평소의 믿음 때문이었다. '‘쳇, 제 놈들이 제대로 검사하고 신경을 써 봐라. 왜 미리 알아내지 못하는지. 하여간 개나 소나 죄다 박사라고 떠들지. 어느 병원인지 이 방송 끝나고 나면 돈푼깨나 만지겠군, 젠장…….’'찬식은 지루한 몸을 일으켰다.'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 빙글빙글, 허리를 몇 차롄가 돌리던 그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문가로 걸음을 옮겨갔다.'반쯤 열린 문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시원의 모습을 지켜보는 찬식의 얼굴에 느물거리는 웃음이 번졌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리고 그것을 집어 드는 시원의 동그스름한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헤벌쭉 벌리고 있던 입으로 꿀꺽 하고 마른 침이 넘어갔다. '가뜩이나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물이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시원의 집이 부친인 정 노인과 같은 빌라에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급하게 방을 구해야 하는 그녀의 딱한 소식을 다른 직원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을 때 찬식이 발 빠르게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리고 무척 인정 많고 이해심 많은 고용주의 입장이 되어 자신의 부친에게 부탁해 비교적 저렴한 월세로 건물 꼭대기의 비어있는 집을 세주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찬식의 수고에 대해 시원과 그녀의 다른 가족들이 얼마나 고마워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찬식이 원하는 것은 그저 입에 발린 몇 마디의 감사나 찬사의 말이 아니었다. '그는 시원을 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