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선생 말처럼 아직 태아 호흡 있어, 천만다행이지. 일단 pack RBC(수혈용 혈액, 적혈구) 두개 걸고 수혈 중이긴 한데, 출혈량이 너무 많았어. 알다시피 이효 씨 지혈도 안 되는 몸이고. 이런 식이면 태아 산소 부족으로 5분내 사산이야, 아이 살리려면! 지금 당장 혈액응고제 투여해야 해.”'“그건 안 됩니다!”'혈액응고제라는 말에 규황이 수술장이 떠나가라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안됩니다. 혈액응고제 투여하면 심장에 고여 있던 혈액이 제일 먼저 응고돼, 바로 기계판막에 혈전이 뭉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산모가 위험해집니다, 절대 안 됩니다, 과장님!”'서슬이 퍼래져선 덤벼드는 규황이지만, 박 과장은 옳다구나 그의 말을 들어줄 수만은 없다. 그러기엔 이미 이효의 눈물겨운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그였다.'“그럼 일단 제왕절개부터 해서 애 먼저 꺼내! 이 상태로 더 못 버틴다니까!”'“지금도 헤파린 탓에 지혈이 안 되는데 이대로 배 열수 없습니다! 이대로 배 열면 산모 바로 테이블 데쓰(수술 중 사망)라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그럼 어쩌겠단 거야, 설 선생!”'다그치듯 묻는 박 과장의 말에 규황은 정신이 아득해져온다. 맞은편에서 계속 뭐라고,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건 같은데. 아무 말도 들리지가 않는다.'이효야. 이효야. 이런 순간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도대체 저 박 과장이란 사람이 지금 내게 뭘 원하는 거니. 내게 이효, 네 심장을 굳히는데 동의하라는 건가? 아니면, 3년 만에 겨우 생긴 아일 포기하겠다는 말을 내 입으로 하라는 건가?'큰 욕심 안 내며 살았는데.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내가, 그래도 좋은 양부모님 만나 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걸로. 유일하게 욕심났던 여자의 곁에 평생 살 수 있게 됐다는 사실 하나로 더 바라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살았었는데.'그런 내게도 내 피와, 내 살과, 내 마음을 닮은 내 아이가 생기는구나. 이제 겨우 내게도 가족이란 게 생기는구나. 예쁜 당신, 너무 좋아하는 통에 표현은 못했지만 단단이가 생겼을 때야 비로소 인간 설규황이 이 세상에 태어나 무언가 한 가지는 남기고 가겠구나. 웃기지만,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효야, 이효야. 난 어떡하니. 이제 널 어떡하면 좋으니. 우리 이효, 이제 단단이 없이 어떻게 살지.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어떻게. '이효야. 날…… 용서해라. 단단아, 아빠를…… 용서하지 마라.'“바이패스 쿨링 온(인공심폐기를 이용해 체온을 하강시킴).”'“설 선생. 이대로 태아 꺼내지 않고 쿨링하면 18도까지 내려가기 전에 아인 죽어!”'박 과장의 입에서 결국 외면하려 했던 그 말이 터져 나오자 규황의 손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다른 길 따위, 보이지 않는다.'“혈액응고제를 쓸 수도 없고, 더 이상의 출혈은 산모에게 위험해 제왕절개도 할 수 없습니다. 산모 체온 내려, 자연 지혈 유도하고 산모 바이탈부터 잡겠습니다.”'“설 선생. 내 말 오해 말고 들어. 이효 씨가 원치 않아, 지금 같은 선택.”'무거운 박 과장의 음성에 규황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를 응시한다. 그 눈에, 이 세상 모든 슬픔이 다 담겨있는 듯했다. 그리고 바싹 마른 입술을 힘겹게 벌려 죄스런 한 마디씩을 이어간다.'“과장님.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이효를 살리려는 건, 감히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