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그걸 왜 내가 해야 되는데?”'재원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할아버지의 말을 전하는 사촌형 정원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할아버지 명령이라니까. 우리 노회장님 깊은 뜻을 몰라서 그러냐?”'“몰라! 내가 왜 거기 일에 나서야 하는데! 그렇게 중요한 브레인이면 정통부 본부장이 직접 나서면 되는 일 아냐? 내가 왜 남에 밭에 가서 밭을 매줘야 하는 거야? 도대체!”'이마엔 서서히 히터가 돌고 있는 중이다. 해외 지사에서 돌아 온지 이제 1년. 처음 할아버지 鄭 회장이 서울로 불러들였을 땐, 정보 통신 사업부는 넘보지 말라는 의중을 감추지 않았다. 그룹의 핵심 사업부인 그곳으로부터 완전히 돌려 세워 놓았던 것이다. 헌데 지금에 와 그 쪽 사업부의 핵심 브레인 유출을 막으라니!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 재원의 입장에서는 털끝만큼도 이해 할 수 없는 처사였다.'“정재원 본부장님! 남의 밭이 될지 자기 밭이 될지는 아직 더 두고 봐야 하는 거 아냐?”'“무슨 소리야?”'혼자서 열 받아 화드득 달아오르는데 정원이 의미심장한 소리를 한다. 재원은 능글능글한 저 구렁이 사촌의 속셈을 간파 해보려 눈을 가늘게 떴다. '“7월에 정기 이사회 있는 거 알지? 아마 고위 임원급 인사이동도 그때 회의 안건에 올라갈걸! 그럼 앞으로 석 달 남았는데 노회장님이 뭘 원하시고 지금 이런 일을 너한테 맡기시는 건지 대충 짐작해야 하지 않아?” '무슨 심산으로 자신에게 이런 언질을 해주는 것인지 재원은 정원의 말을 신뢰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기이사회와 인사이동은 지금 이 순간 그가 잠시 잊고 있던 사항임이 틀림없다. 저녁때 있는 수연과 약속이 중요한 사항을 놓치게 만드는 산만함의 원인이 되고 있던 것이다.'“그럼 형 얘기는 할아버지가 나한테 정통 쪽을 맡기시려고 그러신다는 말이야?”'재원은 산만한 고개를 탈탈 털고 머리 굴린다. 인사이동과 핵심 브레인 유출 방지. 정원의 말대로 인사이동을 겨냥한 일이라면 도면이 나오는 얘기였다. 정 회장의 적장자인 재원에게 정보통신 사업부로 고개를 들이밀 근거를 마련해 주기 위한 일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거기다 그 곳의 조짐을 엿 볼 수 있는 틈 까지 주려는 계산이 깔려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알아서 생각해라. 그 만큼 힌트를 줬으니까. 너 머리 좋잖아! 그 머리가 내린 판단이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간단한 얘기를 빙빙 돌려대며 정답을 피해가는 정원. 그 속내가 오래되어 썩어 버린 우물 물 보다도 더 탁하게 느껴져 기분까지 더러워졌다.'“알았어. 될 수 있는 대로 빠른 시간 내에 처리 하겠다고 말씀 드려줘. 그리고 직접 말씀 하시지 않고 형을 보내셨을 때는 그만큼 기밀을 유지 하고 싶으셨던 것 같으니까. 앞으로 진행 되는 사항도 형한테 보고 할게.”'하지만 지금 기분과 상관없이 또는 저 5백년 묶은 능구렁이의 뱃속에 뭐가 들었건, 일단은 할아버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거절 할 만 한 명분을 세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도 더는 따질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그러마.’하고 대답을 한 재원이 뜻밖인지 정원은 대꼬챙이에 입을 끼운 사람 마냥 다물어 버렸다. '“뭐야? 왜 그래?”'재원이 눈을 사납게 치떴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성질을 돋우는 인간이 바로 사촌형 정원이다. 그러나 정원은 여전히 입술을 꾹 다물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사촌 동생의 발치만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재원이 책상 위에 걸쳤던 몸을 먼저 일으킨다.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돌리고 사촌형에게 그만 돌아가 달라는 고개 짓을 했다. 그러자 정원은 심드렁한 얼굴로 일어서서 재원의 옷차림에 노골적인 경멸의 시선을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