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우, 임자 만나다 - 어머, 이를 어째?''''''따뜻한 볕이 한가득 쏟아지는 창가 옆 의자에 앉아 호진은 꾸벅 졸고 있었다. 수학 선생은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팔짱을 끼고 고개를 푹 숙이고, 발을 책상에 걸쳐놓고 조는 호진을 그대로 무시한 채 칠판에다 판서만 열심히 하고 있었다. ''반 전체에 싸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호진의 주위만 나른한 봄날이었다. 학생들이 힐끗거리며 호진을 보다 호진의 고개가 끄덕하면 황급히 앞만 바라보며 공부하는 척을 했다. ''드르렁. ''가볍게 들리는 코고는 소리에 분필을 든 수학 선생이 멈칫 했다. 분필을 꽉 잡은 것을 보니 화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곧 마음을 다스렸는지 수학 선생은 고 1 집합에 대한 개념을 계속 판서해 내려갔다. ''드르렁.''분필이 부들부들 떨렸다. 학생들의 눈도 왕방울만 해졌다. ''드르렁.''뚝. 분필이 강력한 손힘에 두 조각났다. 학생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드르렁.''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흘렀다. 학생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수학 선생이 천천히 몸을 돌려 호진을 노려보았다. 긴장된 기운이 흘러 넘치는데도 호진은 깨어날 줄 몰랐다. ''드르렁.''교실 가득 살기가 흘렀다. ''“설호진!”''한 글자 한 글자 씹어 삼키듯 내뱉는 말에도 호진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코 고는 소리는 여전했다. ''“설호진!”''수학 선생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교실을 울렸다. 그제야 호진은 눈을 부스스 떴다. ''“뭐야?”''꿀꺽. 학생들은 목을 움츠러뜨리고 수학 선생과 호진을 번갈아 힐끔거렸다. ''“설호진!”''노기 가득한 수학 선생의 부름에 호진은 뉘 집 개가 짖느냐는 듯 상관하지 않고 기지개를 켰다. ''“설호진! 선생 말이 말같이 들리지 않아? 왜 대답을 하지 않아?”''“아, 씨바! 왜 부르는 거야? 기분 좋게 자고 있었건만.”''“뭐야? 너 선생님에게 지금 반말을 했나?”''교탁 위에 놓인 길쭉한 막대, 일명 사랑의 매를 집으며 수학 선생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를 무심히 노려보던 호진이 천천히 책상에 올려놓은 발을 내려놓으며 일어났다.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 호진은 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한 손으로 탈탈 털어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천천히 육식동물마냥 앞으로 걸어갔다. ''호진과 수학 선생의 눈이 마주쳤다. 둘 사이에 오가는 첨예한 시선에 공기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왜 부르셨습니까?”''한 글자씩 강조하듯 짧게 끊어 말한 호진의 기세에 수학 선생은 들고 있는 사랑의 매를 들어올렸다. 호진의 눈이 가늘어 졌다. 수학 선생의 팔이 호진이를 향해 내리쳐졌다. 호진은 내려오는 막대를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으로 막았다. 막대 하나를 두고 둘 사이에 힘 대결이 일어났다. ''“이, 익! 이놈이…….”''호진은 씨익 웃었다. ''“감히 선생님에게…….”''“킥킥.”''잠시 키득거리던 호진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 생활기록부 못 보셨수? 김철수 선생님, 밤길 조심하십시오.”''“뭐, 뭐야?”''“혹시 또 압니까? 이상한 놈 만나 콘크리트에 매달려 바다에 수장될지?”''“너, 너…….”''“아니면…….”''호진은 수학 선생의 얼굴을 비웃는 표정으로 살폈다. 수학 선생 김철수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얼굴도 꽤 반반하니 게이바에 팔릴 수도 있겠군.”''김철수 선생의 팔에 힘이 가해졌다. 하지만 호진은 가볍게 옆으로 흘려보냈다. 자신을 막는 힘이 갑자기 옆으로 쏠리며 없어지자 김철수 선생은 앞으로 꼬꾸라질 뻔했다. 그 모습을 감상하던 호진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교실문으로 향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양호실에 가야겠습니다. 허락해 주실 거지요?”''탁. 문이 닫혔다.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교실이 그의 퇴장과 함께 시끄러워 졌다. ''“네 이놈! 설호진!”''자신을 부르는 고함소리에 피식 웃던 호진은 복도를 걸었다. 정장 스타일의 교복에 넥타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두 개의 단추가 열려진 셔츠는 구깃구깃했다. 호진은 바지 위로 비어져 나온 셔츠를 바지 안으로 넣으려다 귀찮아서 그냥 확 뺐다. 교복보다 자신이 즐겨 입는 편한 스타일을 하고 싶었다. ''그는 어슬렁거리며 교실을 지나쳤다. 4월이었다. 입학식에 따른 소란스러움은 이제 잠잠해 져 학교는 면학분위기였다. 그 분위기에 동참하지 못한 일부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호진도 그 일부 학생그룹에 속해 있었다. ''4층 건물 중 1층과 2층 일부는 1학년 교실이다. 호진은 계단을 올랐다. 학교 건물은 ‘ㄱ’자 형태였다. 옆에는 강당과 체육관이, 뒤에는 비교적 큰 나무들이 있는 후원이 있었다. 산을 깎아 만든 학교라서 그런지 후원엔 소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후원 대신 솔밭이라 불렸다. ''3층에 이르자 호진은 오른쪽으로 꺾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은 건물 끝에 위치해 있었다. 봄날의 따스한 햇빛이 창으로 들어왔다. 아직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복도 창문은 다 닫혀져 있었다. 호진은 ‘다도부’라 적힌 교실문을 열었다. ''“설짱! 오셨습니까?”''호진과 같이 땡땡이를 치고 있던 세 명의 학생이 화들짝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호진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설짱, 이쪽으로 오십시오.”''호진은 자리를 치워주는 왼쪽 뺨에 흉터가 있는 우락부락한 남학생을 보다 그곳으로 갔다. ''“설짱, 신발을 이리로.”''호진은 신발을 벗었다. 다도부 교실은 다른 클럽 교실보다 특이했다. 교실 절반을 무릎 어름까지 높여 그곳에다 장판을 깔았다. 통통 두드리면 나무 소리가 났다. 벽돌로 쌓아 그 위에다 나무판자를 깐 것이다. 그곳에 좌정을 하고 다도를 즐기라는 취지였지만 지금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호진이 이곳을 접수(?)한 이유는 여기가 가장 햇빛이 잘 드는 교실이고, 또한 장판까지 깔려있어 드러눕기 좋아서였다. 즉 낮잠자기에 그만인 장소였다. 벌써 그를 위해 베개에 이불까지 준비가 되어졌다. 호진은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호진은 어릴 때부터 짱이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때도 그는 짱이었다. 그의 집은 대대로 조직폭력배, 일명 조폭 집안이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 윗대 할아버지도 다 사회의 암적 존재들이었다. 물론 직접 대놓고 이런 소리하면 바로 칼침 맞아 동해 깊은 바다에 수장이 될 거지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조폭이 사회 암적 존재라는 건 자타가 다 공인한 사실이다. 사회의 암적 존재는 거기에 걸맞게 행동해야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법이다. 호진 역시 걸맞는 행동을 일찍부터 해왔다. 그것이 부친을 흐뭇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나,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윗대 조상들로부터 고스란히, 그것도 진하게 유전되어 온 피라는 놈이 호진을 폭력과 잔인함, 사악함 그리고 호색의 길로 인도했다. ''호진은 창가로 몸을 틀었다. 봄날 따스한 햇살이 얼굴 가득 쏟아졌다. '그는 집이, 특히 부친이 싫어 밖으로 나돌아다녔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그나마 나았지만 돌아가신 지금,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비록 자신이 부친의 기대부응에 응하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부친, 그 인간까지 좋아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증오하고 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본격적인 낮잠모드로 들어가려 하자 오히려 잠이 깨버렸다. 호진은 이마를 찌푸렸다. 몸은 피로했다. 밤새 오토바이를 타고 온 거리로 광란의 질주를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달라붙는 여자들과 상대했다.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날카롭고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음과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쾌감을 안겨줬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허파 가득 하얀 니코틴담배 연기로 가득 채워도 무료함과 짜증은 가시지 않았다. ''몸은 피곤한데 잠은 달아나니, 다시 불러도 달아난 잠은 돌아오지 않았다.'호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귀로 자신의 똘마니를 자처하는 부하들이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호진은 그것도 짜증이 났다. ''초등학교 시절, 편히 지내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힘세어 보이는 녀석들과 시빗거리를 만들어 붙어 이겨왔다. 중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자신의 실력이 비밀리에 회자됨에 따라 숱한 사내 녀석들이 그를 찾아와 맞짱 뜨기를 원했다. 그는 적당히 상대해 줬다. ''싸움은 자신이 있었다. 철이 들 때부터 봐온 게 싸움이었다. 정정당당한 무도가의 싸움이 아니라 생사를 가르는 싸움이 대부분. 거기서 호진은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배웠다. 그런 그에게 제 주먹의 단단함과 맷집만 믿는 어중이떠중이의 실력은 통하지 않았다. ''이 고등학교에서 자신 마음대로 휘젓고 다닐 수 있는 이유도 그의 실력 때문이었다. 그가 중학생일 때 이곳 고등학교 짱이 맞짱 뜨러 왔었다. 그 때 호진은 적당히 손 봐줬다. 그 이후 호진이 이 고등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그는 명실상부한 이 학교의 짱으로 등극했다. 아울러 자신을 따르는 똘마니들로 인해 그는 마음껏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수업시간에 낮잠에, 지각에 조퇴, 결석까지도. ''‘띵동띵동 띵동.’''4교시 끝나는 벨이 울렸다. 점심시간이었다. 호진은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점심을 먹을까? 아니면 그냥 나중에 먹을까? 입맛이 별로 없었다. 그의 귀로 다도부실에 있던 그의 사천왕 중 하나가 안절부절못하며 작은 소리로 다른 똘마니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점심 식사 때문일 것이다. 그냥 계속 누워있기도 뭐해 호진은 일어나 앉았다. ''“깨셨습니까, 설짱?”''사천왕 중 하나인 소정문이었다. 소정문의 별명은 소칼, 본인은 소칼날이라고 불러달라 극구 우기지만 그와 다른 사천왕은 소칼이라 불렀다. 호진의 본가 조폭 중 칼날의 모습에 반해 자신을 작은 칼날, 즉 소칼날로 자신의 별호를 정한 녀석이었다. ''“애들 데리고 밥 먹고 와.”''“설짱께서는?”''“난 생각 없다. 나가서 밥 먹고 와라.”''“그럼 뭐라도 사올까요?”''“아니.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아직 생각이 없다. 나중에.”''“네, 설짱. 그럼 다녀오겠습니다.”''“그래.”''세 명의 사내녀석이 부실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조심스레 닫쳤다. 호진은 멍하니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었다. '''''''2. 여우, 협박하다 - 어머, 재주도 좋아. ''3. 여우, 주변정리하다 - 어머, 인기도 좋아.''4. 여우, 요리부에 들다 - 어머, 세상에 망조가 든 거야!''5. 여우, 가슴이 철렁하다. - 어머, 새삼스럽게''6. 여우, 경악하다. - 어머, 뭘 또 새삼스럽게''7. 여우, 에이프런 두르다. - 어머, 이제 습관이 되었군.''8. 여우, 음모에 걸리다. - 어머, 어쩌다가.''9. 여우, 코피 터지다. - 어머, 웬일이니.''10. 여우, 산으로 - 어머, 바다는?''11. 여우, 자신의 소굴로 끌어들이다. - 어머, 드디어?''에필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