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해원의 표정에 배신감과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함께 나타났다. 해원이 분노로 온몸을 떨다 순간 검을 빼 들어 보월을 겨누었다. 곧바로 그 앞을 해명이 막아서며 차갑게 말했다.
“공자, 한 보만 더 다가오면 나를 상대해야 할 것이오. 후회할 짓 하지 말고 당장 떠나시오.”
덜덜 떨리는 검을 겨눈 채 미동도 없는 해원에게 설영이 급히 달려가 검을 억지로 내리도록 했다.
“공자 제발! 국상께서 위중하다 하지 않으십니까? 그냥 돌아가십시오!”
그 말에 해원이 검을 떨어트리며 설영에게 답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너는 저 여인을 가만히 두었구나. 아버님이 네게 주공이 아니면 나 또한 네 소주인이 아니다. 더는 널 보고 싶지 않구나.”
그 말을 끝으로 해원이 급히 떠나자 보월이 순간적으로 복부를 부여잡았다. 곧 쓰러질듯한 보월을 해명이 급히 품에 안았지만 눈앞이 하얗게 변할 정도의 통증에 보월이 결국 정신을 잃었다.
“보월아!”
급히 우마가 달려와 치료를 한 덕분에 한참 뒤에 깨어난 보월이 계속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해명을 보며 쓰게 미소 지었다.
“저 좀 앉혀주십시오.”
보월의 말에 보월이 앉는 것을 도와준 해명이 아무 말도 없이 보월의 얼굴을 응시하고만 있자 보월이 해명의 얼굴을 보지 않으며 애쓰며 말했다.
“원이가 그리 갔으니 이제 한숨 덜었습니다. 다시는 저를 보지 않는다면 기억이 떠오를 일도 없으니. 안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보월의 손을 꼭 잡아주며 해명이 입을 열었다.
“나도 안다. 네가 한 이 방법이 원이를 네 곁에서 때어 놓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평생 동생의 증오를 마음에 간직해야 하는 이런 잔인한 방법을… 정녕 견딜 수 있겠느냐?”
해명의 품에 기대며 보월이 나직이 답했다.
“제가 원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습니다. 이제 더는… 저도 그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솔직히 연 오라버니 정도라면 아버님의 생각 정도는 충분히 간파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저를 두고도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생각에 조금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알았습니다. 오라버니는 아셨던 겁니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철저하게 망가트리는 국상의 수법을. 국상의 뜻대로 자신이 죽지 않는다면 다치는 것은 저일 것이기에. 저를 위해서 그리 쉽게 독을 마신 것입니다.”
가슴 아픈 보월의 말에 해명이 보월을 품에 꼭 안았다.
“너는 단 하루도 너 자신을 위한 삶을 산 적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너를 위해 다치는 꼴은 절대 보지 못하니. 이런 너를 내가 어찌해야 하겠느냐.”
약을 먹여 잠을 재운 보월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무겁게 한숨을 쉬며 해명이 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복잡한 표정을 한 채 밖에 서 있던 을불이 급히 해명의 앞으로 다가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시 고민하던 을불이 천천히 입을 뗐다.
“창해원 공자가 고보원이 맞느냐?”
평소 있던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이 진지한 을불의 표정을 보며 해명이 답했다.
“어찌 아셨습니까?”
그 말에 을불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한참을 말을 꺼내지 못하던 을불이 부들부들 떨리던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한 나라의 국상이라는 자가 어찌 그런 치졸한 방법을! 그럼 보원이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 사실을 알면 제정신으로 살 수나 있겠느냔 말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한참을 말을 잇질 못하던 을불이 말을 이었다.
“걱정 말아라. 예전부터 해원 공자가 낯이 익다 생각했었는데 오늘 해원 공자와 보월의 얼굴을 동시에 보고, 또 해원 공자의 말에 심하게 충격을 받는 보월의 모습을 보고 혹시나 했던 것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마. 다만…”
답지 않게 말을 흐리는 을불에 해명이 을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공의 잘못이 아닙니다.”
“내가…”
을불이 일순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이어 닦아냈다.
“유일한 벗의 인생을 망가트리고 살아남았다. 보월이를 볼 면목이 없구나. 미안하다.”
같은 시각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집에 도착한 해원이 급히 말에서 내려 창조리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버님 소자입니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연 해원은 평소와 다름없이 바르게 앉아 문서를 보고 있는 창조리에 모습에 그대로 굳었다.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는 해원을 보더니 창조리가 차갑게 말했다.
“그래도 아비가 걱정이 되기는 했나 보구나.”
비로소 그 말에 정신을 차린 해원이 믿고 싶지 않다는 듯 물었다.
“설마… 거짓이셨습니까?”
“왜? 그새 그 계집과 정이라도 들었더냐?”
“아버님!”
“시끄럽다! 감히 아비에게 언성을 높이는 것이냐! 내 설영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낸 것만으로도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푼 것임을 모르느냐?”
그 말에 진심으로 화가 난 듯 말도 없이 문을 닫고 나온 해원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에게 난 아비와 오라비를 죽인 원수일 텐데 내가 생각이 짧았소. 그대가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는 걸 헤아리지 못했소. 그래서 그리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 거짓을 말해서라도 나를 떠나보내고 싶었던 거겠지. 참으로 이상하오. 머리로는 이토록 그 사실을 잘 받아들이면서 마음은 왜 이리 아픈지.”
밤새워 보월의 곁을 지킨 해명이 약 기운에 아침이 돼서야 눈을 뜬 보월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쉬어라.”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보월이 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해명이 보월의 어깨를 강하게 잡으며 소리쳤다.
“쉬래도! 지금 네 얼굴을 좀 보아라! 핏기 하나 없는데 어딜 간다는 것이냐!”
보월이 해명의 손을 떼며 말했다.
“저 옷 좀 갈아입게 나가주십시오.”
그 말에 순간 멈칫하던 해명이 굳게 주먹을 쥐었다. 낮게 한숨을 내쉰 해명이 자조적으로 웃음 지었다.
“널… 창조리에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다 내 탓이다.”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가는 해명을 보던 보월이 다시 통증이 있는 듯 배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아십니까? 저는 5년을 줄곧 이리 보냈습니다. 그대의 곁에 있으면서 많이 좋아졌지만 그것도 잠깐. 저는 평생을 이리 살 것입니다. 이미 떠나보낸 두 오라버니. 그리고 영원히 고통으로 남을 우리 원이가 있는 한 말입니다.’
순간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며 보월이 말했다.
“그래도 곁에 계셔줄 겁니까?”
보월의 방에서 나와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간 해명은 자리에 앉아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애써 고개를 들어 올려 막아보려 했지만 잠시 후 가려진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쉬라는 해명의 말을 어기고 약방에 가 우마를 돕던 보월에게 설영이 다가와 말했다.
“낭주 잠시 시간 좀 내주십시오.”
약을 달이기 위해 부채질을 하던 것을 내려놓으며 보월이 말했다.
“우의원님 여기 약 좀 봐주십시오.”
“알겠네.”
약방 밖으로 나가자 설영이 보월의 안색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낭주 며칠 동안만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태수님께서 병사들 오전 훈련을 낭주에게 맡기신 것으로 아는데 내 곁에 있겠다니… 설마, 훈련을 중단하신 것이오?”
“낭주께서 약방에 나오시길 고집한다면 이럴 수밖에 없다고. 병자가 없으면 의원도 필요 없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싫다 하시면 억지로라도 데려가라 명 받았습니다.”
그 말에 말없이 입술을 꾹 깨물던 보월이 순간 약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우마에게 물었다.
“들으셨습니까? 내일부터 훈련을 중단한다는 걸?”
우마 역시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들었네. 그래서 내일부터 약방 문도 다 닫을 걸세. 그러니 자네는 내가 허락할 때까지 약방 근처에도 올 생각 말게!”
“그 무슨!”
터져 나오는 화를 간신히 참아낸 채 약방 문을 닫고 나온 보월이 설영에게 말했다.
“방에 가 있을 테니 태수님께 내가 뵙자고 했다 전해주시오.”
“태수님께서 지금 집무실에 계시니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조금 언성이 높아질 것 같으니 집무실 말고 내 방으로. 부탁 좀 드리겠소.”
그 말에 설영이 낮게 한숨을 쉬며 해명에게 가 보월의 말을 전하자 해명이 읽던 문서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답했다.
“앞으로 그리 말 전할 거 없다. 너는 그저 그 아이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아라. 식사랑 약 거르지 않도록 하고. 물러가 보거라.”
“하지만 태수님!”
해명이 말없이 문서에 몇 글자를 적고 곁에 서 있던 무예에게 그 문서를 건네며 말했다.
“이거랑 앞에 쌓인 문서들 다 내가 확인했으니 이대로 처리하라고 하거라. 그리고 식량 창고에 남은 곡식이 얼마나 되지? 이제 슬슬 식량을 풀어야 할 듯한데.”
“작년 전염병과 기근이 심해 식량 창고 한 개에 가득 있는 게 다입니다.”
“일단 성 백성들이 빌릴 수 있는 곡식의 양을 작년보다 줄이고 배급 후 남는 양을 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잠시 해명의 눈치를 살피던 무예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주공, 낭주께서 하실 말이 있으시다니 한번 가 보시는 게”
해명이 차갑게 무예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걸 보니 일이 적은가 보구나. 오늘 을불공 교육도 네게 맡기랴?”
“아닙니다 주공.”
“다들 나가보거라.”
오늘따라 세배는 더 차가워진 해명의 모습에 진땀을 뺀 무예와 설영이 해명의 집무실 밖에서 잇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설영이 말했다.
“사형께서 어떻게 좀 해 보시오. 지금 보월 낭주도 화가 많이 나셨단 말이오. 이리 가면 나만 죽어나지.”
무예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설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지금 주공을 건드렸다간 죽음이다. 그래도 주공보다는 낭주가 덜 무섭지 않겠느냐? 사매 건투를 빌겠다!”
방 의자에 앉아있던 보월이 설영이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설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게… 지금 일이 바쁘셔서.”
“안 오겠다.”
미처 끝맺지 못한 설영의 말을 끝맺은 보월이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삭이려 한참을 애쓴 보월이 조금 진정되자 설영에게 말했다.
“이곳에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했을 때 원이 일로 그분을 떠날 생각은 버렸소. 창조리가 무슨 말로 협박을 해 오든 그분 곁을 절대 떠나지 않겠다 다짐했소. 그런데… ”
잠시 말을 끊더니 입술에 피가 맺힐 정도로 세게 깨물어 감정을 누르곤 말을 이었다.
“왜… 내게 그 정도의 믿음도 없으신 건지.”
말을 마치고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보월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설영이었다. 몇 시진 동안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던 보월이 이내 입을 열었다.
“오지 않으시니 내가 가겠소.”
그 말에 설영이 급히 앞을 막아섰다.
“죄송하지만 방 밖을 나가실 수 없으십니다.”
“자네가 언제부터 이리 내 명을 거역했지? 정녕 죽고 싶지 않다면 비켜라.”
처음 듣는 명령조 어투에 움찔한 설영을 지나쳐 보월은 해명의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서신을 보던 해명이 거칠게 서신을 내려놓았다. 설영이 급히 따라 들어와 말했다.
“죄송합니다. 태수님. 낭주 저랑 나가십시오.”
꼼짝도 안 하는 보월의 모습에 낮게 한숨을 내쉰 해명이 설영에게 가볍게 손짓하자 설영이 급히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해명이 낮게 말했다.
“내 분명 방에 있으라 했거늘.”
“저는 당신의 정혼자지 부하가 아닙니다. 제게 그리 명령하지 마십시오. 만들어야 할 약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약방에 가게 해 주십시오.”
고집스레 버티고 서 말하는 보월의 모습에 기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은 해명이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약? 너 의원이긴 한 것이냐? 우마가 그랬다. 너 지금 위중하다고. 안정을 안 취하면 다시 복통이 올 것이고 그러다 출혈이라도 생기면 죽을 수도 있다고. 그깟 약? 대체 무슨 약이길래! 왜 또 내게 무슨 숨기는 병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게 아니면 무슨 약이 그리 급하다는 것이야!”
“당신 몸!!… 이나 잘 챙기십시오.
보월이 흥분해서 소리친 말을 급히 주워 담았다. 그리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태수님께서 제게 이리하시는 게 절 더 위독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보내 주십시오.”
이해할 수 없는 보월의 행동에 해명이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너는 끝까지 날 믿지 못하는구나. 국상의 집에 가고 난 후로 왜 그리 조급해하는 것이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짓을 당했는지 내게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내가 멀더냐? 그러면 그리 먼 사람 곁에 굳이 있을 필요가 무엇이더냐. 네 뜻대로… 하거라.”
그 말에 분노해 두 눈을 질끈 감던 보월이 해명의 뺨을 매섭게 내리쳤다. 그리곤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끝까지 당신과 함께한다고 했잖아. 평생을 당신의 여인으로 살겠다 했잖아! 그 말이 거짓으로 보였습니까? 이게 연모하는 이들의 신뢰입니까?”
보월의 말에 조금 놀란 듯 맞은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보월을 바라보고만 있는 해명에게 보월이 낮게 말을 이었다.
“집무실에 불쑥 찾아와 언성을 높인 건 사과드립니다. 일 보십시오.”
차갑게 뒤돌아서는 보월을 급히 정신을 차리고 붙잡은 해명이 말했다.
“보월아 내가…”
보월이 해명의 손을 가볍게 떼어냈다.
“오늘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나가 보겠습니다.”
말없이 방을 나가는 보월을 보며 해명이 주먹을 꽉 쥐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해명이 밖에 있을 설영에게 말했다.
“더 이상 보월이 곁에 있을 필요 없다. 네 할 일 하거라.”
해명과의 언쟁 후 곧바로 약방으로 들어간 보월은 달여지다 만 약재의 색과 향을 확인하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약재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눈길을 주며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아무리 여러 가지 약재를 써 봐도 그 약재를 대체할 것이 없으니. 정녕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인가. 이제는 시간도 없는데.”
한참을 약방에서 깊게 고민을 하던 보월이 중얼거렸다.
“그러면… 내일밖에 기회가 없겠어.”
이내 방으로 들어온 보월은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던 중 방 밖에 기척을 느끼곤 말했다.
“태수님이십니까?”
보월의 방 앞에 서 있던 해명이 대답을 하지 않자 보월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보월의 방에 불이 꺼지는 걸 보며 해명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