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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1장


“괜찮겠어요, 도련님?”
“……그냥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적응하기 힘듭니다.”
“그럴까? 그러면 도련님도 예전처럼 주서희 낭자라고 부를래?”
“사양하죠.”
“호호, 부끄러워하기는…….”
호북을 떠난 나와 주서희 교주는 빠른 속도로 사천을 가로지르며 서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화경의 경지에 든 고수와 함께 움직여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동안 풍운대정회의 인원들을 인솔할 때와는 달리, 중간에 휴식을 취할 필요가 없는 등 편한 점이 많았다.
“이 속도로 반나절만 더 달리면 될 것 같은데.”
“예.”
“그렇게 단답형으로만 말할 거야? 앞으로 우리 자주 볼 사이잖아?”
“…….”
“호호, 좋아. 그러면 가볍게 사적인 대화부터 해 볼까?”
“보통 공적인 대화부터 하는 게 먼저 아닙니까?”
“그러지 뭐. 우리 막내 도련님이 원하시면 그렇게 해야지.”
주서희 교주는 조금 더 속도를 높여 내 앞으로 치고 나가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뒷걸음치듯이 경공을 펼치는데도 그녀의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팔짱을 끼며 악동 같은 미소를 입가에 걸고서 내게 물었다.
“막내 도련님.”
“예.”
“끝까지 형수님이라고는 안 하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재미없어라.”
주서희 교주는 살짝 토라진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눈웃음을 치며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빙마련주라면은 말이야.”
“예.”
“막내 도련님을 결코 그냥 두지 않을 거야.”
“그렇겠죠.”
나는 주서희 교주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데 우리 막내 도련님은 무공도 뛰어나고 머리도 좋은데, 거기에 더해 뒷배도 아주 든든하단 말이야. 혼자 있다면 어떻게든 해 보겠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무당파에서 보내고, 도련님의 주변에는 나를 비롯해서 뛰어난 고수들이 많으니 아무리 빙마련주라고 해도 쉽사리 막내 도련님을 도모할 수가 없어.”
“그것 또한 틀리지 않은 말씀이죠.”
“그래. 그렇다면 내가 빙마련주라면 도련님은 힘들어도 그간에 도련님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해 앙갚음 차원에서 제갈세가를 칠 거 같은데, 도련님 생각은 어때?”
“저도 그쪽이 가능성 높다고 봅니다. 제갈세가에 있다고 해도, 나를 제외한 가솔들을 해칠 수도 있고, 제갈세가를 떠나 있을 때 제갈세가가 참화를 입었다는 소식이 제게 닿는다면 적지 않게 저를 흔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 바로 그거야.”
“뭐가요?”
“빙마련주를 비롯해서 나나 막내 도련님도 예상하고 있는데, 아무 대책도 없이 호북을 떠나서 나와 함께 서안으로 가고 있잖아?”
“대책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막내 도련님.”
주서희 교주는 몸을 돌려 내 옆에 나란히 달리면서, 진심을 담아 내게 말했다.
“막내 도련님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제갈세가를 외인이라 생각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제갈세가가, 특히 막내 도련님이 나를 도와 사혼교를 수복하려는 것은 무척 고맙지만 그 때문에 제갈세가가 피해를 보는 것도 원치 않아.”
“말씀드렸잖아요. 대책이 있다고.”
“설마 그 대책이라는 게 서안교에서 일을 크게 벌여서 빙마련이 제갈세가에 신경을 쓸 수 없게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그럼 뭔데? 무당파에 증원을 요청한 것도 아니고, 제갈세가에 숨겨 놓은 비장의 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야. 물론 검협신녀가 아니, 검협신녀 어머님이 남아 계신다한들 화경의 고수 하나만으로는 빙마련을 상대할 수가 없어. 최소한 빙마련에서도 검협신녀에 버금가는 고수를 동원할 테니까.”
“계속 말씀해 보세요.”
“내 생각은 나와 막내 도련님이 서안에서 포착되는 순간, 빙마련이 제갈세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는 거야. 왜냐하면 나와 막내 도련님이 서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제갈세가의 전력에는 큰 공백이 생겼다는 방증이니까. 그리고 빙마련은 그 정도 시간만 주어져도 무당파나 무림맹에서 증원이 오기 전까지 제갈세가에 심대한 타격을 입히고 도주할 수 있을 거야.”
“상식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빙마련의 지휘자도 그리고 주서희 교주님도 말이에요.”
“상식적으로……?”
어려운 질문을 받고 고민하는 사람처럼 주서희 교주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말한 것에는 잘못된 점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제갈세가에 제가 남아 있다면, 빙마련이 쉽게 제갈세가를 도모하려 들까요?”
“그건 아니지. 하지만 막내 도련님은 지금 나와 함께 서안으로 가고 있잖아?”
“맞아요. 하지만 제가 본격적으로 서안에서 활동하기 전까지는 저는 제갈세가에 남아 있는 사람이니까요.”
“무슨 말이야?”
나는 주서희 교주의 질문에 답하며, 더욱 속도를 올려 그녀를 뒤로 한 채 화살처럼 서안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나중에 알게 되실 겁니다. 먼저 말씀드리면 재미없잖아요.”

* * *

호북의 융중산.
정파의 양대산맥인 무당파의 무당산에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숲이 울창한 산이었다. 그리고 그런 무정산의 아래에는 호북 융중현에 새롭게 자리 잡은 제갈세가의 거대한 장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은밀하게 몸을 숨기고 제갈세가의 전경이 훤히 보이는 고지대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일단의 무리 중 한 명이 제갈세가를 슬쩍 훑어보면서 고고한 학처럼 달빛을 받으며 제갈세가를 내려다보는 여인에게 다가섰다.
“연사휘 대호법님.”
빙마련의 살인 인형인 흑주(黑主)들과 같은 복색을 한 백여 명의 무사 중, 복면에 일(一)이라는 흰색의 자수가 놓여진 복면인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제갈세가를 둘러보았지만,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사들을 쉬게 하고, 새벽에 기습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아니면 지금 당장 시작할까요?”
“……일령(一靈).”
연사휘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여자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예, 대호법님.”
“네 눈은 옹이구멍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네 눈에는 제갈운혁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이냐? 네 기감에는 하늘을 찌를듯한 제갈운혁의 기파(氣波)가 느껴지지 않느냔 말이다.”
“……속하는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일령은 연사휘의 말에,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가, 내 눈에만 보인단 말이지…….”
“제갈운혁이 어디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복면 속에서 일령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연사휘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기감을 집중하고 눈을 비비고 제갈세가를 관찰했지만 도저히 제갈운혁의 기세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검과 같은 기도가 느껴집니다. 아마도 제갈세가의 안주인인 검협신녀 남궁수련이겠지요. 하지만 속하는 제갈운혁의 기세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강마 마공효와 동수를 이루었던 제갈운혁이다. 그의 발전 속도로 미루어 봤을때, 지금쯤 검협신녀의 경지를 뛰어넘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네가 그의 기파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천재라지만 상식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막 약관 즈음의 청년이 화경의 고수인 강마와 동수를 이루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인데,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기에 빙마련주님께서 그를 경계하는 것이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이대로 삼 년만 지난다면 제갈운혁은 회귀자들과 함께 빙마련주님께 큰 위협을 끼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할 것이다.”
“대호법님의 말씀대로라면 결코 제갈운혁을 살려 둬서는 안 됩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를 제거해야 하지 않습니까?”
“네 말이 틀리지 않다. 하지만…….”
연사휘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고민에 휩싸였다.
지금은 빙마련주의 충실한 심복이었지만, 원래 연사휘의 출신은 하오문이었다. 연사휘는 일반적인 무림인들과 달리 스스로를 과신하지 않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객관적인 정보를 토대로 전투를 기획하고, 승산을 계산했다.
지금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연사휘는 제갈세가에 도착하기 전에 두 가지 경우의 수를 상정했다.
하나는 제갈운혁이 주서희와 함께 서안으로 떠난 상황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혼교를 돕지 않고 제갈세가에 남아 정천회를 준비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제갈운혁이 제갈세가에 없었다면 연사휘는 주저 없이 제갈세가를 공격하는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그녀가 직접 검협신녀 남궁수련의 손발을 묶고, 그동안 빙마련의 정예세력인 오령대(五靈隊) 중 하나인 일령대가 제갈세가를 쓸어버릴 테고, 뒤늦게 제갈세가의 혈겁을 파악한 무림맹이나 무당에서 지원군을 보낸다 해도, 그들은 초토화된 제갈세가를 볼 수밖에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제갈운혁이 제갈세가에 머물러 있다 해도, 빙마련이 받은 피해에 합당한 보복과 응징을 가하기 위해서라도 연사휘는 이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마치 제갈운혁이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제갈세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빙마련의 응징을 예상했다면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최대한 빙마련을 제갈세가 내부로 끌어들여서 일망타진하는 것이 상책인데, 제갈운혁은 오히려 언제든지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라는 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제갈운혁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강마 마공효와 동수를 이뤘다고 하니, 능히 화경의 경지는 돌파했을 것입니다. 하나, 저와 일령대의 조장들이 제갈운혁의 발목을 잡고, 대호법께서 검협신녀를 상대해 주신다면 남은 제갈세가의 애송이들은 일령대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적당히 피해를 입히고 퇴각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하오문에서 본녀에게 전달해주는 정보가 차단되었다. 아마도 제갈운혁이 손을 썼겠지만, 그로 인해 마교에서 제갈운혁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 도리가 없다.”
“대호법님. 마교에서 제갈운혁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은 그가 마교에서 무력을 쓰지 않았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
일령의 말에 연사휘는 대답 없이 제갈세가를 응시했다.
“그가 만약 마교에서 무력을 썼다면, 어찌저찌 강마 마공효는 꺾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교에서 놈을 결코 몸성히 돌려보냈을 리가 없습니다. 그 말인즉슨, 제갈운혁의 무공은 전보다 강해졌을지언정, 전과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는 방증이지 않습니까?”
“……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네 말이 틀리지 않다. 하지만 제갈운혁은 언제나 상식을 벗어난 존재였다. 지금까지 그가 벌인 일을 생각해 보라.”
“그건…….”
연사휘의 말에 일령의 말문이 막혔다.
“최악의 경우. 제갈운혁이 단신으로 마교의 부교주 강마를 죽이고 천마 위지량마저 패퇴시켰을 수도 있다. 그렇게 마교를 장악하고 하오문의 정보를 차단했다면, 우리가 볼 때는 제갈운혁이 마교에서 아무런 무력시위를 하지 않고 제갈세가로 귀환한 것으로 오인할 수도 있을테니까.”
“그건 너무 억측…… 아니,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입니다.”
“좋아.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지.”
일령의 말에 한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연사휘가 몸을 돌려 일령을 바라보았다.
“직접 제갈운혁을 시험해 볼 수밖에.”

* * *

서안의 패자.
사도팔문의 일좌이자, 무림인들과 백성들의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는 사혼교의 교주전에는 나른한 인상의 젊은이가 눈을 감고 태사의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련주님…….”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천.
아니, 모용천의 몸을 빼앗은 흑주가 조심스럽게 젊은이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를 불렀다.
“본좌의 단잠을 깨울 정도로 재미있는 일인가?”
“……속하의 판단으로는 련주님께서 기다렸던 소식일 거라 여겨, 이렇게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그래?”
빙마련주 단진천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피며 몸을 일으켰다.
“서안에 잠복 중인 사혼교의 편복조와 호북에 있는 연사휘 대호법에게서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호오~ 두 군데서 동시에?”
“예.”
“내용은?”
“그것이…….”
흑주는 단진천에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보고 받은 내용을 입에 담았다.
“연사휘 대호법이 지급으로 보낸 전서응의 내용은 제갈운혁이 호북 융중현의 제갈세가에 머물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 그건 의외로군. 분명히 주서희와 함께 서안으로 찾아와 사혼교의 탈환을 걸고 칼춤을 출 것 같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