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결국, 인연은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렇게 피해 다녔건만. 삼촌, 돌려보내세요.”

“하지만, 하린아…. 그 사람이 어디 사람인지 다 알면서.”

“아니 이 양반이. 아가씨가 물리라면 물리는 것이지. 대통령이 와도 안 보면 안 보시는 분이야. 어디!”

“이 여자가! 태환 그룹에서 나왔다잖아. 우리나라 1위인….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곳이야.”

“그래 봤자 한낱 인간에 불과해.”

“그럼! 우리는 뭐 신이여? 우리도 인간이여.”

“…….”

매화당의 무녀, 민하린.

그녀를 찾아온 이는 태환 그룹의 막내 손주 차윤재였다.

“근데? 뭐 때문에 우리 아가씨를 찾은 거야? 연락 없이 여기까지 찾아온 거래요?”

매화당을 찾기 전에 기본적으로 전화로 예약해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태환 그룹에서 연락이 오면 절대 만나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윤재가 무작정 찾아왔었다.

“신어머니께서 태환 그룹 인간들은 절대로 받지 말라 하지 않았어요? 아기씨도 알고 있잖아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 집과는 절대 인연을 맺으면 안 된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사천댁, 난 그 총각한테 얘기 못 하겠어. 어휴, 눈빛이 보통이 아니여. 호랭이 상이라니깐.”

사천댁이 하린을 쳐다보며 무언의 압박을 했지만, 돌아오는 건 고개만 절레거렸다.

돌아가신 전 매화당 주인이었던 하린의 외할머니는 그녀에게 신신당부의 말을 전했다.

혹시나 태환 그룹에서 누구라도 찾아온다면 소금을 뿌려 내쫓아 버리라는 말이었다.

<어머, 아가야. 너 진짜 소금 뿌리려고? 네가 잘 알잖아? 밖에 저놈, 네 인연. - 선녀>

<알고 있습니다. 선녀님. 하지만, 할머님의 유지를 잘 받들고 싶습니다.- 하린>

<웃기는 소리. 저 남자 너와 실이 이어져 있어. 네가 그것을 모르지 않잖아? - 선녀>

하린은 선녀와 이야기를 나눴지만, 사천댁과 삼촌은 들을 수 없었다.

선녀 역시 전 매화당 주인인 옥희와 지내다가 그녀를 하늘로 보내고 뒤이어 손녀인 하린 곁을 지키고 있었다.

<불러라. 더 이상 일을 그르치지 말아라. - 대신 할머니>

하린은 깊은 한숨을 쉰 뒤, 대신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그를 불렀다.

삼촌이 나가 그에게 한마디 하는데.

“이봐요. 우리 아기씨에게 이상한 눈길 주면 그때는 신들께서 가만있지 않을 거요. 들어가 봐요.”

윤재는 신당으로 들어갔지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발이 내려와 있어서 무녀가 여자라고만 생각할 뿐, 나이도 외모도 분간할 수 없었다.

“만나기가 상당히 힘이 듭니다. 매화당 아가씨.”

“무슨 일로 연락도 없이 찾아오셨을까요? 손님?”

“전 태환 그룹의 차윤재 본부장이라고 합니다. 저희 회장님께서 매화당 주인을 꼭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이유는 저도 알지 못하니 묻지 마십시오.”

하린은 그 이유에 대해 이미 옥희에게 들었기 때문에 물을 생각도 없었다.

“회장님께 전하십시오. 원하는 분은 이미 하늘의 부름을 받아 1년 전에 가셨다고 전하세요.”

“아…, 혹시. 부탁입니다만, 직접 알려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하린은 당황스러웠지만, 다시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죄송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할머니께서 태환 그룹에서 그 누구든 나오면 떠났다고만 전하라 하셨습니다.”

<얘, 쟤 너인 거 알고 있는데? - 선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인 것을 알고 있다니요? 그럴 일 없을 텐데요? - 하린>

선녀와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차윤재는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으로 점점 다가왔고 발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네. 민하린.”

너무 놀란 나머지 안 그래도 눈이 큰 하린은 점점 더 휘둥그레졌고, 저고리를 매섭게 잡으며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무례하십니다. 차윤재 씨.”

“거의 12년 만에 보는 것 같은데? 대학교 2학년 때 그날 이후로는 처음이지?”

하린과 윤재는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와 대학교도 다녔지만, 하린은 졸업하지 못했다.

윤재가 군대 가기 전 대학교 2학년 때 하린에게 해프닝이 있었지만, 그녀는 알아도 모르는 채 해버렸다.

더 이상 시간을 길게 잡아 두지 못할 것 같아서 그녀는 그를 보내려고 하지만, 원치 않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네 할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들어줄 생각 없으니 썩 꺼져라. 그거 건드리면 저 녀석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욕심대로 하다가는 풍비박산 난다.- 대신 할머니>

<할머니, 갑자기. 전 전달 못 하겠어요. 하아···.- 하린>

<전달해야지. 네가 할 일인데. 어서! - 대신 할머니>

“그 땅 건드리면 너에게 화가 닥치니 건드리지 마. 미안해. 갑자기…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럴 것 같더라. 너 참 재밌게 산다.”

“넌, 이게 재밌는 걸로 보이니?”

“아니, 그 뜻은 아니었어.”

“너, 결혼이나 빨리 해. 그리고 여기 절대로 오지 마. 이제 가봐.”

물끄러미 하린을 쳐다보던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당을 나가려고 했지만, 다시 돌아 기어코 한마디를 남겼다.

“어쩌지? 난 여기 자주 올 것 같은데?”

그러고는 신당을 나가 버렸고, 어안이 벙벙해진 하린은 할머니에게 한소리를 해 댈 수밖에 없었다.

<원치도 않는 점을 내놓으시면 어떻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쟤 앞에서 보기 싫단 말이에요. - 하린>

<알려야 했다. 저 녀석은 제 할아버지를 위하는구나. 그놈 핏줄이 어디 가겠느냐마는 똑같군. 그때나 지금이나. 네 할멈이 살아 있었다면 소금을 진작 뿌렸겠구나. 허허허. - 대신 할머니>

“하아···.”

하린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와의 인연이 다시 엮이는 것 같아서 숨이 막혀 왔다.

***

그와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입학식이었다.

그날은 단 한 번도 늦잠을 잔 적 없던 그녀에게 무슨 일인지 눈이 떠지지 않아 곤욕스러운 날이었다.

할머니도 저를 깨워 주지 않아 당황스러웠지만, 첫날부터 지각하지 않으려고 아침도 굶고 뛰어갔다.

“아야.”

“윽!”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뛰다가 두 사람이 부딪쳐 이마가 점점 부풀어 올라왔지만, 하린은 지각하는 것이 더 싫었던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남학생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뒤 강당으로 달려갔다.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나? 어떻게 된 것이…. 수석과 차석이 함께 지각한단 말이냐?”

학생 주임 선생에게 들킨 두 사람은 결국 강당 입구에서 제지당했다.

수석인 차윤재의 입학 선서가 있었지만, 그는 별로 관심 없다며 대표 학생을 차석으로 넘겼고 차석이었던 민하린 역시 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선서를 읽게 했었다.

그것이 더 화가 난 학생 주임은 두 사람에게 벌을 주려고 한 달 동안 교무실 청소를 시켰다.

군말 없이 대답하는 하린에 비해, 차윤재는 반항하기 시작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이건 학생인권조례에 어긋나는 상황 아닙니까?”

“인권? 이놈아, 학생이 지각하는 게 인권이냐? 잔말 말고 한 달 동안 둘이 교무실 청소하고 수업 들어가!”

선생님은 열받은 상태로 하린과 윤재의 머리를 한 번씩 쥐어박고는 강당으로 들어갔다.

이미 입학식은 끝났고, 그들은 반으로 향했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반에 배정되었고, 인연은 이때부터 얽히게 되었다.

***

앞날이 어떻게 될지 깜깜해진 하린은 신당을 왔다 갔다 안절부절못했다.

그와의 인연이 어떻게든 이어지는 것이 못내 싫지만은 않았다.

하린은 윤재를 짝사랑해 왔던 것을 신들도 모르지 않았다.

<아가, 더 이상 거부하지 말아라. 네가 그 아이에게 마음이 크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 선녀>

<운명과 인연은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 대신 할머니>

<근데, 오늘 왜 이리 조용하시답니까? - 선녀>

<술 처먹겠지. 그놈의 술. 뭐가 그렇게 좋다고. - 대신 할머니>

하린이 모시는 신 중에 술을 좋아하는 장군이 있었으니, 그는 가끔 신당에 머물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뵐 수 있는 날이 1년에 몇 번 없었다.

“아기씨, 저 들어가도 됩니까?”

사천댁이 기도를 올리고 있는 하린을 불렀다.

<저, 저. 방정. 기도 올릴 시간에 뭐가 저리 궁금해서 항아리 깨지는 소리를 내는 것인지…. 쯧쯧, 저러니 신을 못 받고 저렇게 있는 것이지. - 대신 할머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사천댁이 없으면, 우리 하린이 제대로 점사도 못 볼 겁니다. - 선녀>

“들어와요. 사천댁.”

“저기, 그 총각이 가면서 예약했습니다. 이번 주말에 4시쯤 온다고 하던데? 어차피 아기씨가 봤으니 예약 잡아도 되는 줄 알고….”

하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윤재를 잘 알고 있었다.

집요하고 고집스럽고 끈질긴 부분이 있어 자신이 해결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갈 사람이었다.

이곳에 발을 들였다는 것은 인연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의 말대로 운명은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옥희도 그 운명을 거슬렸다가 이런 사달이 난 것이었다.

하린의 외할머니, 옥희는 태환 그룹의 회장과 이어져야 했었다.

그 인연이 닿지 못해 대를 이어진 것이었다.

***

“그래서? 지금 네 말은 옥희가 죽었단 말이더냐? 왜? 어쩌다가? 그 여자는 신을 모시는 사람인데.”

태환 그룹 차지환은 옥희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를 꼭 만나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그의 눈앞이 깜깜해져 갔다.

‘조금만 더 살아 주면 좋았을 것을 벌써 갔단 말인가….’

“저도 모릅니다. 1년 훨씬 넘은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 도대체 왜 그 할머니를 찾으시는 겁니까?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인제 와서 찾는다는 것이 멍청하겠지. 하지만, 그 사람을 꼭 보고 싶었다. 네 할머니와 약속했다. 절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찾아가지 않겠다고…. 나는 이 태환에 최선을 다했다. 너는 이해되지 않겠지만, 내 평생 옥희 말고는 사랑하는 여자가 없었다. 네 할머니와 나는 너도 알다시피 계약으로 된 결혼이었을 뿐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찾아봤자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닐 겁니다.”

“네가 가니 누가 있더냐? 옥희 딸이 앉아 있더냐? 많이 닮았니?”

“아니요. 그 할머니 손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 딸은 어디로 가고 손녀가 앉아 있는단 말이냐?”

“아무튼 전 제 일 다 끝냈습니다. 그러니 약속한 그 자리 주십시오.”

“예끼 이놈아, 네가 한 일이 뭐가 있다는 것이냐? 옥희를 데리고 오라고 했지. 누가 소식만 전해 달라 했느냐!”

“죽은 사람을 어떻게 데리고 옵니까! 치매라도 걸리셨습니까?”

차지환은 드디어 그녀를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던 며칠.

그러나 그 꿈은 산산이 무너졌다.

그녀가 벌써 하늘의 부름을 받고 떠났다는 말이 믿기지 않아 원통했다.

진작 찾았어야 할 그녀를 왜 이렇게 떠나갔는지 안타까웠다.

“그… 손녀라도 데리고 와라. 그 아이가 보고 싶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 여자를 봐서 뭐 어쩌겠다는….”

“이놈아! 내가 옥희 손녀도 못 보는 것이냐!”

“하아···. 진짜 노망이라도 난 거야 뭐야?”

“내가 너보다 더 머리가 멀쩡하다. 이놈은 나이를 어디로 처먹었나? 서른다섯 살이나 되어서는 아직도 연애를 안 하고 네놈이 그… 뭐냐…. 남자. 그러니까… 개… 게…. 아무튼 그거냐?”

“게이 말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전 여자가 좋습니다. 단지 운명의 여자를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아니… 만나긴 했지만, 날 피했으니 그냥 내버려 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엥? 여자가 있어? 누구냐? 내가 아는 아이니?”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모르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여전히 절 피합니다. 내가 차윤재인 거 알면서도 모르는 척 기분이 나빴습니다.”

“이놈이 뭐라고 구시렁대는 것이야? 잔말 말고. 땅 알아본 것은 어찌 되었어?”

“그 땅은 안 됩니다.”

“왜!”

“일제 강점기에 많은 사람이 묻힌 땅입니다. 괜히 건드렸다가 무슨 화를 보시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땅이어야 한다. 예전에 옥희가 그곳이 가장 좋은 땅이라고 했다.”

“그놈의 옥희, 옥희.”

“이놈이, 왜 이리 오늘따라 구시렁대는지.”

지환은 윤재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아 버렸다.

“아야! 할아버지. 정말!”

“잔말 말고 그 땅 개발할 생각해 봐. 굿이라도 하면 될 거 아니냐!”

“굿이요?”

“왜? 옛날에는 영혼을 달래 준다고 굿판을 벌였다.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옥희 하는 거 보니 사실이기도 한 듯 보였다.”

“뭐 얼마나 대단한 무당이길래요?”

“쯧쯧, 나도 그쪽은 처음엔 잘 안 믿었다. 옥희가 신내림을 받고 내가 그것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옥희는 우리나라 무형 문화재로 10세 때 신이 내려 온갖 궂은일을 당하면서 살다가 20세 때 신내림을 받았었다.

그녀가 지환에게 이별을 당한 후, 바로 신내림을 받았고 그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신이 하는 일에 인간이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인연이 닿았던 남자 사이에 딸 하나, 아들 하나를 잉태하고 살았지만, 그녀는 엄마로서보다는 만신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마음속에 늘 큰 응어리가 맺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가족과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원해서 무당이 된 것도 아니었고, 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사람들로 인해 어린 옥희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