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델.”

단둘이 있을 때 그가 야, 너, 여자 등 기분 나쁘게 만드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른다면 경계해야 한다. 주위에 보는 눈이 없는데도 순수한 호의만으로 친절해지는 악덕은 있을 수 없다. 난 몸을 빳빳하게 세우며 긴장했다.

“넵, 선배님.”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라 한동안 풀어주었더니 살맛이 나는가 보구나?”

“그럴…… 리가요. 선배님이 곁에 계시지 않아 무척 쓸쓸했습니다.”

“쓸쓸한 것치고는 꽤나 재미있게 놀았더만.”

“장미 황녀님께 휘둘린 날들이 어찌 재미있었겠습니까.”

아부 인생 어언 1년, 난 이제 입에 침 하나 바르지 않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악덕이 내 아부를 아예 못 들은 척하고 내가 하는 말이라면 족족 의심부터 하고 본다는 현실이 조금 힘들긴 하지만, 나는 꿋꿋했다. 비록 악덕이 내 말을 껌 씹듯 씹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적어도 내가 쫓겨나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내 필살기가 먹히기는 먹힌다는 뜻으로 보였다.

“장미가 한 말과는 좀 다른데?”

“아무리 본인이 계시지 않으시다지만 하대를 하기엔 상대가 황녀님 아니십니까.”

“그 마녀가 우리 세라에게 한 짓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과분하다.”

“여부가 있나요. 네.”

“어찌 됐건. 둘이서 아주 잘 놀았다고…….”

“근거 없는 말씀이십니다.”

“서로 맨몸도 보여준 사이라던데?”

“……네?”

손이 미끄러졌다. 아아, 잘못 쓴 글자를 두 줄 좍좍 긋고 옆에 새로 쓰면 분명 혼이 날 테니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 통탄하며 악덕이 한 말을 되새겨보았다. 음, 맨몸을 보여줘? 난 장미의 몸을 보지 못했으니, 이 소문은 반만 맞다. 처음엔 당황해서 손이 삐끗했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조용히 악덕이 들었다는 말을 부정했다.

“아닙니다, 선배님. 황녀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말씀은 절반만 사실입니다.”

“절반?”

“네. 황녀님 쪽만 보신 셈이거든요.”

“장미만, 네 알몸을, 봤다고?”

아. 이게 아닌데……. 눈이 가늘어진 악덕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입가에 지어지고 있는 미소는 2급 경계경보를 울려야 하는 단계로 추정된다. 참고로 경계경보는 3급까지 있고, 숫자가 높아질수록 위험수준이 올라간다. 물론 경계경보 위로는 대피경보고, 이는 순전히 1년 동안 악덕 밑에서 구르면서 생존을 위해 만든 나만을 위해 내가 만든 체계다.

“음, 선배님. 무언가 이상한 상상을 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이상한 상상? 네가 장미 앞에서 수줍게 옷을 벗는, 뭐, 그런 상상?”

“그런 청초함의 대명사인 표정을 지은 적도 없고, 저 스스로 벗은 적도 없습니다.”

“아, 그래. 넌 보는 시선이 있어야 흥분된다는 부류에 속하는 특이한 사람이었지. 그럴 리가 없지. 그러면 스스로 벗지 않고 장미가 네 옷을 벗기게끔 만들었나?”

“두 가지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첫째, 전 그런 변태도 아니거니와, 둘째, 그런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합의에 의한 놀이가 아니라 한쪽이 강제로 덮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끔 유도하는 건가. 그것도 당하는 상대방이 눈치도 챌 수 없도록? 교묘하군.”

“아니라고욧!”

“결과만을 두고 보자면, 장미가 네 몸을 봤다는 말은 사실이렷다?”

내 말을 껌 씹듯 평소에도 잘근잘근 씹어 드시는 네 행실은 잘 알고 있는데, 그래도 사람 말은 좀 들어라……. 솔직히 말해서 내가 장미와 같은 여자끼리 옷을 벗고 침대 위에서 하루 종일 뒹굴든 말든 본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만 아니면 이렇게 비꼬며 물고 늘어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놈은 다른가 보다.

이놈은 화가 나면 날수록 웃음이 짙어진다. 짜증이 날수록 환한 미소를 짓는다. 특히 자신을 열 받게 한 상대방에게 가능한 가장 예쁜 미소를 지어준다. 처음엔 악덕이 웃어줄 때 화가 풀렸나 보다 해서 안심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난 악덕이 웃기만 하면 바로 몸이 긴장한다. 악덕 옆에 아무리 세하라나 힌메가 서 있다 한들, 놈이 제 얼굴을 내게 고정하고 미소를 짓는 상황이라고 가정한다면 이는 그가 가족에게만 보여주는 따듯한 미소를 내게도 잠깐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나한테 화가 났다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악덕은 화나 짜증, 신경질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면 아무리 가족이 같은 공간에 있어도 나를 향해 웃을 사람이 아니다.

처음엔 어이없는 말들을 늘어놓아 기가 막힌 나머지 나도 조목조목 반박했지만 지금은 눈치를 살살 보며 입을 다물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봤는지는 몰라도 장미가 성별을 확인한다고 내 옷을 들춰본 건 사실이고 무엇보다도 저놈이 하하, 웃기 시작하니까 이마와 손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악덕이 눈을 휘며 웃는 모습은 자주 봤지만 소리까지 내면서 웃는 모습은 처음이다.

“아무리 대들어도 내가 웃으며 넘어가주고 장미와 친해지면서 기가 많이 산 모양인데…….”

네놈이 언제 웃으며 넘어가줬냐. 보복할 만큼 다 했잖아. 심지어 편리한 문명의 발달로 서류작업도 타자기를 통해 할 수 있는 걸 일일이 손으로 쓰게 시키면서.

“너와 내가 한 계약에 여자라는 성별을 들키지 않을 것, 이라는 네 번째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 될까?”

“그, 그건!”

순간 머리가 차가워졌다. 맹렬하게 구시렁대던 중얼거림이 멈췄다.

“어이. 그동안 많이 봐줬다고 생각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