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는 괴물이 아니에요

탑 층의 창문을 드르륵 열었다.

보이는 것은 온통 눈 덮인 설산뿐이었다. 높게 솟아 있는 산맥은 바위 거인이 웅크리고 누워있는 것 같았고, 얼어붙은 폭포수가 쏟아지던 그대로 하얗게 늘어져 있었다.

답답했던 속이 탁 트였다.

“이제 씨앗을 창턱에 올려두십시오.”

문밖에서 들리는 저 목소리만 아니었어도,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창문 앞에 있는 책상 위에 씨앗 통이 있었다. 통을 열어 해바라기 씨앗처럼 생긴 것을 한주먹 꺼내 창틀에 뿌리듯이 올려놓았다.

쉬운 일이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한 것처럼 손이 덜덜 떨렸다.

“아무것도 오지 않아요.”

“기다리셔야 합니다.”

경치는 좋은데, 창문을 열어놓아서 너무 추웠다. 열이라도 나는지 숨은 뜨거운데, 추위로 이가 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설마…. 벌써… 시작되었는지요.”

“아니, 아니에요.”

“증상을 숨기시면 안 됩니다.”

“추워서 그런 거예요. 너무 추워서 덜덜 떨다가 이가 부딪쳤어요.”

문밖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집사님은 내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가 너무 심하게 딱딱거렸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못 믿겠으면, 들어와서 확인해 보셔도 돼요.”

“믿겠습니다.”

당당하게 말했더니, 문밖에 있는 집사님은 바로 수긍했다.

냉기에 손이 시려서 손바닥을 마주대고 비볐다. 비비면서 보니, 손가락은 예쁜데 손톱이 길고 지나칠 정도로 날카로웠다.

하지만 괜찮을 거다. 비록 손톱이 분홍색이 아니라 까맣게 변하고 있어도, 손등이 무엇인가가 물어뜯은 것처럼 속살을 드러낸 채 까만 핏줄이 튀어나와 있어도, 이런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서신은 제대로 쓰셨는지요?”

“네…. 당연하죠. 불러주시는 대로 잘 받아썼어요.”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침착을 유지하던 나는 당황했다. 저 문밖에 있는 집사님의 말을 하나도 받아 쓸 수 없었다. 언어는 바로 알아들었는데, 글은 어떻게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서신을 제대로 받아쓰지 못한 것을 들키면 안 된다. 그러면 영원히 이곳에서 나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제가 확인해 봐도 될는지요. 이 문 밑으로 밀어 넣어주시면 됩니다.”

“아…. 안 돼요. 이미 인장을 찍고 접었어요.”

빈 종이 위에 얼른 한 문장을 적었다. 한글로 적었는데, 종이 위에는 알 수 없는 문자로 적혀 있었다. 그 순간 마법처럼 나는 내가 쓴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런 일로 당황하기엔, 그동안 벌어진 일이 너무 많았다. 얼른 인장을 찍고 돌돌 말았다. 종이가 얇고 질겨서 그런지 돌돌 말고 나니, 가는 끈처럼 되었다.

“오염으로 기억조차 잃으셨으니, 아무래도 제가 확인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종이가 펴지지 않아요.”

“제가 요령껏 펼쳐 보겠습니다.”

나를 믿지 못하는 집사님은 집요한 면이 있었다.

“그러다 찢어지면, 서신을 보낼 수도 없을 거예요. 대신, 쓴 것을 기억해서 말해 볼게요.”

목소리를 작게 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조금 전부터 목이 심하게 아팠다.

“대공님 귀환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아니, 귀환을 대공비가 정식으로 요청해요. 음…. 제가 많이 아픈 것 같거든요.”

“잘 들리지 않습니다. 맞게 쓰셨는지 더욱 걱정되는군요.”

차가운 냉기 때문인지 머리까지 아팠다.

도저히 추위를 견딜 수 없어 창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어?”

“왜 그러십니까?”

“정말 새가 오고 있어요. 신기하다. 어떻게 새가 여기로 날아오지.”

“제가 올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서신을 보내야 한다고 해서 비둘기처럼 생긴 전서구 정도로 생각했었다. 이렇게 커다란 새가 멋진 날개를 펴고 날아올 줄은 몰랐다. 햇살보다도 더 반짝이는 금빛을 가진 새였다. 새의 긴 꼬리가 금빛 여운을 남기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그러나 더는 멍하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금빛 새가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곧바로 창으로 날아들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얼른 뒤로 물러섰다.

“얀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으시는지요.”

“….”

대답하지 않자, 문밖에서 땅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가 났다.

“대공 전하께서 선물로 주셨다 들었습니다. 얀은 설산을 수호하는 새이지요.”

창턱에 내려앉은 새는 커다란 날개를 접었다. 꼬리 깃털이 창 밑으로 길게 늘어졌다. 얀은 창턱에 올려놓은 씨앗도 먹지 않고, 파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안녕. 얀.”

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어…. 내가 너의 주인인 것 같아.”

집사님은 얀이 대공비만 부를 수 있는 새라고 했다. 서신도 대공비만 얀의 다리에 묶어 보낼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이 탑 층 밖으로 나가려면, 대공에게 서신을 보내야만 한다.

“그래. 많이 이상하긴 하지. 실은 나도 내가 이상하거든.”

금빛 새 얀은 갸웃하며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무척 영리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씨앗은 먹어도 돼.”

얀은 한 번 더 고개를 갸웃하더니 씨앗을 하나하나 쪼아 먹기 시작했다. 먹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지금입니다.”

집사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씨앗을 먹을 때 얀의 다리에 서신을 묶어야 한다. 얼른 돌돌 말린 서신을 집어 들었다.

말이 쉽지. 낯선 새의 다리에 서신을 척척 묶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씨앗을 다 먹으면 날아갈 겁니다.”

“알았어요.”

얀에게 조심조심 다가갔다.

“다리에 이거 묶을 거야. 괜찮지?”

얀은 신경도 쓰지 않고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왜 먹을 때 서신을 묶으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끈처럼 된 서신을 얀의 다리에 아프지 않게 묶으려는 그때, 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깜박깜박 눈이 깜박이는 소리가 날 것 같은 순간, 얀이 다시 씨앗을 먹기 시작했다.

남은 씨앗이 많지 않았다.

집사님 말대로 몸이 괴물로 변하려는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몇 번이나 헛손질했다.

그래도 간신히 얀의 다리에 서신을 묶을 수 있었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준 얀이 마지막 씨앗을 콕 찍어 먹고는 날개를 쫙 펴며 하늘을 날았다. 높이 높이 날아가며 금빛 햇살 속으로 사라졌다.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걸, 왠지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 저는 내려갔다가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집사님이 가려고 하고 있었다.

“서신도 보냈으니, 내일은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거죠?”

“….”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 건데요?”

집사님이 하라는 대로 다 했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대공 전하께서 오시기 전에 괴물로 변하시면,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집사님은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이 말했다.

“왜요? 기사들이 왜 들어오는 거죠?”

“그…. 비전하께서 그러니까 괴물이시니까. 괴물은 목을 쳐야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집사님이 말하는 괴물로 변하면, 바로 나를 죽일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후다닥 문으로 달려가 잠금 상태를 확인하고 더 잠글 것이 없는지 분주하게 확인했다.

절대로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했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밖에서 열리는 문입니다.”

“이런 제길.”

기운이 다 빠져나갔는지 어질어질했다. 너무 튼튼해서 그 흔한 빈혈 한번 없었기에, 어지러운 게 이렇게 힘든 건 줄 몰랐다.

하아하아 입김이 뜨겁게 얼굴로 올라왔다. 정말로 죽을병에 걸리긴 한 것 같았다.

문에 기대 주룩 주저앉았다.

“저, 괜찮으십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집사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뇨. 괜찮지 않아요.”

“지금…. 증상이 어떻습니까.”

“배가….”

“배가 마비된 것처럼 굳어 가고 있습니까.”

“아뇨. 그것보다 더 심해요.”

“이런, 급히 기사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저 문밖에 있는 집사님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틈만 나면 기사들을 불러오려고 했다.

괴물, 집사님은 사람이 오염되면 괴물로 변한다고 했다. 대공비는 괴물에게 물렸고, 오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탑 층에 갇혔고, 나는 그런 대공비의 몸에서 깨어났다.

“그게 아니고요. 배가 고파요.”

배가 고파서 손이 덜덜 떨리는 거였다.

창문을 닫아야 하는데, 기운이 없어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았어도, 이렇게 춥거나 배고픈 적은 없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몸에 들어와 그래도 살겠다고 애를 쓰고 있는데, 굶주리고 있으니 서러웠다.

그래도 이 몸이 대공비라는데, 먹을 거는 주면서 가둬놔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당장 먹을 걸 가져와요. 맛있는 고기로요.”

당당하게 고기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서러울 땐 고기를 든든하게 먹어줘야 눈물이 나지 않는다.

“지금... 고기라고 하셨습니까?”

“네. 고기요. 한우로…. 아니 이 성에서 제일 맛있는 거로 가져와요.”

그런데 문밖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는 걸 보니, 집사님이 기사들을 부르러 간 것 같지는 않았다.

문에 귀를 대보았다. 숨죽인 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깐깐하고 집요한 저 집사님이 우시는 건 아니겠지.

코를 팽 푸는 소리가 났다. 서러운 건 난데, 도대체 왜 우시는 거냐고.

“고기가 부족하면, 조금만 가져와도 돼요. 고기 질이 좀 떨어져도 되고요.”

고기는 육질이 중요하지만, 저렇게 울 정도면 구하기 어렵거나 엄청나게 비싼 걸 거다.

그래도 고기를 구워 먹을 생각을 하니, 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잘 달궈진 불판에 두툼한 등심을 올리면, 치지 직 소리가 나며 맛있게 익어갈 텐데,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알겠습니다. 구하기 어렵지만, 배는 채우셔야 하니까요. 비전하께서 드시는 거니, 특별히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거로 준비해 보겠습니다.”

아니, 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냐고. 나는 바짝 익혀 먹는 걸 좋아했다.

“그래도 사람고기는 안 됩니다.”

이 아저씨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사람고기가 있기는 해요?”

그냥 궁금해서 물었다.

“아무리 원하셔도 그건 안 됩니다. 대공께서 제 목을 자르실 겁니다.”

집사님은, 내가 이미 괴물로 변해서 고기를 가져오라고 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오해는 빨리 풀어주어야 했다.

“아직 괴물 아니에요.”

“….”

“정말이에요. 아직 멀쩡해요.”

“그럼 왜 피 뚝뚝 떨어지는 고기는 찾으십니까.”

그건 그쪽이 찾았잖아요.

그러나 말하기도 귀찮아 가만히 있었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는지 모르겠다.

열도 심해진 것 같고, 의식도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송곳니 쪽이 길고 날카롭게 변하기라도 하는 듯 욱신거렸다. 배고픈 것도 더 심해졌다.

이제 정말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도 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괴물로 변하려는 것일까.

의식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무겁게 감기려는 눈을 부릅떴다.

의식을 잃으면 절대로 안 된다.

수많은 이야기가 증명하고 있었다. 의식을 잃는 순간, 망하는 거라는 걸.

살기 위해 나는 벌떡 일어났다. 죽더라도, 얼어 죽고 싶지는 않았다. 바람처럼 달려가 창문부터 닫았다.

돌아서는데 다리가 후들거리며 머리가 핑 돌았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잔뜩 깨진 글자들까지 허공에 나타나며 경고등처럼 깜박거렸다.

몸이 낙엽처럼 휘청였다.

그리고 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