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사립탐정 벨. 1981년.

신문에 실린 구인 광고 글을 보고 찾아온 제인은 ‘사립탐정 벨’이란 팻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 신문 광고 구인란을 봤던 그녀는 고민을 하다 결심을 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사람을 아직 구하지 못했으니 구인란 광고 글을 내리지 않은 거겠지?

운이 좋으면 될지 모르겠어.

호흡을 가다듬던 제인이 드디어 용기를 낸 듯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에밀리 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방금 사무실 안에 들어온 동양 여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에밀리는 첫 고객일지 모르는 생각에 환한 미소로 물었다.

“비서를 구한다고 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일을 하고 싶다고?”

“예. 지난달에 신문 구인란에 광고 올린 것 보고 찾아온 겁니다.”

지난달에 올린 구인 광고 글이 그제서야 생각난 에밀리는 솔직히 아직은 직원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신문에 싣지 않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잊고 있었다. 사실 의욕만 가지고 사설탐정 사무실을 열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고객이 오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그런데 지금 이 난감한 판국에 비서 겸 조수로 자신을 고용해달라며 젊은 여성이 스스로 사무실을 찾아왔다.

에밀리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앳되어 보이는 단발머리의 동양 여성을 쳐다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대체 몇 살이지?

“저는 19살입니다.”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짙은 갈색 눈동자의 동양 여성이 싱긋 웃으며 자신의 나이를 말했다.

“그런데 그건 한 달도 훨씬 전에 올린 광고 글인데?”

“그럼 혹시 그동안 사람을 구하셨나요?”

맑은 갈색 눈동자가 살짝 불안하게 흔들리는 걸 본 에밀리는 속으로 갈등했다.

일자리가 필요한 것 같은데 어쩌지? 나는 마음 약한 게 큰 단점이야.

낯선 방문자가 밖에서 더운 바람과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건지 더운 열기가 갑자기 확 몰려오자 에밀리의 목덜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당장 선풍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올해는 7월이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날씨는 마치 7월 말의 날씨처럼 더운 바람이 불고 후덥지근했다.

“이름이?”

“제인. 제인입니다.”

제인? 자신의 어머니 이름도 제인이었다.

“국적은?”

“한국에서 왔어요. 물론 합법적인 이민자입니다. 지금은 시민권자이기도 하니 미국인이네요.”

주근깨 하나 없는 맑은 피부를 가진 동양 여자의 외모가 에밀리의 시각 안으로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총명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어린 시절에 이민을 온 건지 영어 발음에도 전혀 외국인 억양이 없었다. 자신이 묻고 싶은 건 미리 다 대답해줘서 수고로움도 덜어주니 아주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일을 하려고 하지? 마음속으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무실 청소도 하고 걸려 오는 전화 받는 일은 기본이고 어쩌면 현장에 발로 뛰어야 할 일도 간혹 생길 텐데 괜찮겠어?”

“그럼요.”

기대에 찬 제인의 표정을 보던 에밀리의 콧등에 잔주름이 생겼다. 이건 고민이 된다는 의미였다.

“운전은?”

“당연히 면허증도 있습니다.”

“조건은 다 갖춰서 좋은데.”

그런데 아까부터 향긋한 복숭아 향이 계속 그녀의 후각을 자극시키며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게 아닌가.

바로 자신 앞에 서 있는 제인이 들고 있던 라탄 가방 안에서 풍기는 냄새였다. 입 안에서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여름 향을 가득 품은 복숭아의 달콤함이 더운 열기로 덮었던 사무실 공기를 바꾸고 있었다.

“하나 드실래요?”

어째 이 소녀는 독심술을 배운 걸까? 자신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알아차린다.

그래, 어쩌면 이런 빠른 감각이 필요한 직원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당장 들어오는 의뢰 사건이 없더라도 자신이 가진 비상금이 있으니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원이 있는 걸로 보이면 일을 잘하는 곳이라고 의뢰가 들어올지도 몰랐다. 일종의 광고 효과랄까?

빠른 결단을 내린 에밀리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합격. 오늘부터 일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주급은 많이 못 줘.”

“괜찮아요. 복숭아 얼른 씻어 올게요.”

제인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이 나더니 그녀의 손을 마주 잡은 후, 바로 가방 안에서 복숭아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미 세면대와 화장실이 같이 있는 공간이 어디인지 찾아내 걸어가고 있던 제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에밀리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행동도 굼뜨지 않은 것이 매우 영민해 보여서 에밀리는 제인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물이 뚝뚝 떨어지는 깨끗하게 씻겨진 복숭아가 쟁반에 받쳐진 채 에밀리 앞에 놓였다.

초록색 소파에 마주 보며 앉아 각자 하나씩 복숭아를 집어 동시에 베어 물자 향긋한 향이 두 배로 맴도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속담에 먹는 데서 인심 난다라는 말이 있어요.”

“무슨 의미야?”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친해지고 가까워진다는 우리나라 속담이에요.”

제인의 말에 에밀리가 대답했다.

“흠. 그런 의미라면 우리가 친해진 거라는 의미네. 좋아. 함께 복숭아를 먹는 사이니 묻는데 주급이 적은데 혹시 얼마를 원해?”

“원하는 대로 줄 수 있나요?”

“물론 아니지. 주급 300불. 이게 나의 리밋이야.”

“생각보다 많은데요.”

“다행이군.”

“일할 수만 있다면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왜 하필 여기를 택했어?”

“저는 경찰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동양 여성에게 열린 문은 아직도 좁아요. 무엇보다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포기했어요.”

“어쩌다가?”

“어린 시절 나무에서 뛰어내리다가요.”

물론 수술도 해서 경찰이 되는 지원 조건엔 하자가 없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제인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을 하자 에밀리가 싱긋 웃었다. 그녀 자신도 꽤 번잡스러운 아이였으니 이해가 되었다.

“과격한 어린 시절이었군.”

에밀리가 두 번째 복숭아를 집고는 입 안 가득 베어 물었다.

“그런데 사건 의뢰가 많이 들어오나요?”

“응. 바빠.”

물론 이건 거짓말이다.

오픈한 지 3달째인데 아직 한 건도 제대로 사건 의뢰가 들어오질 않지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솔직하다고 세금을 더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일은 경찰과도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에이,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 하지만 경찰에게 정보를 주는 연락책들이 있기는 하지.”

에밀리가 있어 보이는 척, 아는 척하면서 대꾸했다. 정작 그녀는 아직 한 건의 의뢰도 계약하지 못한 신참내기였지만 허세를 부려보았다. 그녀 자신도 강력계 형사를 꿈꾸었지만 심장병이 있는 어머니의 강한 반대에 포기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이 나라는 여자들에게 열린 세상이 아니었다. 그러니 눈앞에 앉아있는 제인 같은 동양 여성에겐 얼마나 불합리한 제도가 많을까 새삼스러웠다.

“그런데 보스.”

“응.”

갑자기 보스라고 부르는 제인의 말에 에밀리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굳이 호칭에 대해 지적하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이 일을 하게 된 거예요?”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외삼촌 덕분이지. 내가 대학 시절에 사립 탐정 일을 하시던 외삼촌이 여름 방학 때마다 나를 조수로 일하게 해주셨거든. 그때 배운 경험이 도움이 돼서 미리 이쪽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증도 따고 했던 거야.”

“아. 그럼 이 사무실도 혹시?”

“응. 우리 외삼촌이 나에게 물려주신 사무실.”

늘 그녀를 독려해주며 독신으로 사시던 외삼촌은 에밀리에게 이곳을 유산으로 남기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또 물어볼 거 있음 물어봐.”

“노래 하나 들어도 되나요?”

“응. 얼마든지.”

다른 질문을 기대했건만 새로 생긴 조수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축음기를 가리키던 제인이 대단한 걸 발견이라도 한 듯 일어났다.

더운 바람이 다시 살랑거리며 사무실 창문 안으로 계속 밀려 들어왔지만 달콤한 복숭아향, 그리고 제인이 방금 틀어준 재즈 음악도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던 에밀리는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뭔가 흥미로운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마음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사건 의뢰가 들어올 건가? 이제 조수도 생겼는데 일이 들어와야 할 타이밍인데 말이야.

그런데 이 복숭아는 왜 이렇게 맛있는 거지. 벌써 두 개째 먹고 있던 중이었다.

혼자 있을 때보다 사무실 안이 꽉 찬 기분이 들며 분주하게 느껴지던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사무실 안을 울렸다.

기대고 있던 소파에서 몸을 앞으로 일으키던 밝은 갈색 긴 머릿결이 어깨에서 출렁이는 에밀리의 초록색 눈빛에 기대감이 그득했다.

어느새 사무실 창가에 놓인 책상 앞으로 걸어간 제인이 전화 수화기를 들면서 응대했다.

“벨 탐정 사무실입니다.”

아! No. No. No. 저 말이 아니야. 그냥 벨 탐정이라고 말해야지. 사무실은 빼고. 이따 연습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제인이 다시 전화를 걸어온 상대방에게 되묻듯이 말하는 소리에 에밀리의 눈이 번쩍 떠졌다.

“사람을 찾아 달라고요?”

에밀리의 귀에 제인이 뱉어낸 단어 하나가 꽂히자마자 그녀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뛰듯이 걸어가 수화기를 낚아챘다. 그 모습이 한 마리의 민첩한 재규어 같았다.

“벨입니다.”

드디어 첫 의뢰 사건이 들어왔다! 그리고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비서 겸 조수도 뽑았다. 환하게 웃는 에밀리의 미소에 제인도 따라 미소 지었다.

#Season1

#1.

제인이 직장을 구한 건 정말 행운이었다. 솔직히 당장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은 대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 열망도 없었기에 무료함을 달래보고자 구인란을

찾던 중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지역신문에 난 구인 광고를 보고 흥미가 생겼었다.

추리소설을 로맨스 소설보다 더 즐겨 읽던 그녀는 늘 경찰 일을 꿈꿔 왔었지만 현실의 문은 매우 좁았기에 어느 정도 포기를 하고 있었다.

체력 검사에서도 당연히 탈락할 게 분명했기에 스스로 꿈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프라이빗 아이즈. 그것도 사설 사립 탐정 조수라니. 날짜를 보니 한 달 전에 올린 구인 광고였지만 혹시나 하고 들러본 곳이었다.

처음엔 당연히 남자가 운영하는 곳인 줄 알고 갔지만 상상을 벗어난 아름다운 여자가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아름답지만 또한 카리스마 있는 눈빛, 행동, 말투가 쉽게 볼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설탐정 같지 않은 사무실 분위기도 매우 마음에 들었다.

축음기와 편안한 느낌의 소파가 있는 탐정 사무실이라니.

아, 창가에 작은 제라늄 화분도 있었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제일 마음에 든 건, 에밀리 벨이 편견 없이 자신을 대해줬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인성과도 관계된 것이라 일하면서 상처받을 일은 별로 없겠구나 싶었다.

물론 잠깐 본 게 다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털털한 성격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보스는 매우 섬세했고 인간미를 잃지 않으려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정말 좋은 보스가 있는 직장을 구한 것 같다는 생각은 자신이 정말 운이 좋았다는 느낌에까지 도달했다.

자, 그나저나 이제 부모님에게 자신이 구한 직장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사무실 이름만 듣고 위험하다고 말리실 게 분명하지만 단순한 비서 역할만 하면 된다고 설득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무엇보다 사립 탐정이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점에서 부모님은 일단 안심하실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전략은 충분히 통할 거라고 자신했다. 빨리 내일 날이 밝기를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