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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어느 가을, 오후 4시 경.'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서울의 남부 순환도로는 변함 없이 주차장처럼 차가 꽉 차 있었다. ''“이놈의 도로는 허구한 날 막히는 거야! 으, 정말 싫어.” ''희재는 지금 직업전선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녀의 직업은 중, 고등학생 과외 선생. 본의 아니게 오후에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대다수의 사람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있다. 지금 역시 첫 수업을 위해 학생 집을 가고 있는데, 남부 순환도로 예술의 전당 앞 도로는 무슨 사고라도 났는지 다른 날보다도 더 막히고 있었다. ''“4시 반까지 아직 30분은 남았으니까, 흠, 이 앞에서 우회전만 하면 안 막히겠지.” ''희재는 차선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어디쯤에서 바꿔야 좋을까 중얼거려 보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혼자 중얼거리는 습관은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서울 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기분 안 좋을 때, 화났을 때, 슬플 때, 기운 내야 할 때 이런 식으로 혼잣말을 하면 없던 기운도 생기는 것이 꽤 효과가 좋아 이젠 희재의 일상생활이 되었다.''강남에서 과외자리를 잡아야 건수에 비해 수입도 괜찮았기 때문에, 그녀는 작년에 거금 500만원을 들여 1500cc짜리 이 중고 소형차를 구입했다. 운전경력이야 대학교 때부터이지만, 차와 친숙해진 것은 1년 남짓이라 운전하는 것도 사실 아직은 신경이 많이 쓰인다. 하지만 지금은 카 스테레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정도로, 간혹 가다 괘씸하게 운전하는 사람들을 보면(비록 속으로지만) 욕 한마디 할 정도는 되었다. ''희재는 바로 앞에서 위용도 당당하게 번쩍거리는 검은색 벤츠가 자신의 소형차와 같이 걸음마 행진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고소하다는 듯 웃었다. ''“후훗! 이래서 세상은 공평하다고 하나 보다. 저렇게 기사까지 달린 좋은 차도 내 소형차와 마찬가지로 굼벵이 걸음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아무리 벤츠라도 벤츠 전용도로가 따로 있는 법은 아니니까. 그래도 조심해라, 신희재! 저런 차는 조그만 흠집이라도 나도 우리 차 한 대 값은 그냥 견적 나온다니까 말이야.” ''다시 옆 차선에 기회가 있지 않을까 사이드 미러로 눈을 돌렸다. 마침 옆에 있던 차가 차선을 바꾸려는지 약간의 빈틈이 생기고 앞차와의 거리도 떨어졌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깜박이 등을 켜면서 차선을 바꾸려고 액셀을 살짝 밟았다. ''퍽! 우지끈!''“이런!” ''계속 사이드 미러에 가 있었던 희재의 눈이 정면을 쳐다보니 움직이는가 싶었던 앞차는 웬일인지 여전히 정차해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희재의 차는 벤츠의 뒷 범퍼를 들이박고 있었다. 운전을 시작한지 어언 8년에 가까워 오지만 경미한 사고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첫 사고를 친 그녀는 가슴이 콩닥거리며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있었다.''“난 몰라. 어떡해?”''너무 놀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핸들에서 손도 떼지 못한 채 그냥 앞만 보고 앉아 있는데, 앞의 벤츠에서 운전사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그제야 희재도 운전석에서 내렸다. 벤츠의 앞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횡단보도가 있었다. 그리고 앞차가 움직여서 출발하려던 벤츠는 보행신호를 받아 다시 정차한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 움직이려던 희재의 차는 그대로 벤츠를 들이박은 것이고……. ''‘어떡해? 이건 100% 나의 실수잖아.’ ''일주일에도 몇 번씩 다니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횡단보도 신호가 있었던 것조차 기억 못하나 싶어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이렇게 추돌 사고가 났을 때엔 뒷 차가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운전 이론까지 떠오르자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황망한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눈앞에 서있는 벤츠 기사에게 말했다.''“많이 놀라셨죠?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죄송합니다. 다 제 실수예요. 차선을 바꾸려다가 미처 정차하고 있던 걸 못 보았어요. 저, 사고처리는 갓길로 움직여서 하도록 할까요?” ''희재는 충격으로 굳어진 얼굴을 애써 펴고는 웃음을 지면서 말을 건넸다. 벤츠의 운전기사는 50대쯤으로 보이는 맘씨 좋아 보이는 아저씨였다. ''“그러죠.” ''“고맙습니다.”''희재는 뒷좌석에 그 기사의 보스로 보이는 사람이 사장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코팅된 창 너머로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밖의 사고 상황에는 초연한 듯 얼굴 한 번 비추지도 않은 채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참 나, 자기 차가 사고가 났는데도 뭘 하느라 관심도 없는 거야. 이런 일은 아랫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건가? 거만하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