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쯧.

눈앞에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태욱은 맑게 광이 도는 구두코를 가만히 살펴보다 흔들었다.

호텔 룸의 밝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번쩍이는 구두 표면에 무늬처럼 맺히고, 가끔은 자신의 얼굴도 보였다.

여자가 온갖 공치사와 녹아내리는 미소로 자신을 향해 떠들고 있는 소리가 지겨웠다.

공치사는 국내 최대 호텔을 세운, 근래 보기 드문 자수성가라는 칭찬이지만, 눈동자 굴리는 거 봐라, 저거.

쯧쯧.

태욱은 길고 긴 자신의 다리를 감싼 비싼 양복 바지의 칼 주름을 따라 심드렁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 끝을 지나 거울처럼 반질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여자 얼굴이 보였다.

천천히 얼굴에서 타고 내려온 여자의 시선이 남보다 넓은 태욱의 어깨와 날씬하고 타이트하게 조여져 있는 허리를 지나 골반 근처의 그 어딘가를 배회했다.

태욱은 다시 무료했다.

분명 소개한 사람은 조신하고 참한 아가씨라고 했던가.

소개팅도 아니고 맞선도 아닌데 아는 집 딸을 소개한다고 할 때부터가 단어 선택이 염병이라고 생각하긴 했지.

조신하다의 뜻이 대놓고 저를 굉장한 물건인 듯 훑어본다는 의미인 줄은 처음 알았군.

뱉어내는 숨에 졸음까지 쏟아졌다.

호텔 바에서 술값까지 자진해서 계산하며 스위트룸까지 쫓아온 여자를 보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상태인 건 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의 생의 목표에 도달해서일까. 아니, 마지막 남은, 가장 최종적인 목표 하나만 남았음에도 긴장감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모든 일이 무료하고 짜증이 났다. 충성스러운 개처럼 이제는 돈이 어디로 가든 스스로를 불려 가고 있는 탓도 있다. 지나치게 쉽게 재력에 권력을 더하고 있으니까.

이토록 쉬운 일을 왜 그리 목을 매었나 싶어 오감이 다 무감했다, 가장 잘 쓰던 폭력까지도.

폭력의 재미란 제대로 써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꿀 수 있는 모습이라 사용하기도 쉽지만, 굳이 쓰지 않아야 하는 상대를 가리는 것도 폭력을 도구로 쓰는 사람의 기술이리라.

말로도, 힘으로도, 돈으로도, 유혹으로도 바꿔 사용하는 그 기술이 어느 하나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저,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하고 싶어요.”

머뭇거리던 여자가 침대의 가장자리에 슬쩍 걸터앉아 한참을 천진과 순진을 떨더니 나름 계산속이 있었나 보다. 태욱은 여자를 바라봤다.

하아, 또 시작이야. 지랄.

“제가 엄한 가정에서 컸고, 또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내가 시킨 것도 아닌 니 사정을 왜 이야기하는데.

자신의 처음이라는 말이 마치 태욱에게 엄청난 기회이고 자랑이 될 거라는 듯 굴고 있는 저 양순한 교만을 굳이 벗기는 수고까지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결론만 말해.”

태욱은 소파에 기대고 있는 등도 무료했고, 느른하게 꼬고 있던 자신의 길고 멋진 두 다리도 지루했다.

다리를 풀어 방향을 바꾸는 사이 여자가 무슨 기대라도 있는지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래서……. 저, 우리 아빠께 오늘 제가 이 호텔에 묵는다고 전화 좀 대신해 주면 안 돼요?”

말을 뱉어 놓고는 눈을 아래로 굴리며 입술을 살짝 뾰족하게 내밀었다. 귀여운 표정으로 노력한 그 역력한 티가 태욱에겐 짜증으로 올라왔다.

“나하고 하루 보내는 걸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은가 봐?”

남녀 사이의 하룻밤 일탈이 소문이 날 수는 있지. 암. 그게 뭐 큰일이라고.

그런데 그걸 굳이 네 아빠에게까지, 그리고 일부러, 굳이 내가 일러바쳐야 할까. 그건 조신한 아가씨가 할 계산은 아니지. 처음부터 결혼으로 못 박고 싶은 너만의 바람이 아니라면.

미안한데. 나, 그렇게 가벼운 남자가 아니야.

어이없는 코웃음이 터졌다.

이미 얼굴이 빨갛게 되어 버린 여자가 눈을 껌벅거리다 점점 눈썹 끝을 아래로 내렸다. 곧 울 것이다. 원래 순서가 그렇다.

“아니, 전……. 이곳까지 데려와 주시길래.”

“말은 똑바로 해야지. 술잔을 쏟아서 카디건이 젖었다면서.”

그것도 네가 쏟아서 내 바지도 얼룩졌으니 세탁비를 받아야 하는 판에. 그나마 술값은 네가 냈으니까 그건 넘어간 거고.

다 마시지 못한 술이 문득 아쉬웠다.

“옷 갈아입어야 한다며 슬쩍 엘리베이터를 턱짓한 건 너였어.”

앙큼하게. 그러니 내가 널 이 방으로 데리고 왔지.

“하지만 아빠가 아시면 저 큰일 나요!”

자신이 벌인 자업자득으로 벌인 큰일을 왜 내게 떠넘기려는지.

태욱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여자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어, 어떻게 해! 벌써 남자랑 같은 호텔 방에 들어온 걸 누군가가 봤을 거예요! 저, 우리 아빠한테 죽어요! 바로 결혼해야 해요!”

“……해야 하면 해야지.”

원래 일은 그런 법이다. 무슨 일이건 당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말하자면 이런 일이 한두 번 일어난 건 아니란 뜻이다.

여자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정말, 결혼해야 하면 하실 거예요?”

“그럼.”

“어흑, 고마워요. 전, 어떻게 하나 했어요…….”

태욱은 룸에 들어올 때 그나마 풀었던 유일한 슈트의 단추를 잠갔다.

“결혼할 남자는 아빠하고 잘 상의해서 고르고.”

“……예?”

여자는 태욱을 빤히 바라보다 확! 인상을 구겼다.

“당, 당신!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고도 괜찮을까?”

대답하기도 귀찮았다. 자신의 스위트가 아니라 40층의 스위트이길 다행이지, 제가 살고 있는 프레지덴셜 스위트로 데리고 갔으면 방의 구석구석 묘사하며 피해자인 척하고도 남을 조신함이다.

하룻밤만으로 여자들은 너무 많은 것을 망상하고 탐욕스럽게 군다. 제 어미가 그래서 결국 죽은 것처럼.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태욱은 복도로 걸어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이제 다른 본업으로 돌아갈 때였다.

최상층의 스위트룸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사장님. 막내 둘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호텔에 계속 있을 거야.”

언제나처럼 사람이 살고 있는 정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그래서 청량감만큼은 최고인 넓은 스위트룸의 문을 열고 들어간 태욱은 일찍 어두워진 도시를 창밖으로 내다보며 자신을 향해 뛰어 들어온 천 비서에게 재킷을 건넸다.

30분 후.

드르르르르르.

태욱은 리셉션실의 테이블 위에서 핸드폰을 들었다.

“만났어?”

-예, 사장님. 바로 앞입니다.

“데리고 와.”

그사이, 사람 없던 공간은 정장들로 가득했다. 그 가운데서 바닥에 뒹구는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퍽!

“아구리 닥치라고, 새끼야!”

“허윽! 수, 숨을…….”

태욱은 통화를 마치며 그만하라고 손을 휘휘 저었다. 비명을 지르던 남자의 얼굴이 흉했다.

“머리에 뭐 좀 씌워 봐. 그래도 다음 손님은 여잔데.”

자신의 돈을 갚지 못한 대기업 놈이 살려 달라며 대신 갚아 줄 거라는 확신과 함께 제 여자 친구의 인적 사항을 건넸다.

원래 주변 사람은 잘 상관하지 않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인적 사항에 눈독을 들일 만한 항목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세계 바리스타 챔피언십 우승자라.

밤도 되기 전에 하늘을 새까맣게 만든 먹구름을 고요하게 쳐다보며 태욱은 앉은 채 잠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아니, 지금 이런 상황을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림자도 없을 만큼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는 10월의 가을 소나기가 지금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예향은 오전에 하고 온 파마머리가 풀릴 것을 걱정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쥐고 있는 핸드폰 속에서 연거푸 들려오는 낯선 여자의 거절 메아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에 노을까지 흔적도 없이 져버린 건지 까맣게 물들어 카페 안으로 찾아오고 있는 저녁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웠다. 거기에 저녁 첫 손님으로 보이는 정장 입은 남자들의 옷이 검은색이라니.

핸드폰을 내려놓고 서둘러 카페 앞 테라스의 붉은 주황색 등을 켜보지만, 이미 문 앞까지 다가온 검은 정장의 싸늘한 분위기를 조명 따위가 어찌할 수 있을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 시각은 단골도 없고 퇴근하는 이도 없고, 더군다나 다들 집으로 저녁 먹으러 들어가기 바쁜 아파트의 천변 쪽 자그마한 카페였다. 혹여 저들이 나쁜 놈들이라고 해도 딱히 도와줄 사람은 오지 않을 거란 얘기였다.

아파트 옆이라고 해도 이미 오래된 단지였기에 카페와 아파트 사이를 서먹하게 갈라놓은 울창한 메타세쿼이아의 울타리를 웅장하고 무심하게 등지고 있기도 했고.

아파트에선 그래서 이 카페를 숨어 있는 맛집이라고 불렀다.

보물찾기할 때의 숨긴 종이쪽지를 찾아내는 기쁨이 있는 그런 ‘숨어 있는’ 맛집이 아니라 정말 아파트에서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한들 절대 볼 수 없는, 거북이가 목을 숨긴 모양처럼 나타나지 않는 맛집이란 뜻이었다.

그런 곳에.

인적은 있으나 시선은 없는 이런 곳에.

저렇게 흉곽을 운동으로 부풀린 것 같은 거대한 남자 가슴들이 검은 정장에 검은 넥타이에 검은 선글라스까지 끼고 우산도 없이 문을 여니.

땡그랑.

평소 반가운 손님의 알림을 알려 주던 금붕어 모양의 풍경이 오늘은 ‘장의사 납시오!’ 하는 기이하고 약간은 서늘한 공포를 대변하는 소리로 들렸다.

……저놈, 당장 버려야겠다.

“어서 오세요.”

그리고 어서 가요. 주문은 제일 비싼 메뉴로 부탁하고요.

속으로 간절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제 딴엔 안 들리길 바라는 마음 절반, 대충 눈치채 주기를 바라는 마음 절반을 담아 미소 지었다.

카페 인생 언 7년 차.

이 작은 카페로 남친의 대학 졸업을 도왔고, 대기업 취직을 뒷바라지했으며, 곧이어 그 남친과 살 신혼집을 장만하는 돈을 벌었고, 마침내 결혼식을 올릴 모든 준비를 끝낸 터였다.

그러니까 정말 이 카페는 끝내주는 카페였다. 그런 카페에 오늘 같은 불길한 손님은 온 적 없었는데.

“뭐 드릴까요?”

정장들은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주문대를 사이에 두고 예향을 빤히 바라봤다.

……뭐지, 정말?

기분이 나쁘냐면, 딱히 그러진 않았다. 의외로 두 명의 정장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눈동자가 안 보이는 점만 제외하면 정중한 태도와 깔끔한 모양새, 그렇지 못한 얼굴의 흉터가 묘하게 정갈해 보였으니까.

그래도 음료를 마시지 않을 분위기를 풍기는 건, 뭐랄까.

카페 10년 차 사장이 보기엔 다만 순수한 불길함이라고나 할까. 그 왜 있지 않은가. 뜬금없이 불길하더니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목격하든가 하는.

눈알을 쉼 없이 굴리며 예향은 이들의 직업이 뭔지 알아맞히기 전에 얼른 메뉴나 주문하기 바랐다.

앞서 걸어들어온 정장이 느닷없이 핸드폰을 품에서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것도 예향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면서.

-만났어?

전화기 저편에서 여유롭다 못해 나태하다고 생각할 만큼 느른한 목소리가 울렸다.

“예, 사장님.”

……사장님?

“바로 앞입니다.”

사장님의 음료를 사러 왔구나, 아하!

예향은 최대한 안전한 상상을 동원했다. 안심하고 싶었고, 그래야 안심할 수 있으니까.

핸드폰의 저편에서 당장이라도 겨울 찬 바람을 불어 보낼 것 같은 고저 없는 낮은 저음의 성량은 분명 작은 데도 예향은 들었다.

-끌고 와.

……누구? 나를?

눈만 깜박거리며 마주 보던 정장 뒤로 다른 정장이 턱짓을 했다. 카페의 유리문을 향해.

모골이 송연해진 예향은 주문대 아래의 시끄러운 경보 버튼을 찾아 더듬거렸다. 버튼이 왜 이렇게 안 잡혀……라고 속으로 애가 탈 때였다.

-끄아아악!

퍽!

-아가리 닥치라고, 새끼야!

-허윽! 수, 숨을…….

뚝.

정장이 통화를 마쳤다.

왜 그런 소리를 들려주지……? 아니, 근데 누구길래?

흔들리는 동공으로 정장을 바라보니 그의 고개 끄덕임이 예향의 눈엔 그래 보였다.

‘나는 네가 조금 전에 전화 건 놈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이. 그리고 그놈이 바로 핸드폰 속 비명의 주인공일 수도 있을 거라는 무언의 협박으로.

안 좋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지만, 불길한 예감만큼은 어떻게 되든 틀리면 기쁠 것만 같은 날이었다.

****

눈앞에서 눈을 감고 있던 장신의 큰 남자가 눈을 떴다. 반듯하게 입은 정장과 슈트의 단추까지 채운 채 삐딱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이렇게 무섭고 차가울 수가 있을까.

양손이 덜덜거려 꽉 잡았다. 그래도 고정되지 않았다.

돈 내고도 못 올,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하다는 이 비싼 호텔 파사드에, 어째서 비 오는 날 이렇게 최상층의 스위트룸까지 오게 됐는지 이유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자신의 카페로 돌아가 없던 일로 치고만 싶었다.

너무 꽉 잡아 손가락이 아팠다.

차라리 손가락의 통증을 느끼는 편이, 저 사내가 입을 여는 순간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덜 무서웠다.

느른하게 올라가는 눈꺼풀의 정갈한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아주 무섭게.

앉아 있어도 사내는 컸다. 방 안의 검은 정장들도 컸고, 심지어 머리에 피 묻은 자루를 쓴 채 벽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도 컸다.

윽.

피비린내가 났다.

일반 사람이 맡기엔 너무 짙어 울렁거렸다. 그런데도 방 안에 있는 이 거대한 사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모시고 가겠습니다.’라고 공손하게 협박한 두 정장도 방 안에 들어와 얼굴을 내놓으니 한 놈은 눈이 없고, 한 놈은 아직 낫지 않은 붉은 상처가 눈 옆에 딱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