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저승 세계 인생살이

한 달 내내 10분씩 일찍 일어나고 있는 강천이다.

출근 준비를 마친 뒤 거울 앞에 선 강천이 아직도 잡지 못하고 있는 돌연변이 흰 수염을 찾아 뽑으려 하지만 성장을 멈춘 것인지 너무 짧아 도저히 잡아낼 수가 없다.

‘검은 녀석들까지 싹 다 죽여버릴까?’

주인을 배신한 채 흰 수염을 감싸주고 있는 모습이 괘씸하여 면도기를 손에 들었지만, 스스로 나서 변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50년 동안 지켜 온 나름 훌륭한 일상에 갑작스럽게 생긴 변화들을 떠올려 본다.

흰 수염의 탄생, 한 달 전부터 보이는 길 건너의 불빛, 그리고 신입사원 그녀.

‘어? 신입사원 그녀?’

평온했던 그의 저승살이에 끼어든 불량 요소 중 가장 불량한 그녀를 잊고 있었음에 놀란 강천이 빠르게 뛰어가 식탁 위에 놓인 달력을 확인하였다.

예고 없이 불쑥 튀어나왔던 그녀가 한 달간의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정식으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이걸 어떻게 잊고 있었지?’

달력의 숫자 위로 마구 겹쳐있는 신경질적인 빨간 동그라미가 그날의 심정이 어땠는지 다시 알려주었다.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것 없이 시작된 하루였다.

그래, 그때는 흰 수염을 뽑으려 애쓰는 이딴 거지같은 상황은 상상도 하지 않던 날이었다.

*****

늘 2시간 일찍 출근하는 강천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상쾌하게 업무에 집중할 것을 생각하며 기쁘게 문을 열었다.

죽은 생 처음, 머릿속 비상등이 요란하게 앵앵거렸다.

[돌발 상황 발생!]

당연히 텅 비어있어야 할 곳이다. 손님 접대를 위해 마련된 테이블에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런데 좀 많이 이상하다?

불을 켜도 움직이지 않고 애써 헛기침을 해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너무 멀어서 들리지 않는 것일까?’

이유 없이 긴장되는 강천은 자신이 이곳의 주인임을 잊은 것처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질수록 또렷하게 보이는 갈색 단발머리가 사람의 머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의아해하며 벽시계를 보니 출근 2시간 전이 맞다.

‘마네킹인가?’

아니다. 손님용 테이블에 마네킹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지난밤, 가장 마지막에 사무실을 떠나며 직접 문단속을 했기에 저것은 분명 저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도둑인가?’

24시간 내내 정문을 지키는 경비대를 지나지 않고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으니 도둑도 아닐 것이다.

아니다. 애초에 도둑이 도둑질은 안 하고 저렇게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손님이 오기로 되어있었나?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다른 나라 저승국에서 방문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엔 영업부에서 마중을 나가니 손님도 아닐 것이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지 말라는 뜻으로 일부러 뒤꿈치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다가가지만, 여전히 미동도 없이 곧은 자세로 앉아 있다.

귀신? 아니다. 여기가 저승인데 귀신은 무슨 귀신이란 말인가?

문득, 얼마 전 자기계발 도서에서 보았던 피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피하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그래. 저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다. 저것은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난 나의 일만 하면 된다. 저것은 그냥 뭔지 모를 저것일 뿐이다!’

늘 같았던 일상의 변화에 자동적으로 거부감이 생겼기에 무시하고 지나치기 위한 자기 암시를 연달아 외었다.

목적지인 자신의 의자에 시선을 고정하고 최대한 시야를 좁힌 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걸어나간다.

‘젠장!’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앞만 보고 걸으려 했으나 그것을 지나는 순간 제어에 따르지 않는 눈동자가 또르르 그것을 향했다.

돌아갔던 눈동자를 빠르게 복귀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찰나의 순간임에도 많은 것이 뇌로 전달되며 걸음을 멈추게 한다.

자고 있다. 허리에도 좋고 목에도 좋을 것 같은 아주 모범적인 자세로….

미세하기 떨리는 뺨을 보니 마네킹은 아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응?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그래,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자고 있다.

작게 들려오는 쌔근거리는 숨소리와 입가에 번져있는 기분 좋은 미소.

“쌔근쌔근.”

‘응? 쌔근쌔근?’

역시 졸고 있다!

‘좋은 꿈이라도 꾸나? 입가에 미소를 잔뜩 퍼트리며 졸고 있네? 대한민국 저승국 사무실에서? 귀신? 마네킹? 도둑? 이런 건 다 아닌 것 같고 최첨단 인공지능 로봇? 아닌데? 내가 개발 혁신부 부서장인데? 저런 건 만든 적 없는데?’

짧은 순간 많은 상상이 펼쳐졌지만, 어느 하나 그럴싸한 것이 없다.

다시 한번 자기계발서의 문장을 떠올린다.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자. 생각하는 것을 피하자. 피하는 것을 생각하자. 생각을 생각하자. 뭐? 뭐라고?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늘 차분했던 강천의 정신이 이상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망가져 버렸다.

‘50년이란 긴 세월 동안 겪어본 적 없었던 돌발 상황에 의한 충격인가?’

고장 난 뇌가 보낸 이상 신호에 요동치는 심장이 쿵쾅거린다. 마치 청진기를 본인의 심장에 붙이고 듣는 것처럼 선명하다.

느껴본 적 없는 불쾌한 감정에 놀란 강천이 허둥대며 빠르게 걸어 자리에 앉았다.

체한 사람처럼 등받이에 머리를 붙인다.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으며 천천히 심호흡한다.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모습이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윤기가 흘러 반짝반짝 빛나는 연한 갈색의 단발, 정확한 각도를 계산하여 그린 듯 오뚝한 콧날, 뽀얀 볼 위로 미세하게 떨리는 솜털까지 모든 것이 선명하다.

맑은 분홍빛의 얇은 입술이 만드는 미소는 단잠에 빠진 아기 천사를 보듯 따스하여 경이로웠다.

‘이게 뭐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 반응이 불쾌하다.

더 놀라운 사건은 모니터 너머로 고개를 살짝 올려 회의용 테이블을 보는 순간 일어났다.

‘사라… 졌다? 헛것을 보았던 것인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강천이 빠르게 마른세수를 하며 눈을 끔뻑거렸지만, 정말로 아무도 없었다.

“강천 부장님?”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강천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깜짝 놀라며 얼음이 되어버렸다.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그대로 눈동자만 살짝 움직이니 조금 전까지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것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음이 되지 않은 유일한 신체기관인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스캔을 시작한다.

맑다. 신비로운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 전까지 자다 일어난 탓인지 지나치게 촉촉했다. 마치 지중해에 반사된 빛처럼 에메랄드색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강천을 녹인다.

“누구… 시죠?”

당황스러움에 굳어버린 표정을 풀지 못하고 묻는 강천과 달리 그녀는 입술 끝을 씰룩거리며 웃음을 참으려 애쓰다 실패한다.

“푸하하하하. 진짜네 진짜! 어머~ 이 수염은 다 뭐래요? 아웅~ 지저분해~ 수염은 왜 길러요? 못 알아볼 뻔했잖아요~ 미쳤나 봐. 정말~”

“네? 저를… 아세요?”

“저를 아세요? 라구요? 뭐야~ 이게~ 아~ 진짜 눈물 난다. 눈물 나~ 저를 아세요? 꺄하하하. 완전 재밌어! 완전 신기해!”

‘어? 운다?’

입으로는 재밌어 죽겠다며 깔깔거리는데 토끼 같은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뽀얀 뺨을 타고 내린다.

당황한 강천은 주변만 두리번거릴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시 얼음이 되어버렸다.

“아웅~ 참을 수가 없넹~ 놀랐죠? 갑자기 울어서 미안해요?”

여전히 얼음이 된 상태인 강천은 최대한 머리를 굴려 그럴싸한 가설에 접근해 본다.

그에게 반한 여직원들이 접근하는 순간은 종종 있었다.

물론 등장이 좀 많이 이상하고 처음 보는 얼굴이기는 하지만 타부서에서 근무하는 직원들까지 모두 알 수는 없으니 그중 한 명일 수도 있겠다.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나의 매력에 이른 시간부터 얼굴 한 번 보려고 기다린 건가? 보자마자 너무 기뻐서 눈물이 흘렀고?’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며 수염을 쓰다듬는 강천이 입꼬리를 올려 거만한 미소를 짓는다.

그때, 눈물을 멈춘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턱밑까지 바짝 다가왔다.

조금만 움직이면 닿을 듯 바짝 붙어 웃는 그녀가 천천히 얼굴을 움직이며 강천의 얼굴을 훑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간지러운 강천은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또 한번 얼음이 되었다.

심장이 요동친다.

잠깐만 시간을 내달라며 다가오는 여직원들은 쉽게 밀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이상한 사람 앞에선 말도 안 되는 생각만 머릿속을 떠다니고 심장이 미친 듯 쿵쾅거린다.

뭐 하는 짓이냐 소리칠 상황이 분명한데 평소와 전혀 다른 자신의 모습이었다.

“진짜 모르는구나? 그래도 내심 기대했는데 실망이다~ 내가 누군지 정말 모르는 거죠?”

최대한 정신을 차리기로 한 강천은 일부러 무심한 척 까칠하게 답한다.

“네. 모릅니다.”

“모르면 안 되는데요?”

“네?”

“으이구~”

입술을 찌부러트린 그녀가 작은 손으로 주먹을 쥐며 꿀밤 때리는 시늉을 했다.

평정심을 되찾으려 했던 강천의 계획이 수포가 되었다.

돌발 행동에 놀란 강천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리며 등받이에 몸을 밀착시켰다.

“이… 이게 뭐… 뭐 하는 짓입니까?”

도무지 기억에 없는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려 하고 있다.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아니, 새하얗게 뽀얀 피부의 어린 여자아이가!

그때였다.

그녀가 뭐라 말을 하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에 이상이 생긴 것인가?’

“크음.”

아니다. 직접 낸 헛기침이 들리는 것을 보니 그녀가 소리를 내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저승국 회식 때 젊은 녀석들이 게임을 하자며 맞춰보라고 했던 것처럼 입 모양만 뻐끔거리는 그녀가 보였다.

‘뭐 하는 짓이지?’라고 강천은 생각했고 ‘왜 이러지?’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 설명을 들은 바 있는 그녀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다. 강천만 홀로 어리둥절할 뿐이다.

“에이~ 어쩔 수 없네요! 신입사원!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된 신입사원 한다빈이요!”

답답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뱉은 그녀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을 소개했다.

“네? 신입사원…. 아~ 신입사원… 네? 신입사원이요?”

정체를 알 수 없던 그녀가 정체를 밝혔다. 한데, 이건 더 말이 안 된다!

너무도 태연한 그녀였기에 강천 역시 태연하게 말이 나가려 했지만, 정상적인 상황이 아님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신입사원이라고요?”

“이야기 못 들었어요? 오늘부터 출근하기로 했는데요?”

신입사원이 인사과도 거치지 않고 이렇게 일찍 와있다고? 그리고 같이 일하게 되었다고? 부서장인 나도 모르는 신입사원이?

“누군지 모르면 안 된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아~ 그거요? 전생에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고 졸졸 따라다니며 매달리던 ‘나’님을 모르면 안 된다는 거죠!”

또다.

‘아~ 그거요’라는 말만 툭 던지고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린다. 그 행동이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는 확신이 선 강천의 미간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더는 이상한 장난질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은 그가 애써 딱딱한 얼굴을 만들며 평소의 까칠한 모습으로 돌아와 차갑게 말을 뱉어낸다.

“금붕어입니까? 신입사원이라는 분이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자리로 돌아가서 대기하세요. 인사부장 출근하면 확인할 테니 돌아가서 기다리세요!”

정색하고 화를 내는 강천의 모습이 이해는 되었지만 가장 답답한 사람은 그녀였다.

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알지만, 하고픈 말을 전하지 못하니 속이 답답해 터져버릴 것 같다.

예상은 했다. 알아보지 못할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으면서도 화가 난다.

직접 만난다면 흐릿하게라도 자신을 기억해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는데 정색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그가 얄미웠다.

‘이걸 콱 그냥….’

전할 수 있는 말만 속으로 중얼거리는 그녀가 뿌드득 이를 갈았다.

“오늘부터 개발 혁신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부서장님이 모르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왜 화내요? 저야말로 기분 나쁘네요? 저승국 부서장님들은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나요?”

자신의 잘못은 생각지도 않는지 반대로 목소리를 키우는 그녀였지만 더는 끌려다니고 싶지 않은 강천은 더욱 차갑게 답했다.

“그러니까 뭐가 어디서 잘 못 되었는지 확인이 필요하니까 기다리시라는 겁니다. 그쪽이 입 모양만 계속 벙긋거리니까!”

“그쪽이 아니라 한다빈! 한다빈이라구요! 한! 다! 빈!”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게 그렇게 큰 잘못일까? 자신의 이름을 석 자를 큰소리로 외친 그녀가 씩씩거리며 째려본다.

적반하장격 반격에 놀라기도 하였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은 동그란 두 눈을 본 강천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며 기세가 한풀 꺾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