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톡, 톡, 톡, 톡.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반복되는 소리와 함께 흑판 위에 흩어지는 백색 글자들을 호(號)는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칠판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숫자와 공식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공책에 옮겨 적느라, 급우들의 고개와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바쁘지 않은 것은 호뿐이었다.

‘500원짜리 동전 한 개와 100원짜리 동전 한 개를 동시에 던질 때 앞면이 나오는 동전의 합을 확률변수……, 표준편차…….’

칠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글씨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호는 턱을 괸 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림자 하나 없는 텅 빈 운동장 위로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니, 방학을 기다리는 갈급함이 더욱 밀려왔다. 조하(早夏, 음력 4월)가 지난 지 두 달이 넘었는데, 겨우 기말고사가 끝났을 뿐이었다.

“하!”

호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금 누구야?”

톡, 멈춰버린 분필소리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호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그제야 고요함을 의식한 호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으!’

갑자기 마주치게 된 날카로운 눈빛에 호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 말았다. 어느새 호의 곁으로 다가선 수학교사 권이슬이 그녀를 매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호, 너 뭐하냐?”

이슬의 눈이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공책에서 얼굴로 향하자, 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뜨거운 여름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정말 해도 너무한다, 너무해……, 흑.”

억울한 마음에 호는 혼자 구시렁거리면서도 손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수학시간에 멍하니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호는 방과 후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하는 대신 1층 상담실로 불러내려와, 그놈의 확률변수와 표준편차에 대한 문제를 스무 장 넘게 써내려가고 있었다.

“오늘 안에 스물다섯 장을 다 써내지 못하면, 내일도 이곳에 불러내려올 줄 알아!”라는 이슬의 협박 아닌 협박에 마음만 더 조급해졌다.

“이슬은 무슨 이슬, 이슬은 영롱하게 빛나야 이슬이지, 권이슬, 이 마녀!”

“풋!”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밤,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확신한 상담실 안에서 들려온 낮선 소리에 호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스윽, 상담실 한편에 세워진 파티션 뒤에서 나타난 검은 인영에 너무나 놀란 호는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오른손에 쥐고 있는 연필 끝만 내려다보았다.

드르륵, 의자를 끄는 소리와 동시에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가 돌려졌다. 그리고 그 소리를 만든 주인이 호 앞에 바짝 다가와 앉았다.

“미안, 많이 놀랐나 보네?”

말을 하는 걸 보니 귀신이 아닌 사람임에 분명했다. 바짝 굳어 있던 호가 고개를 채 다 들지도 못하고 눈을 치켜뜨자, 그 녀석이 있었다. 권이슬의 사촌동생, 권리오가.

리오는 눈앞에 앉아 있는 여학생의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그녀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돌았다.

할머니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는 소식에 급히 한국에 들어왔다가 사촌누나인 권이슬의 계략에 속아 엉겁결에 올봄부터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해외에서 리조트 사업을 하고 있는 부친을 따라, 그가 세이셸로 간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단 반년만이라도 곁에 두고 싶다’는 할머니의 간절한 고백에, 리오는 세이셸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찬 도심에서 사는 것도 모자라, 하루에 반 이상을 이 회색빛 건물 안에 갇혀 지내는 것이 그에게는 쉽지 않았다. 공부에 그리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는 수업에 야간자율학습까지 하루 12시간 이상을 책상에 앉아 있을 인내심도 없었다. 반년만 이곳에 머물다 떠날 전학생이라고 해도, 규율은 규율이었기에 교칙을 지켜야 했다. 가끔씩 오늘처럼 일탈을 실행에 옮기기도 하지만 말이다.

“뭐하냐?”

한 시간 전 상담실로 들어온 그 순간부터, 여학생은 중얼거리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어내려 갔다. 처음에는 수학 공식을 외우나 싶었는데, 한숨 섞인 불평 속에 권이슬의 이름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그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얼핏 내려다보니, 이슬의 수업 시간에 딴 짓을 한 벌로 깜지 쓰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과목도 아닌 수학 선생이 깜지를 내다니, 평소 이슬의 성격을 아는 리오는 앞에 앉아 있는 이 여학생에게 동정심마저 느꼈다.

리오의 시선이 여학생의 교복 가슴팍에 꽂힌 명찰로 향했다.

“이호?”

권리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호가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명찰을 가렸다.

“푸하하하!”

예측하지 못한 그녀의 행동에 리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흥미를 느낀 그가 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귀밑까지 짧게 자른 단발머리에, 외꺼풀이 진 동그란 눈, 갸름한 코선 아래 있는 얇은 입술까지 제법 귀엽게 생긴 인상이었다. 하지만 세이셸에서 함께 학교를 다니던 동급생에 비하면 그녀는 어려 보이기만 했다. 동급생이라기보다는 여동생 같은 느낌.

“너 몇 살이냐?”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댄 채 자신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리오의 장난기 어린 표정에 호는 움찔했다.

‘아, 재수가 없으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권이슬 때문에 깜지를 쓰는 것도 모자라 사촌동생인 권리오에게 권이슬 욕하는 것을 들켰으니, 깜지를 몇 장 더 쓰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왜……에?”

정확한 대답을 피하는 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호의 눈빛을 보는 순간, 리오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이…… 호, 너 나랑 한 달만 사귀자!”

‘뭐?’

장난기가 가득한 권리오의 입에서 흘러나온 문장의 주어, 목적어, 서술어의 의미를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한 순간, 호는 자신의 이름을 가린 두 손을 심장 위에 올려둔 채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

열려있는 창문 너머로 저 멀리 짙푸른 바다가 출렁인다. 찰싹찰싹,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창문가로 걸어간 호는 두 손으로 창틀을 짚고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후에는 비가 내리지 않을 것 같았다. 가는 손목 위에 걸어놓았던 고무줄로 짧은 단발머리를 그러모아 묶고, 2층 창문을 닫았다. 집을 나서기 전, 식탁 위에 올려놓은 찬합과 카탈로그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송정해수욕장 한편에 있는 서핑학교 건물 옆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호가 바구니에 들어 있던 찬합과 카탈로그를 들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오디오에서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L'Estate)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빠, 저 왔어요.”

그녀의 맑은 목소리에 컴퓨터 앞에 앉아, 여름방학 서핑학교 신청자 명단을 확인하고 있던 이규가 고개를 돌렸다.

“오호, 호야 왔니?”

“네, 식사하세요.”

딸의 말에 자판을 두드리고 있던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한여름 바닷가에 비발디는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호가 찬합을 펼치고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앉은 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여름인데?”

“마지막에는 천둥과 번개가 치고 모든 것을 순식간에 쓸어가 버리잖아요.”

어린 딸의 음악적 해석에 규는 피식 웃었다. 교향악단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제 엄마에게 어릴 때부터 받은 음악교육이 제법 효과를 본 모양이었다.

“여름이 덥기만 하면 재미가 없지.”

수저로 흑미(黑米)가 섞인 잡곡밥을 입안 가득히 퍼 넣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호야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보드는 뭘 할지 정했니?”

규가 젓가락질을 하며 눈짓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카탈로그를 가리켰다.

“음……, Purple peppa 보드가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요, 너무 비싸서…….”

올여름, 열여덟 번째 생일선물로 호에게 롱 서핑보드를 사주기로 약속한 규는, 가지고 싶은 것을 정하고도 비싼 가격 때문에 망설이는 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허락의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