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소녀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거실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실한쪽 벽면을 차지한 카우치에서 나오는 따스한 불빛과는 정반대의 냉랭한 기운이 집안 전체를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보라색의 포근한 빛을 뿜어내는 소파에 유리탁자를 가운데 두고 엄마와 모란꽃처럼 화려해 보이는 여자가 서로 한치의 빈틈도 없이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는 처음이다. 젊고 아름다워 보이는 여자가 엄마를 향해 당당히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돈? 아니면 이혼?''얼핏 소녀의 얼굴에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냉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고요한 정물같은 엄마와 화려한 색채의 칼라사진 같은 여자는 서로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이윽고 여자의 입이 다시 열리는 순간 소녀는 주의를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흥미로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이혼해 주세요. 뱃속에 아이, 정식으로 나와 그이 앞으로 호적에 올리고 싶습니다. 사모님 대신 사장님의 외로움을 달래드린 건 바로 저예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거구요. 구차하게 이런 생활을 계속하실 필요가 있으신가요? 전 절대 제 아이 사생아로 만들고 싶지도 않고 남의 호적에 올리는 일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알아서 물러나 주세요.”''“…….”''그 여자의 당당하다 못해 건방지기까지 한 경고를 들으면서도 엄마는 한마디의 응수도 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자신의 나이가 어리지만 지금 저 여자의 행동이 어이가 없다는 것쯤은 알 나이였다. 엄연히 가정이 있는 남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인 주제에 어떻게 저리 당당할 수 있을까? 갑자기 치솟는 분노에 뛰어 내려가려던 소녀의 행동은 이어진 엄마의 움직임에 도로 주저앉혀졌다. 조용히 그 여자 앞으로 내밀어진 봉투를 보는 시선에 궁금증이 서렸다. 여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새빨간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