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남자

해수는 멀리서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바람에 막 들어 올린 잔을 달그락 차받침에 떨구고 말았다. 남자의 날카로운 눈빛은 막 놓친 새끼 사슴을 발견한 사자의 그것과 흡사했다.

“이제야 찾았군.”

해수 바로 앞까지 온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으르렁댔다.

“……?”

남자의 등장에 몇 달 후면 해수의 시어머니 될 박영애 여사가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해수가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자신의 곧은 눈썹을 못마땅한 듯 휘었다.

“그런 식으로 달아나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어?”

“나는…….”

해수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저절로 떨렸다.

이 남자는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왔을까? 그날 난 분명히 모든 흔적을 지웠는데……. 뭐가 잘못됐을까?

“누구?”

영애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녀는 이것들 봐라? 하는 눈빛으로 해수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알아? 뒤통수치는 거. 그거 기분 아주 더럽거든. 그런데 당신이 내게 그걸 했지.”

남자가 영애의 물음에는 대꾸도 않고 해수만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보시다시피 제가 좀 바빠서요…….”

해수가 덜덜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는 이렇게 부탁했다. 아… 제발 좀 가줘요…….

“바쁘다고? 지금 장난해?”

남자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해수 앞에 앉은 영애가 깜짝 놀라 표정을 굳혔다.

남자의 분위기가 심상찮아 보였는지 카페에 있던 손님과 직원이 모두 이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

“이봐요. 대체 누군데 여기서 이렇게 행패죠? 우리 아이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해요. 진정하고 앉아서 얘기해요.”

영애가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남자에게 명령했다. 그녀가 보기에 남자는 이런 곳에서 큰소리를 낼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의 외모와 차림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어머니. 이분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어머니?”

안절부절못하는 해수를 보다가 남자는 그제야 겨우 해수 앞에 앉은 영애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라는 말이 그의 시선을 끈 모양이었다.

“죄송한데…… 지금은 가 주시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요?”

해수가 사정했다. 이 남자와 그날 무슨 짓을 했는지 앞에 앉은 영애가 알게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녀의 등과 이마에는 이미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좋아. 그럼 연락처나 주시지.”

남자가 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휴대폰을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열었다. 이 남자를 보내려면 빨리 휴대폰을 내줘야 한다. 그런데 떨림 때문에 휴대폰이 자꾸만 손에서 미끄러졌다.

“여… 여기요.”

해수는 간신히 움켜잡은 휴대폰을 남자에게 건넸다. 하지만 남자가 그것을 받기도 전에 영애가 먼저 낚아챘다.

“시어머니 앞에서 이러는 거 아니지.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는 해도 말이야.”

영애가 무서운 얼굴로 쏘아붙였다.

마주 앉은 해수의 이마에서 맺혀있던 식은땀이 기어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시어머니? 이분이 시어머니라고?”

이런 젠장!

남자의 표정에 경멸이 어렸다.

“그래요. 내가 이 아이 시어머니예요. 그러는 그쪽은 누구죠? 우리 아이가 그쪽에게 뭘 잘못했나요? 뒤통수를 쳤다고 했던가?”

“시어머니라면 결혼한 유부녀란 소린가?”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눈빛으로도 사람을 벨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이 여자에게 치명상을 입히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직은…… 아니에요.”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이었다. 불과 몇 달 뒤면 영애는 해수의 시어머니가 될 터였다. 법적인 절차만 남은 관계이니 아직은 아니다, 라는 말은 그저 말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아직은 아니다? 그럼 지금은 예비 신부란 소린가?”

남자의 질문은 집요했다.

“그래요. 그러니 이제 댁의 신분이나 밝혀 보실까요?”

남자의 질문에 대답한 건 해수가 아니라 영애였다.

영애는 성정답게 촉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촉이 두 사람 관계가 심상치 않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잘난 것도 없이 거만하게 구는 해수가 영애는 늘 탐탁지 않았다. 아들 영우가 이런 볼 것도 없는 여자에게 홀딱 반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직 의원 배지도 달지 않은 예비 사돈에게 지나치게 기대하는 남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영애의 심술은 조그만 꼬투리라도 잡고 싶었다. 그 꼬투리가 파혼의 씨앗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해수의 꼬투리가 생기나 싶었다.

“설준혁입니다.”

남자가 덤덤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름 앞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는 사람은 영애가 알기로 이 남자가 처음이었다.

“설준혁? 설마 SY 그룹 그 설준혁은 아니겠죠?”

영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SY 그룹은 태산이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그런 곳이었다.

“절 아십니까?”

준혁이 거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다마다. SY의 차기 대표가 될 사람을 내가 모를 리 없지.”

영애의 표정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그렇습니까?”

“그렇죠. 아닌가요? 재계엔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났던데 겸손하기까지 하시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앉아요. 앉아서 찬찬히 얘기 들어 봅시다. 우리 며느리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이에요.”

영애의 불쾌감이 호기심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태산으로서는 이 남자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좋을 게 없었다. 영애의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어머니…….”

해수의 얼굴은 이제 거의 흙빛이었다.

이 남자를 앉혀서는 안 된다. 이 남자와 저지른 일을 영애가 알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아버지가 알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

해수의 심장은 누가 움켜잡기라도 한 것처럼 조여 왔다. 숨이 몹시 가빠졌다.

“그러는 여사님은 누구십니까? 혹시 제가 아는 분입니까?”

준혁은 딱히 큰 관심은 없다는 듯 물었다.

해수의 처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느긋했다.

“난 태산 그룹이에요. 들어 봤을지는 모르겠지만.”

태산 그룹이라면 준혁도 들어 본 적이 있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재무 구조가 탄탄해 상장된 지 불과 10년 만에 중견 기업으로 올라선 기업이었다. 최근에는 IT 방면으로도 사업 확장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라 들었다.

“태산 그룹이라…… 그렇군요.”

준혁이 해수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태산 그룹의 며느리가 될 여자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분노가 물러난 자리에는 강한 의문이 자리 잡았다.

“좀 앉지 그래요? 올려다보려니 목이 다 아프군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애는 이런 인연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됐습니다. 누군지는 알았으니 지금은 일단 물러나죠.”

하얗게 질린 해수와 시선을 맞춘 준혁이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태산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다 털어낼 수 있었다.

“누구니?”

준혁이 자리를 뜨자마자 영애가 표독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끈적한 무언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설준혁이라고 방금…….”

“그건 나도 들었어.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잖아. 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니?”

영애의 짜증에 해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어설픈 거짓말은 의심만 더 받을 것 같았다. 뭐라고 해야 자연스러울까?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나쁜 쪽으로 머리가 좋은 영애가 납득할 만한 스토리를 빨리 생각해내야 한다.

“잔머리 굴리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 설준혁, 그 남자와 대체 무슨 사이야?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흥분해서 날뛴 거야?”

영애가 숨 쉴 틈도 없이 다그쳤다.

‘빨리 생각해야 한다.’

이러다가는 모든 걸 사실대로 털어놓을 것만 같아 무서웠다.

그런 해수에게 문득 창밖으로 고급 차 한 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래… 차.

“차……. 네, 차 때문에요.”

“차라니?”

“제가 그 남자의 차를 박고는 그대로 달아났거든요.”

제발 믿어 주었으면…….

“차를 박고 그대로 달아났다고? 네가?”

“네. 너무 당황해서 그만…….”

“사실이니?”

영애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해수를 노려봤다. 곳곳에 CCTV가 있고 심지어 차마다 블랙박스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남의 차를 박고 달아나다니.

“네…….”

“너 미쳤니? 어디 모자란 거야? 뺑소니로 신고라도 들어갔으면 어쩌려고 그래!”

“죄송해요.”

“그래서 그 남자가 그렇게 흥분한 거야? 뒤통수를 쳤다는 것도 그 뜻이고?”

“…네. 심하게 박은 건 아니고 살짝, 아주 살짝 부딪쳤어요. 긁힌 표도 안 났을 거예요…….”

아닌 게 아니라 그날 밤 정도의 일은 그 남자에겐 살짝 긁힌 정도였을 것이다. 접촉 사고.

“박았든 부딪쳤든 그게 그거지. 그러고 나서 그대로 달아났다고?”

영애는 뭔가 석연치 않아 재차 확인했다.

“너무 당황해서 그만…… 나중에 연락하려고 했었어요.”

“너 뺑소니가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 몰라? 당장 그 남자에게 연락해서 사과해. 너 저 남자가 누군 줄이나 알고 그런 덜떨어진 짓을 한 거야? 이 일이 뉴스에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너 때문에 우리 태산까지 피해 입으면 가만 안 둬. 알았니?”

영애가 윽박질렀다. 다행히 영애가 믿는 것 같아 해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며칠 후 만난 준혁이 해수를 죽일 듯 노려보며 물었다.

“네…….”

“그런데 그런 짓을 했다고?”

“그건…… 정말 미안해요.”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그 하룻밤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줄 알았다. 그렇게 기대하고 저지른 짓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결코 그런 객기는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하다? 설마 그딴 말 한마디로 그냥 넘어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럼요?”

“사람 죽여 놓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발뺌할 여자군.”

준혁이 빈정거렸다.

“그럼 대체 원하는 게 뭐죠?”

이 남자를 잘 달래서 보내야 한다. 다시는 자신 앞에 나타나지 않게.

돈이 많은 남자니 돈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자신의 처지를 알았을 테니 측은지심을 발휘해 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그날 일은 하룻밤의 해프닝으로 여겨 줄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거? 원하는 걸 말하면 들어줄 자신은 있고?”

웃음기라고는 한 조각도 없는 목소리로 준혁이 물었다.

“……네?”

“당신 뒷조사를 해봤지. 정확하게는 당신과 태산과의 관계라고 해야겠지.”

결혼을 앞둔 여자가 자신의 처음을 다른 남자에게 버렸다.

그렇다는 건 이 여자가 하려는 결혼이 정상적이지는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그래서요?”

“부친이신 민국당 이민영 대표님이 태산 김영우 상무와 거래를 하셨더군. 딸의 미래를 담보로 말이야. 당신도 동의한 일인가?”

“……!”

“물론 아니겠지. 망나니란 소문이 자자한 그런 인간을 남편감으로 생각할 여자는 없을 테니까.”

“이봐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 말인데.”

준혁이 자신의 길고 탄탄한 다리를 느리게 꼬았다. 해수의 시선이 저절로 그의 다리로 갔다. 저 다리가 그날 자신의 다리와 엉긴 그 다리였다는 생각이 무심결에 들자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그 결혼 그만둬. 내가 원하는 건 그거야.”

준혁이 해수의 얼굴을 보며 차게 웃었다.

“마, 말도 안 돼. 그럴 수는 없어요.”

해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함께 보냈던 그날 밤을 김영우 상무도 알고 있을까? 그 남자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이건 분명 협박이었다. 해수의 얼굴이 이번에는 퍼렇게 변했다.

“당신 같은 여자들을 잘 알고 있지. 마치 누군가의 희생양인 양 굴면서 실은 그걸 이용해 도리어 그 사람들을 조종하고 학대하지. 순진한 얼굴을 하고 뒤에서는 그런 난잡한 사생활을 즐기는 너처럼 말이야.”

준혁이 경멸에 찬 얼굴로 해수를 바라봤다.

난잡한…?

그의 경멸에 해수의 심장이 조였다. 자신에 대해서 뭘 안다고 이 남자가 감히…….

“말이 너무 심하시네요.”

“왜? 내가 정곡을 찔렀나? 그렇다면 얘기가 더 쉬워질 수도 있겠네.”

해수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준혁이 피식 웃었다.

그런 남자의 태도가 그녀는 몹시 거슬렸다.

“반말, 듣기 거북하네요. 부탁인데 예의 좀 갖춰 주세요.”

남자의 무례함에 기운이 빠져 버릴 것 같아 해수는 이렇게 부탁했다. 그나마 서로 예의라도 갖추면 이런 숨 막히는 상황이 조금은 나아질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예의 갖추어 달라고 했나, 지금? 감히 내게? 우습네. 네가 내게 한 짓은 예의 있는 짓이었고? 밤새 미친 듯이 매달릴 땐 언제고 아침이 되기도 전에 그런 식으로 홀랑 도망을 가?”

그의 노골적인 말에 해수의 얼굴이 터질 듯 익었다.

그날 밤은 그녀 스스로가 생각해도 믿을 수 없었다.

처음은 분명 분노였다. 자신을 팔아넘긴 아버지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런 그녀를 인질 삼아 아버지를 휘두르려던 태산에 대한 분노.

그래서 철저히 망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와 입을 맞춘 순간, 해수는 이상한 열기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만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야 기억이 나나 보지?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말이야.”

해수가 기억하기로 준혁은 아주 능숙했다. 자신을 유혹하는 해수의 어설픈 행동도 가소롭다는 듯 즐겼고 방 키를 내미는 그녀의 가냘픈 손가락도 재미있다는 듯 희롱했다.

방으로 올라간 그는 바(bar)에서의 느긋함과는 달리 다급하고 거칠었다.

해수의 겉옷을 순식간에 벗겨내고는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물었다. 그러고는 곧 그녀의 온몸을 미친 듯이 헤집었다.

해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열기에 이성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미친 듯이 그에게 매달린 것은.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날 당신도 분명…….”

즐겼잖아.

“분명, 뭐? 왜 말을 하다 말지? 똑바로 제대로 말해. 간 보지 말고.”

그날 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왜 그랬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당신도… 손해 본 건 없잖아요. 열 받은 포인트가 대체 뭐죠? 내가 인사도 없이 가버려서인가요, 아니면…….”

“……?”

“아니면 내가 당신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아서인가요?”

“뭐?”

“미안하지만 난 그날 그 자리에 있던 누구라도 상관없었어요. 마침 당신이 거기 있었을 뿐이었죠.”

“그리고 멍청하게도 난 그 어설픈 유혹에 넘어가 버렸지. 아니, 어설펐다는 말은 취소하지. 네가 손만 내밀면 나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그 누구라도 다 넘어갔을 테니 말이야.”

“그럼 대체 이러는 이유는 뭐죠? 내게 뭘 원하는 거예요?”

그 일로 사과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김영우였다. 앞에 앉은 이 남자가 아니라.

“네 말대로 그날 난 제대로 즐겼어. 아주 오랜만에, 이성을 깡그리 잃을 정도로 말이야.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총각 딱지를 뗀 이후로 처음이었어. 그런 기분은.”

이 남자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봐요.”

“모르긴 몰라도 나뿐만 아니라 너도 마찬가지였지 않나? 그렇게 미친 듯이 매달린 것 보면 말이야.”

“차, 착각 말아요.”

“새삼 부끄러워하는 건가?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좀 솔직하지 그래? 그날 분명히 우린 함께 천국을 맛보았어. 그것도 여러 번.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