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색한 첫 만남

모처럼 나의 능력을 쓸 때가 왔다. 수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먼저 파스타집에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느냐고 하면, 바로 소개팅남! 친구로부터 집안이 잘사는 집안이라고 하면서 성격도 괜찮으니 한번 만나 보라는 제안에, 황금 같은 주말에 온갖 치장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꽤 괜찮게 산다는 말이 그녀에게는 가장 좋게 들렸다. 왜냐하면 그 부분이 그녀가 사람을 볼 때 가장 중요시하는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내심 들뜬 기분으로, 소개팅남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 저기, 하며 누군가가 수민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민이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자신을 보면서 서 있는 짧은 커트 머리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이수민 씨?”

“네, 맞아요. 서장호 씨 맞으시죠?”

수민은 미소를 짓곤 천천히 남자의 모습을 살폈다. 남자는 까만 피부에 날렵한 눈매, 옷은 청색 재킷을 입었고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모습이었다.

‘옷들이 그렇게 싸 보이진 않는데 저게 과연 다 얼마짜리일까?’

수민은 남자를 빠르게 훑으며, 남자가 걸치고 있는 시계와 옷들의 값어치를 매기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남자는 수민이 그럴 거라는 걸 꿈에도 생각 못 하고 반갑다는 듯이 수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수민은 반가워요, 덩달아서 웃으면서 손을 마주 잡았고, 곧바로 남자 위에 숫자가 보였다.

‘2억.’

수민은 숫자를 보고 나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차림새를 보고는 좀 기대했는데 생각보다는 그렇게 돈이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수민은 실망스러웠지만 애써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실은 그녀에게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은 바로 상대방의 손을 잡으면 이렇게 그 사람이 얼마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 보인다는 거였다. 상대방의 얼굴 위에 글씨와 숫자가 보이고 그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이상형을 찾고 있었다. 경제적 능력이 괜찮은 자신의 이상형 남자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이 사람의 재산을 보고 나니 생각보다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개팅 제안을 받았을 때, 자기는 무조건 경제력을 본다고 신신당부했는데 뭐랄까, 시작도 하기 전에 흥미가 뚝 떨어졌다. 이런 수민의 마음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남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직업이 무엇인지 말이다. 수민은 중간중간에 휴대폰을 보면서 대충대충 들었다. 이때쯤에 아무에게나 연락이라도 좀 와라! 싶었지만 하필이면 그런 것도 없었다. 그렇게 지루하게 시간이 흐르고, 수민은 슬쩍 손목시계를 보았다. 한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일어나 볼까?

“저, 얘기를 들어 보니까 많이 바쁘실 것 같은데. 이제 그만 가볼까요?”

수민은 상냥하게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아, 네. 하고 얼떨결에 수민을 따라 일어섰다.

“저, 근데 그렇게까지 오늘 바쁘지는 않은데.”

“그래도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요, 나가죠.”

수민은 혹시나 남자가 질질 시간을 끌까 봐 계산을 하고 곧바로 파스타집을 앞서서 나갔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어쩔 수 없이 수민을 따라서 파스타집을 나왔다.

“저, 계산은 제가 해도 되는데.”

“아니에요, 계산 이런 건 확실히 해야죠. 저, 그러면 이만 가볼게요.”

“네?”

“제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즐거웠어요.”

수민은 인사를 하곤 돌아섰다. 어차피 이제 저 남자와는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다.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듭니까?”

돌아서 가는 수민의 뒤에다 대고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수민은 그 이야기를 듣고 멈춰 섰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우리 둘은 잘 안 맞는 것 같네요.”

수민은 그렇게 말하곤 돌아섰다. 수민이 돌아갈 때까지 남자는 그저 벙한 상태로 수민이 가는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그렇지만 수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바로 이동해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을 타고 자리를 잡고 앉으니, 뭐랄까 허무한 감정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황금 같은 내 시간을 이렇게 말아먹다니!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어 곧바로 솔잎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돈 많은 사람이라면서?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더구만.”

- 무슨 소리야? 자기 부모님이 50억짜리 아파트가 있다고 그랬는데.

수민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솔잎에게 그 남자가 거짓말을 한 것 같았다. 수민은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돈.’

수민의 이상형과 딱 맞는 사람이라고 하면 무조건 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그녀는 돈이 좋았고 세상에서 돈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믿을 돈은 있다! 그게 그녀 마음속 생각이자 철학이었다. 경제적인 능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정말로 어떤 남자라도 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갑자기 수민의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이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 언니, 어디야?

“집에 가는 중이야! 금방 갈 거야.”

수민은 미소를 지었다. 얼른 들어가서 동생이랑 같이 맛있는 거나 먹고 싶었다.

“뭐 맛있는 거 사 가지고 갈까?”

- 아니야, 괜찮아.

“너 또 제대로 안 챙겨 먹고 그런 거 아니지?”

- 아니거든요? 걱정하지 말고 얼른 들어오기나 하시죠.

“오케이.”

수민은 전화를 끊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밖에 있다가 금방 집으로 돌아가는 건데도 이상하게 오늘은 조금 피곤했다.

**

수민은 저녁에서야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 들어와 보니 아란은 휠체어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나 왔어!”

수민은 밝은 목소리였다. 아란은 책을 읽고 있다가 수민을 보고는 “왔어?” 하고 미소를 지었다. 내 동생! 하나밖에 없는 내 가족. 어떻게 보면 그녀가 지금껏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자신의 여동생 아란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 없이, 그녀는 오로지 동생만을 바라보면서 살았다. 돈이 있으면 정말로 동생에게 최대한 많은 것들을 해주고 싶었다.

“밥은 잘 챙겨 먹은 거 맞지?”

“언니! 몇 번을 물어봐. 내가 애도 아니고. 먹었다니까?”

수민은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부엌 쪽으로 향했다. 아란은 밥맛이 없다고 하면서 밥을 안 먹는 경우가 많아서 꼭 한 번씩 밥을 먹었는지 체크한다.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어.”

수민이 냉장고 문을 막 여는데, 아란이 투덜댔다.

“언니가 만날 이렇게 검사하는데, 안 챙겨 먹는 게 이상하지.”

“그러니까 좀 잘 챙겨 먹으라고. 너 말라비틀어진 것 좀 봐라. 누가 보면 언니가 늘 굶기는 줄 안다니까. 어린애도 아니고, 입이 그리 짧아서야.”

수민이 쯧쯧 혀를 찼다. 아란은 수민의 잔소리 폭격에 으으, 진저리를 쳤다. 아란은 수민이 잔소리하는 걸 무척 싫어했다. 그렇지만 수민은 아란의 유일한 보호자이기에, 더 그만큼 아란을 더 챙겨야만 했다.

바람둥이인 아빠 때문에 늘 싸우던 엄마와 아빠. 그리고 참다못해 집을 나간 엄마와, 우리 둘은 거들떠보지도, 신경도 쓰지 않던 아빠! 그러다 보니 늘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서로 의지해야만 했다.

능력도 없고, 여자만 만나러 다니는 아빠 때문에 수민은 늘 돈이 없었고, 먹고 싶은 것도 편히 사 먹질 못했다. 그래서 수민은 힘들게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래도 아란만이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자 힘이었다. 연락이 되지 않던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수민은 오로지 아란에게만 의지했다. 장례식장에서도 엄마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술만 진탕 마시고 있는 아빠를 보면서는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민은 늘 동생을 지키겠다며, 아르바이트를 밤낮없이 했고, 그렇게 취업도 일찍 했다. 그런 언니를 보면서 아란은 늘 수민에게 미안해했다. 자기가 이렇게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 않았으면 언니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었을까? 그런 말을 주문처럼 반복해서 했다. 그렇게 풀이 죽어 있을 때마다 수민은 아란을 타박했다.

“너는 그냥 편하게 먹고 쉬면 돼. 내가 다 알아서 해.”

수민은 그렇게 말했지만 아란은 언니에게 신세만 지는 것이 무척 미안했다. 자신에게 변환점이 필요했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오랫동안 고민했고, 고민 끝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지만 재미 삼아 인터넷에 그림을 판매하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아란에게 그림을 팔라는 사람들이 꽤 생겼고, 그녀는 그림을 그리면서 어느 정도 용돈벌이를 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수민이 출근하고, 아란은 혼자 있을 때면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책 읽기 아니면 자신의 수민이 지금 작가로 일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곤 했다.

“아 참 언니, 그리고 언니 프로그램 봤어. 재밌던데?”

아란은 수민의 잔소리를 피해 프로그램 얘기를 꺼냈다. 수민은 그래? 하며 웃었다. 수민은 방송 작가로 지금까지 일하고 있었다. 그녀가 하고 있는 건 교양 프로그램이었는데,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그 사람의 일상도 보여주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역시 네가 우리 프로그램 단골 시청자구나.”

수민은 솔직히 저렇게 아란이 자기 프로그램 챙겨 보는 게 신기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긴 하지만 재미있지는 않으니까. 거기다가 공중파 방송도 아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더 없을 거였다. 그렇지만 아란은 꼬박꼬박 수민이 만든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그리고 항상 고생했다고 하면서 수민을 격려해 주었다.

“이 언니가 내일 또 엄청 바쁘게 생겼다. 거기다가 내일 신입도 들어온다는데.”

“아, 정말?”

“응, 막내 들어온다는데. 남자라고 하더라고. 뭐, 면접 때 메인 작가가 봤는데 좀 생겼다던데.”

“와, 진짜? 언니도 반하는 거 아니야?”

“헛소리할래? 지금 내가 나이가 몇인데. 걘 20대고, 난 30대인데. 그리고 난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이랑 결혼한다. 너도 그리 알아.”

“결혼은 그렇다고 쳐도 연애도 하고 언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아란이 쯧쯧 혀를 찼다. 수민은 그런 아란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언니 오늘 소개팅한 건 잘 안 됐어?”

수민은 “뭐, 그냥 그랬지.” 하며 얼버무렸다. 오늘 소개팅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하고 싶은 게 없었다.

“도우미분은 오늘 몇 시에 가셨어?”

수민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아란은 수민이 지금 오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냥 얼마 안 됐어, 하고 대답을 해버렸다.

“그래?”

“응, 뭐 오늘 특별히 별일은 없었어.”

“있으면 안 되지, 당연히. 내가 도우미분한테 틈만 나면 너 무슨 일 있었는지 확인하는데.”

수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실은 그전부터 수민은 지나칠 정도로 아란에 대한 걱정이 많았기 때문에 도우미에게도 자주 연락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수민 때문에 아란은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자기가 언니를 옭아매서 언니가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거나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알았어, 아무튼 얼른 들어가서 자, 나도 이제 자야겠다.”

아란은 휠체어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수민은 아란이 문을 닫고 들어가는 걸 보고는 막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솔잎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떻게 다른 사람으로 소개해 주리?]

수민은 문자를 보고는 고민했다. 과연 다음에는 믿어도 될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됐어, 나중에.]

수민은 고민 끝에 문자를 보냈다.

**

마지막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나니 벌써 저녁 11시다. 선우는 손목시계를 보고 나서는 하품을 했다. 내일 첫 출근을 하려면 얼른 집에 가서 자야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 집중해서 일할 수 없으니까.

선우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바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지저분한 집 안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놓여 있는 먹다 만 컵라면들, 과자봉지들, 쓰레기들이 곳곳에 있었다. 선우는 집 안을 보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런 심각한 집 안 상황에서도 준강은 신경도 쓰지 않고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재밌냐?”

선우는 자기가 온 줄도 모르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준강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준강이 그제야 선우를 쳐다보았다.

“여어! 왔냐?”

“왔냐가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집 상태가 이게 뭐냐?”

선우의 타박에도 준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선우는 어차피 자신이 잔소리를 해도 준강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걸 알기에 하나씩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준강이랑 룸메이트를 하면서 항상 집안일은 본인 담당이었다. 그게 몇 년째 쭉 이어지다 보니 이제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내일 첫 출근이네?”

준강이 정리하고 있는 선우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많이 불안했다. 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드디어 얻은 첫 직장이었으니까.

선우가 방송 작가가 되고 싶었던 건 어린 시절에 위로받았던 것이 텔레비전이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는 수많은 세계가 있었고 선우는 어린 시절에 그 세계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성 작가의 꿈을 꾸었지만 바로 구성 작가를 하기에는 여의치가 않았다. 당장에 돈이 필요했고, 그는 보육원을 나오자마자 죽어라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결과로 공부도 열심히 해 전문 대학에 입학했고 군대도 다녀왔다. 그러다보니 세월이 훌쩍 흘러버렸고, 스물아홉 살이 되어서야 구성작가에 도전해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드디어 얻은 버젓한 내 첫 직장! 그러다 보니 내가 일을 잘할 수 있을지, 기대보단 초조함이 더 컸다. 그래서 일부러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서 일찍 자려고 했는데! 이 원수 같은 룸메이트는 도움을 전혀 주질 않는다.

“야, 내일 출근인 사람인데 이딴 식으로 도움을 안 줘?”

“그냥 자.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

“죽을래?”

“알았다, 알았어. 하여튼 깔끔 떨기는.”

준강은 귀찮다는 듯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느릿느릿 청소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고 선우는 부엌 쪽을 정리하기 위해서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 가서 싱크대를 보니 설거지해야 할 그릇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어떻게 내 손길이 안 필요한 곳이 없냐? 선우는 쯧쯧 혀를 차고는 곧바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어. 여보, 나 지금 집에 있지. 응.”

계속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준강이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으응, 우리 여보. 나도 사랑하지. 응.”

준강은 선우가 듣고 있는 것도 모르고 통화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렇게 좋을까? 선우는 이쯤이면 신기했다.

“어어, 그래 알았어, 끊어.”

준강은 그제야 싸함을 느끼고, 전화를 끊었다. 선우는 그때까지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준강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 새끼. 겁나 노려보네, 왜?”

“빨리 좀 치우지?”

“알았다, 알았어. 우리 공주님한테 전화 와서 통화 좀 한 거 가지고 그리 예민하게 구냐.”

“뭐? 우리 공주?”

“정 아니면 너도 여친 만들어라. 그럼 내 마음 알 거다.”

“거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오냐?”

선우가 저도 모르게 정색했다. 준강은 어깨를 으쓱하곤 “나 잠깐 화장실 좀.” 하고 화장실로 도망가듯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런 준강을 보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 준강은 정말 다르구나 새삼스럽게 또 한 번 느껴 버렸다.

실은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와중에 연애는 그에게 사치에 불과했다. 준강은 그런 선우와는 달랐다. 현재를 즐겨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고 정말로 해보고 싶은 것도 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였다. 그러다 보니 여자 친구도 수시로 바뀌었고, 지금 일하는 곳에 만족한다면서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살면서 일하다 보면 힘들거나 짜증 나거나 할 수도 있는데 준강은 늘 밝은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런 준강의 모습이 마음에 들어 지금까지 쭉 친구로 지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너는 연애 열심히 하고, 난 일이나 열심히 하고.’

선우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러곤 피곤함에 하품을 하고 빠른 속도로 설거지를 했다. 얼른 끝내고 자고 싶다, 그 생각뿐이었다.

결국 12시가 넘어서야 그는 모든 집안일을 끝낼 수 있었다. 그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리고 곁에 놔둔 스탠드 불을 켰다. 곁에 불을 켜놓고 자야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실은 선우에게는 ‘어둠 공포증’이 있었다. 누군가가 옆에 없거나, 빛이 없으면 선우는 잠을 이루질 못했다. 그래도 스탠드를 곁에 놔두고 자면 잠이 잘 오곤 했는데, 오늘은 이러나저러나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내일 첫 출근으로 인한 부담으로나 말이다.

첫 출근을 생각하니, 처음 면접 봤을 때 메인 작가라면서 자신을 소개한 소영 작가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서브 작가가 있는데, 조금 무뚝뚝할 거라고 말이다. 그래도 미워하는 게 아니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했다. 조금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했던가? 선우는 메인 작가의 말에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면접 때는 전혀 상관없다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어떤 사람이길래 그런 이야기를 한 거지?’

그는 통 상상이 되질 않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선우는 한 번도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뚝뚝하고 조금 차갑게 느껴질 수 있다고 하니, 괜히 불안해졌다.

‘나 정말 잘할 수 있겠지?’

이런저런 머릿속을 정리하고 나서야 그는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과연 내일 같이 일하게 될 서브 작가는 어떤 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