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포대교

이제는 완연한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시원의 뺨을 때리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시원은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뻗어 스산한 가을바람처럼 차가운 냉기를 풍기는 마포대교 펜스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드디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원치 않게 억지로 떠안은 이 지긋지긋한 삶에 마침표를 찍을 순간이 온 것이다. 이 세상에 온 것은 나의 뜻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죽음만큼은 내가 원하는 순간, 원하는 장소에서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더는 미루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루, 또는 이틀 목숨을 연장한다 한들 의미가 없다. 삶에 대한 얼마 남지 않은 미련도 깨끗하게 버리는 편이 좋다. 펜스 너머 보이는 한강 물은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그 위로 보이는 하늘은 청량하리만치 파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가을 하늘답게 구름 한 점 없다. 가을은 아름답다. 가을은 시원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더운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피부에 차가운 공기가 닿는 계절. 그 차가운 공기는 시원에게 현실을 똑바로 자각하게 해준다. 잠시나마 흐릿한 기회를 마음속에 품었다면, 그런 기대 따위는 이루어질 리 없다고. 저주받은 인생이다. 시원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시원하다.”

부러질 것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펜스를 좌우로 매만지며 시원은 처연한 미소와 함께 낮은 음성으로 읊조렸다. 시원의 등 뒤로 차들이 쌩쌩 달리는 소리가 귓가를 관통했다. 시원은 고개를 살짝 숙여 어디까지 닿아 있을지 모를 한강 물을 바라보았다. 저 강물이 얼마나 얼음장처럼 차가울까. 끝이 있기는 한 것일까. 어두컴컴한 물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호흡을 잃어 가게 될까. 잠시 생각하던 시원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시원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 죽음뿐이었다. 이제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결심을 마친 시원은 뛰어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주변을 살피려 오른쪽으로 서서히 시선을 돌렸다.

‘……?’

아무도 없을 거라 기대하던 시원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저 멀리 선 시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의 남자였다.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그 피부를 감싸는 다갈색 머리카락은 햇살을 받아 마치 한강 물이 반짝거리듯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쌍꺼풀 없이 아래로 길게 뻗은 눈에 자리한, 다갈색 머리카락을 꼭 닮은 다갈색 눈동자는 구슬처럼 투명하기만 했다. 그 빨려 들려갈 것 같은 눈동자와 시원의 눈이 마주쳤다. 시원은 자기도 모르게 그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

그저 한가로이 한강을 바라보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가을바람을 맞아 산책을 나온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시원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목숨을 버리러 왔다. 확실하다. 저 사람의 눈도 어딘가 비어 있다.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무언가를 평생 동안 찾아 헤맨 눈,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해 체념한 눈. 시원은 동물원 구경이라도 하듯 환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낯선 사내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자신을 이상하게 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제는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으니까. 환 역시 시원을 떨리는 동공으로 잠시 동안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처연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시원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말을 걸어 볼까.’

죽기 전에 낯선 사람에게 말 정도는 걸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시원은 순간 고민했다. 묘한 동지애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혹시 당신도 죽으러 온 거냐고, 지긋지긋한 삶 따위는 한강 물에 던져 버리고 싶은 것이 맞느냐고, 답을 이미 알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괜한 생각을….’

그러다 시원은 이내 말을 삼켰다. 생각해 보니 우스운 일이었다. 맞다고 하면 동반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환 역시 시원이 못내 눈에 밟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에야말로 이 지옥 같던 삶을 거두려 이곳에 왔다. 집을 나서면서 환은 정말이지 죽기 좋은 날씨가 아닌가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오늘이다. 오늘이어야만 한다. 더 이상은 미루고 싶지 않았다. 미루는 것은 더 큰 고통만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데 만나고야 만 것이다. 똑같은 계절, 똑같은 시간, 똑같은 마포대교에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시원을. 앵두같이 빨간 입술은 못나게 터져 흉이 져 있고, 눈이며 뺨에 파랗다 못해 불그스름한 보랏빛을 띤 멍이 울긋불긋 칠해진 시원의 얼굴을, 환은 보고야 만 것이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기는 하지만 어렴풋이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사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누구든 알 수 있었으리라. 모든 걸 놓아 버린 저 눈동자를 본 사람이라면. 이상하게도 시원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환은 왠지 시원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원을 본 바로 그 순간, 환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 여자는.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

“…….”

묘한 일이었다.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건만. 시원은 발이 땅에 붙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건 환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나의 죽음의 증인이 되어 준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혹은 저 차디찬 물속으로 언제든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는 상대방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때였다.

“선생님!”

저 멀리서 경찰 두 명이 호루라기를 앙칼지게 불며 시원과 환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 경찰을 본 환은 낭패라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들. 잠시만. 잠시만요.”

두 경찰관은 어느새 시원과 환에게 다가와 가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느라 진이 빠진 건지 숨을 고르느라 허리는 푹 꺾인 채였다.

“잠시… 잠시만. 이러시면 안 됩니다. 두 분 다.”

그 와중에도 약간의 짜증 섞인 표정으로 한강 물을 바라보는 환에게서 시원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저 혹시, 두 분.”

경찰관이 겨우 고개만 들어 시원과 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는 사이십니까?”

그 질문에 환은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텅 빈 시원의 눈동자로 시선을 돌렸다.

“아닙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목소리가 참으로 선하다고 시원은 순간 생각했다.

“그럼 혹시 두 분 다….”

“죽으러 왔냐고요?”

당연한 걸 뭘 묻냐는 듯 시원이 되물었다.

“네… 네?”

오히려 당황한 건 경찰 쪽이었다. 환은 일이 재미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맞아요, 죽으러 온 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원이 이름처럼 시원하게 대답을 내뱉었다. 부랴부랴 달려온 탓인지 당황한 탓인지 경찰들의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선생님, 이러지 말고 서에 가서 얘기하시죠.”

“…….”

“어서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하아….”

이게 무슨 거추장스러운 일이람, 시원은 생각했다. 환은 그저 불 건너 강 구경을 하듯 그런 경찰들과 시원의 모습을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도 가셔야 합니다.”

그런 환에게 한 경찰이 다가서며 말했다.

‘죽는 것까지도 참, 뜻대로 되지 않네.’

경찰관을 보며 입술을 꽉 깨문 환이 생각했다. 주저하지 말았어야 했다. 바보같이. 이곳에 처음 온 것도 아니면서 아마추어 같은 실수를 했다. 차도를 쌩쌩 달리는 저 차에 탄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할 거라는 걸 당연히 알아챘어야 했다. 스스로를 자책하는 건 시원도 마찬가지였다. 저 남자에게 시선이 꽂히지만 않았더라면, 신고를 받은 경찰이 여기까지 오기 전 진즉에 떨어져 내릴 수 있었는데. 그만 시선이 빼앗기고야 말았다. 저 투명한 다갈색 눈동자에 홀려.

“가시죠, 선생님들.”

참으로 귀찮은 일이었다.

***

이미 짐작하고 있었듯 절차는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지를 밝힌 후 시원과 환은 경찰들로부터 왜 소중한 목숨을 버리면 안 되는지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들어야 했다. 반박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둘 다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앉아 있는 쪽을 택했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빨리 벗어나려면 조용히 순응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론서에만 나올 법한 고루한 연설을 듣고 있자니 시원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환 쪽으로 신경이 쏠리기 시작했다. 대형견 같다, 고 문득 생각했다. 넓은 어깨에 시원하게 뻗은 팔다리,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선해 빠진 눈매. 햇살이 그대로 비치는 투명한 머리칼과 눈동자. 시원은 말라뮤트니 골든 리트리버니 하는 대형견들을 여럿 떠올리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탓이다. 시원의 오른쪽 입술은 처참하게 터져 이제 막 생긴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입을 열면 아프고 쓰렸다. 그래서 입을 여는 것이 짜증이 났다.

“약속하시는 겁니다.”

뭘 약속하라는 건지 시원은 조금의 관심도 없었지만 그런 경찰관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귀가하시면 됩니다.”

시시하다. 오늘은 굉장한 날이 될 뻔했는데. 드디어 이 질긴 잡초 같은 목숨을 칼로 서걱서걱 베어 버릴 역사적인 날이 될 뻔했는데. 시원은 고개를 꾸벅 숙여 묵례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가기 전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는 환을 한 번 흘긋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루하구나, 저 사람도. 조금도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네. 시원은 생각했다.

“하아….”

경찰서 밖 공기는 시원의 마음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맑고 청량해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간담….”

시원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오늘 죽는다는 것은 이미 시원에게는 달라지지 않을 자명한 사실이었기에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짐을 한데 모아 쓰레기통에 주저 없이 버리고 집주인에게는 보증금까지 돌려받아 방을 뺐기 때문이었다. 목적지도, 갈 곳 없이 서성일 기력도 없었던 시원은 저 멀리 보이는 버스 정류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경찰서 근처에는 울창한 나무가 가득했다. 그 덕에 아스팔트 바닥에는 나무 모양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버스 정류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원은 나무로 된 버스 정류장 의자에 떡하니 앉았다. 눈앞에는 답지 않게 오래된 슈퍼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에 슈퍼라니, 현실감이 없다고 시원은 생각했다. 멍하니 슈퍼를 바라보다 시원은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지금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키에 머리는 언제나 집에서 아무렇게나 잘라 삐뚤빼뚤한 단발이었던 시절.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그치의 술 심부름을 가던 때를 떠올렸다. 투명한 초록색 병을 꼭 쥐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시원은 오늘도 이 병이 자신에게 날아올 것을 상상하며 입술을 아프도록 꽉 깨물었었다.

‘하필이면 그런 기억을….’

시원은 고개를 옆으로 까딱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하긴, 그런 기억들밖에 없으니까.’

달리 떠올리고 싶은 기억 따위, 없었다. 종류만 다를 뿐 모두 다 똑같다. 그저 시궁창 같던 생활들, 지옥이 되레 나을 듯한 하루하루. 살려 달라 신께 빌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신도 자신을 구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의 시원은 안다.

“…….”

그때 저 멀리서 걸어오는 환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시원의 눈에 들어왔다. 시원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입은 앙다문 채 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서, 드디어 다 들으셨나요, 일장 연설은? 시원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어느새 버스 정류장까지 온 환도 시원을 발견하고는 조금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환도 입을 열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버스를 탈 생각은 없는지 환은 그대로 시원을 지나쳐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쉽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원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기 전에 저 투명한 눈동자를 조금만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일까. 우스운 생각이다. 처음 본 남자의 눈동자를 죽기 전 조금이나마 더 바라보고 싶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지났을까, 시원은 자신의 눈앞으로 지나가는 버스를 손가락으로 하나씩 세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할 일이 없었고,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무 번째 버스를 세고 있던 때였다.

“저기요.”

그 남자, 환이 시원에게 말을 건 것은.

지쳐 보이는 눈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한없이 선하고 다정했다. 역시 강아지 같다고 시원은 생각했다.

“……?”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시원은 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얼굴이었다.

“집에는… 안 가세요?”

건조해서 바사삭거릴 것만 같은 말투로 환이 물었다.

“…….”

시원은 잠시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집….”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환이 다시 한 번 물으려던 참이었다.

“없어요.”

“……?”

“집… 없어요.”

그 말을 하는 시원의 기분이 왠지 모르게 통쾌했다. 그래, 나에게는 없다. 돌아갈 곳도, 머무를 곳도, 살아갈 곳도.

“네?”

“못 들었어요? 집 없다고요.”

“…….”

환은 난감한 듯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래로 처진 눈매가 다갈색 눈동자와 여간 잘 어울리는 게 아니다.

“그럼… 여기 계속 계실 건가요?”

환이 물었다.

“…….”

사실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시원은 할 말이 궁했다. 오늘의 계획은 단 하나, 마포대교에서 떨어져 죽는 게 다였는데. 그다음 계획이라고는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어쩐담.

“해가… 지는데.”

환의 말 대로였다. 청량하게 쭉 뻗어 있던 하늘에는 어느새 시원의 얼굴처럼 울긋불긋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을과 묘하게 어우러지는 시원의 큼지막한 멍 자국에 환은 알 수 없는 저릿함을 느꼈다.

“감기 걸려요.”

아까까지 죽기 위해 마포대교 위에 서 있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의 오지랖이라고 시원은 생각했다.

“그래서요?”

“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고요.”

세상에 대한 심통을 괜한 남자에게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이건 어리광일까.

“우리 집이라도 가실래요?”

환이 용기를 그러모아 말했다. 알고 있다. 이것은 오지랖이 맞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이건 환에게 있어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아. 다시는 버림받고 싶지 않아. 그러려면, 나는 모두에게 친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열 배, 아니 백 배로 친절해야만 한다. 그래야 다시 버림받지 않을 수 있다. 오늘같이 죽기로 결심한 날에도 이 지긋지긋한 본능이 발동한다는 데 환은 스스로에게 비웃음이 났다.

그런 의도가 있는 줄도 모르고 환의 말을 들은 시원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이래서야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시원은 알고 있었다. 가시 돋친 말을 건네도 따스한 대답이 돌아오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마치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사람처럼, 못나게도.

“…왜요?”

“…왜라뇨.”

“왜 저한테 잘해 주시는데요?”

동아줄이 아니잖아. 나한테 헛된 기대 품게 하지 마. 더 이상은 아프고 싶지 않아, 더 이상은 좌절하고 싶지 않아, 더 이상은 이 거지 같은 세상에 희망을 품고 싶지 않아.

“…….”

“저랑 결혼이라도 할 건가요?”

“네?”

자신의 말에 흠칫 놀란 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원은 시선을 바닥에 둔 채 신발을 바닥에 대고 앞뒤로 문질렀다. 물에 뛰어들었을 때 신발이 벗겨지면 발이 차가울까 봐 꽁꽁 동여맨 운동화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차가운 건 싫다니, 모순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역시 발이 차가운 건 싫었다. 시원은 아까 전 상황을 다시금 떠올렸다. 만약 그때 저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저 남자를 본 후에라도 주저 없이 한강 물에 퐁당 하고 떨어졌더라면. 지금은 달라졌겠지. 지금쯤 내 몸은 차가운 물에 둘러싸여 따스한 숨을 모조리 잃은 채 강물을 표류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죽었다고 한다면, 최대한 빨리 알면 좋으련만, 가족이라는 이름의 그치들이. 얼마나 고소할까. 분명 분노할 것이 뻔하다. 더 이상 돈 나올 구석도, 노예처럼 화풀이할 대상도 사라진 셈이니까.

“그럴까요.”

자기가 뱉어 놓은 말이지만 들어줄 거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던 시원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저 남자가 뭐라고 한 거지?

“……?”

어리둥절한 시원이 고개를 들자 그 남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텅 빈 눈을 하고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해요, 결혼.”

“…….”

시원은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놀란 토끼 눈을 하고 환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다시금 내리깔았다. 나는 지금 이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걸까? 심장 한쪽이 조금이나마 쿵 내려앉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시원은 순간 죽고 싶어졌다. 아직까지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입 밖으로 진심을 흘려내 버린 자신이 경멸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 시원을 환은 그저 지친 눈으로 바라보았다. 더 이상 시원에게서 대답이 없자 환은 이내 결심했다는 듯 도로로 걸음을 옮겼다. 택시를 잡을 요량이었다. 자신에게도, 시원에게도 진 빠지는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집까지 걸어갈 힘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았는데도 저 멀리 코너를 돌아 빈 택시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환이 손을 들어 신호하자 택시는 매끄럽게 환의 앞으로 와 멈췄다.

“타시죠.”

택시 뒷좌석 문을 덜컥 소리가 나게 연 환이 시원을 향해 말했다. 환이 자신을 향해 선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시원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한 채 발만 꼼지락댈 뿐이었다. 결국 환은 시원에게로 저벅저벅 다가가 가녀린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일어나요.”

“…….”

애초에 뿌리칠 마음이라고는 없었다. 시원은 못 이기는 척 환의 큼지막한 손에 이끌려 택시로 향했다. 환은 뒷좌석에 시원이 앉는 것을 확인한 뒤 차 문을 살짝 닫고 자신은 조수석에 앉았다.

“전국적으로 완연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시간 교통 상황 알려 드립니다. 강변북로 구리 가는 길, 서강대교에서 반포 사이 밀리고 있고요. 올림픽대로 강동 쪽으로는 멀리 행주대교에서 성산대교 구간 밀리고 있습니다….”

환의 집으로 가는 내내 택시 안에는 교통 상황을 알리는 라디오 소리만이 조용히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시원도, 환도 어색하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둘에게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였을까. 시원도, 환도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이 기묘하게 편안했다.

환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경찰서에서 차로 10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화려한 브랜드 아파트와는 거리가 먼 허름한 아파트였다. 그럼에도 시원은 오히려 이쪽이 좋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