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어느 구역에서 온 미친놈이야?

기껏해야 두 평 남짓한 공간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올랐다.

“음…… 으음…….”

달뜬 숨과 풀어진 눈빛, 완벽하게 맞물린 두 입술. 그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가늠하기도 힘든 얕은 신음이 흘러나오다 촉촉한 타액이 섞이는 소리에 묻혀들었다. 야릇한 소음과 함께 얽히고설킨 살덩이가 서로의 안에서 격렬하게 움직였다. 마치 서로를 집어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강하게 빨아들이면 빨아들일수록 서로에게 더 깊숙이 닿고파 안달이 났다.

딩동!

“하, 일단 내려.”

찰나의 순간, 맞물렸던 뜨거운 입술이 떨어지며 참고 있던 거친 숨을 내뱉었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몸은 잠깐의 목마름도 허락하지 않은 채 다시 하나가 되어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하.”

아득해져 오는 정신을 가까스로 수습하며 다올의 다급해진 손이 빛의 속도에 버금갈 정도로 빠르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거칠게 열린 문으로 엉겨 붙은 몸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듯 집 안으로 흡입됐고. 자동으로 켜진 현관 불빛. 쏟아지듯 퍼져 내리는 빛줄기 아래, 벽으로 밀어붙여진 늘씬한 몸이 조금 전보다 더 격렬해진 키스에 녹아든다.

“으…… 읍.”

더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휩싸인 지석의 성마른 손이 다올의 블라우스 단추를 다급하게 풀기 시작했다.

“하아!”

정말이지 터져버릴 것만 같던 그 절정의 순간!

탁!

거실 가득 환한 불빛이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거실 쪽에서 날아오는 낯선 목소리!

“미쳤네. 미쳤어.”

한심함을 담은 경멸에 가까운 말투. 소름 끼치도록 낮은 중저음의 음성이 다올과 지석의 귓가에 스쳤다. 미친 듯 들끓던 흥분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찬물을 끼얹은 듯 온몸이 얼어붙었다.

동시에 다올의 커다란 눈동자가 목소리의 주인공과 시선을 맞춘 찰나, 격렬하게 흔들렸다.

“으악!”

“다, 다, 당신 누구야?”

경악으로 가득 차 비명을 내지르던 다올도, 지석도, 마치 제집이라도 된 듯 너무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고 선 남자를 향했다. 대체 저놈은 어느 구역에서 온 미친놈인가 하는 눈빛으로 그를 훑으면서.

“나? 한우빈! 제이든 한!”

제이든이라는 말에 다올이 눈매를 확 키우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누…… 구? 제이든? 네…… 가?”

느릿하게 말을 내뱉은 다올이 저만치 앞에 선 남자를 찬찬히 훑었다.

베이지 니트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놓은 폼이 영락없는 모델 포스였다. 185센티는 훌쩍 넘기고도 남을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마치 신이 빚어 놓은 듯한 조각상 같은 얼굴. 과하게 잘 생겼다. 그저 잘생겼다는 표현으로는 설명이 부족할 만큼.

제이든이라고? 그 조그맣던 녀석이?

“다올아, 아는 사람이야?”

다올이 잠시 넋을 놓은 채 그를 훑고 있는 사이,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조금이나마 파악해 보려는 듯 지석이 물었다.

“어? 아, 오빠. 오늘이 며칠이지?”

제이든에게 둔 시선을 느릿하게 거둔 다올이 지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 뭐야? 쟤 보다 보니까, 그 잘 생겼던 지석 오빠가 완전 오징어네.

“오늘? 12일. 지금 나, 학회 끝나고 오는 길이잖아.”

“12일? 아흑!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다올이 커다란 눈을 질끈 감아 내리며 가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제야 3주 전, 캐나다에서 걸려 온 엄마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당분간, 우빈이랑 같이 지내. 한국 지사 연구원으로 가게 됐대.’

‘뭐? 걔가 한국에 왜 와?’

우빈이란 말에, 또 그 녀석이 한국으로 온다는 말에, 그야말로 입에 거품을 물며 펄쩍펄쩍 뛰었다.

‘왜? 우빈이는 한국 가면 안 되니? 다음 달 12일 도착이야.’

‘아, 내가 알 게 뭐야? 난 몰라. 남이랑 같이 사는 거 불편하단 말이야.’

그놈이 어떤 놈인가? 화려하기 그지없어야 할 다올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통째로 앗아간 놈이었다.

‘어머, 얘 봐라. 우빈이가 어디 남이니? 그 집에서 쫓겨나기 싫으면 그런 줄 알아. 도어 비밀번호 문자로 보내. 공항에 너 내보내겠다고 했더니, 괜히 번거롭게 그럴 거 없다면서 직접 찾아간다더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만히 다올의 변화무쌍한 표정 변화를 살피던 우빈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우빈을 쏘아보던 지석이 다시 다올을 보며 물었다.

“아는 사람은 맞는 거야?”

“어? 어. 그런가 봐.”

“그런가 봐? 클로이! 정신 차렸으면 옷부터 좀 똑바로 입지?”

조금 전보다 더 강한 헛웃음을 내뱉은 우빈이 다올을 향해 까딱 고갯짓했다. 도저히 더는 눈 뜨고 못 봐주겠다는 듯 고개를 휙 돌리면서.

“어, 어? 엄마얏!”

그제야 앞섶이 적나라하게 헤집어져 있는 블라우스가 다올의 눈에 들어왔다.

“아흑, 쪽팔려, 진짜.”

서둘러 몸을 돌린 다올이 혼잣말로 소리 없이 뇌까리며 빠르게 단추를 채웠다. 우빈과 다올을 번갈아 보느라 정신이 없던 지석이 서둘러 두 팔을 벌려 다올을 막았다. 혹시라도 저 앞에 있는 놈이 보기라도 할까 봐.

“영어 이름이 클로이야?”

“어? 어. 오빠. 있잖아.”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단추를 채운 다올이 다시 돌아서며 지석을 불렀다.

“응?”

“미안한데, 오늘은 그냥 가라.”

“다올아! 우리 무려 일주일 만에 만난 거라고.”

그녀의 말에 지석이 펄쩍 뛰어올랐다.

“쟤, 당분간 여기서 지내야 해. 우리 일주일만이지? 그렇게 따지면 쟤랑 나, 얼추 7년 만에 봐.”

지석을 향해 미간을 좁힌 다올이 새삼 시간의 빠름을 실감한 듯 우빈을 힐끔거렸다.

시간 참 빠르네. 벌써 7년이라고? 그 조그맣던, 아니다. 그때도 저렇게 키는 컸는데. 완전 남자가 다 됐네.

“뭐? 여기서 지낸다고? 대체 누군데?”

다올이 슬그머니 우빈을 훑는 사이 지석이 대놓고 우빈을 경계하며 물었다. 우빈에게 향해 있는 그녀의 얼굴을 제게로 향하게 돌리면서.

“분명, 한우빈이라고 말했는데. 제이든 한, 이라고도 말했고. 기억력이 별로 안 좋으신가 봐요?”

비웃음이 잔뜩 실린 우빈의 말투에 지석이 대번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대체 저 자식 뭔데?”

오는 말이 곱지 않으니, 가는 말도 곱지 않은 건 당연지사. 발끈한 지석이 우빈을 향해 잠시 눈을 희번덕거리다 말고 상대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는 듯 다올을 돌아봤다.

설마 저렇고 그런 서사가 있는 건 아닌 거지? 속 시원하게 말 좀 해 봐.

지석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온 얼굴로 물었다.

“아, 뭐, 그냥 아는 동생이야. 엄마가 당분간 데리고 있으래.”

“아아. 그냥 아는 동생? 난, 또 뭐 내가 모르는 사연이라도 있는 줄 알고 간이 철렁했네. 근데 쟤는 뭐 뺏긴 거 찾는 사람처럼 눈빛이 저래?”

아닌 게 아니라 아까부터 지석을 태워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우빈이었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러다 다올의 아는 동생이라는 대답에 우빈의 긴 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또 그걸 제대로 포착한 지석이었고.

입가에 가소로운 웃음을 머금은 지석이 우빈을 위에서 아래로 쓱 훑었다.

칫. 제까짓 게 뭐라고, 그저 아는 동생 주제에.

“오빠. 자세한 건 나중에 다 얘기해 줄 테니까. 오늘은 그만 가라. 응? 지금 나, 완전히 미쳐버릴 것 같거든.”

“알았어. 얘기 끝나면 전화 줘. 응? 오빠, 걱정되니까.”

지석이 길고 긴 한숨을 푹 내쉬며 ‘오빠’라는 말에 힘을 실었다.

“어. 전화할게. 보다시피 멀리 못 나가.”

다올이 문을 활짝 열며 지석을 밖으로 내몰았다.

“어어어. 다올아, 그래도 동생한테 인사는 하고 가야지. 자주 보게 될 텐데.”

지석이 동생이라는 말에 힘을 실어 말하며 우빈을 돌아봤다.

“허.”

“한우빈 씨! 제이든 한! 오늘은 이만 갑니다. 부탁할게요. 우리 다올이 곤란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지석을 쏘아보는 우빈을 향해 지석이 타이르듯 웃으며 한껏 여유를 부렸다.

“오빠, 쟤 건드리지 말고 빨리 나오기나 해.”

“어어어. 다올아. 다올아. 강다올.”

다올에게 팔이 질질 끌려 나가면서도 지석의 입가에 기분 좋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네까짓 게 아무리 그런 눈으로 우리 다올이를 본다 한들, 나는 남자고, 너는 동생일 뿐이라고.

연신 우빈을 향해 너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눈빛을 쏴댔다.

*

지석을 보낸 다올이 쭈뼛쭈뼛 현관으로 들어서 문을 닫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머릿속은 새하얗고, 눈앞은 깜깜했다.

아흑! 그 낯 뜨거운 장면을 다 봤을 텐데.

긴 숨을 내뱉으며 두 눈에 힘을 준 다올이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하윽! 놀래라. 뭐, 뭐어? 뭘 그렇게 노려보고 섰어?”

얘는 부담스럽게 왜 이렇게 앞에 와 있는 거야?

언제 여기까지 왔던 건지, 중문 바로 앞에 서 있는 우빈을 맞닥뜨린 다올이 흠칫 어깨를 움츠리며 놀란 눈을 부라렸다.

“잘한다.”

삐뚜름한 우빈의 입술 사이로 엿가락 늘어지듯 길게 흘러나오는 특유의 말투. 다올을 제 아래로 보던 그 버릇없는 말투는 어째 더 농익은 것만 같았다. 자그마치 여섯 살의 나이 차이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야! 너는 누나한테 말본새가 그게 뭐니?”

“허.”

콧방귀를 뀌며 큰 약점이라도 잡은 듯한 우빈의 표정. 이 찜찜한 기분은 뭐란 말인가. 다올은 벌써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드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엄마 잔소리에 귀가 따가웠어도 같이 살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한우빈!”

다올이 제대로 한번 들이 받아보겠다며 두 눈에 힘을 주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됐고! 그 번진 립스틱이나 좀 지우고 얘기하지?”

“뭐?”

우빈의 말에 크게 움찔한 다올이 다급히 두 손을 올려 제 얼굴을 가렸다.

아흑!

다올은 지석을 만나기 직전 발랐던 와인 컬러의 붉은 립스틱이 불현듯 떠올랐다. 당혹스러움과 창피함에 화끈거리는 얼굴이 붉은 입술만큼이나 새빨개졌다.

“들어가서 옷도 좀 갈아입고. 블라우스 단추, 엇갈리게 채운 건 알아?”

“이씨! 너, 딱 여기 서 있어.”

얼굴을 가렸던 한 손을 재빨리 내린 다올이 서둘러 제 가슴을 가리며 몸을 돌렸다.

“걱정하지 마. 여기서 한 걸음도 안 움직이고 기다릴 테니까.”

그때도! 지금도! 나이도 어린 녀석이 다시 봐도 여유가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녀석의 나지막한 비웃음을 들으며 다올은 빛의 속도로 방을 향해 달렸다.

아흑, 강다올. 나가 죽자. 죽어! 망신, 망신, 이런 개망신이 있나.

*

“으악! 미쳤다. 미쳤어.”

욕실로 들어선 다올의 얼굴이 점점 더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물론 새하얀 목과 앙증맞은 귀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얼굴로 쟤랑 말을 섞고 있었던 거야? 서지석! 이 인간은 얼굴이 이 모양이면……. 아흑! 아까 그래서 그랬던 건가?”

다올이 지석의 팔을 끌고 밖으로 나갔을 때 연신 그녀의 입술에 손을 갖다 대려 했던 그였다. 다올은 그런 지석의 마음도 모른 채, 그를 얼마나 한심하게 노려봤는지 몰랐다.

‘오빠! 지금 그러고 싶니? 아, 빨리 가.’

버럭 성질을 부렸다.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아마 제 얼굴을 본 지석은 오만 정이 아니라 십만 정도 다 떨어지지 않았을까. 늦은 후회였다.

“쪽팔려. 진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다올은 서둘러 화장 솜에 클렌징 오일을 덜어 흉하게 번진 입술화장을 지워냈다. 번진 화장을 지우듯 저 밖에 있는 녀석의 기억까지 지워버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덧대면서.

한참 입술화장을 지우는데 몰두하던 다올은 냉큼 화장솜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아예 따뜻한 물을 틀고 샤워를 시작했다.

어차피 저가 먼저 기다리겠다고 했으니까.

사실, 제아무리 넉살이 좋다지만 지금 이 민망한 기분으로 우빈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상태로 나갔다가는 괜히 주눅부터 들지 몰랐다.

축 처진 기분을 조금이라도 끌어 올려 보고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를 끝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뽀얗고 하얀 얼굴에 스킨과 로션을 톡톡톡 두드려 바르고, 헤어드라이어까지 켜고는 여유롭게 머리를 말렸다.

“저만 뭐 여유롭고 느긋한 성격인 줄 아나? 나도 한 여유 한다고. 이거 왜 이래? 그리고, 내가, 내 집에, 내 남자친구 데리고 왔는데, 뭐? 그게 어때서?”

따지고 보면 좀 전의 상황이 뭐 그리 대수일까 싶었다. 다 같은 성인들끼리. 그저 타이밍이 조금, 아주 조금 지랄맞았을 뿐.

상쾌한 기분으로 재무장한 다올이 30여 분 만에 문을 열고 거실을 향해 나섰다. 당당하게, 어깨를 쫙 펴고서. 그러나! 그렇게 주문을 걸었던 게 무색할 만큼 가슴 앞에 팔짱을 낀 채 저를 향해 시선을 둔 우빈을 보자마자 곧게 펴졌던 어깨가 슬그머니 내려가고 말았다. 흘끔흘끔 눈치를 보는 건 덤이었다.

저 카리스마 어쩔……. 아, 아니지, 괜히 주눅 들지 말자. 저가 뭔데, 여섯 살이나 많은 누나한테 눈을 치켜뜨는 건데? 웃겨. 진짜.

애먼 생각을 떨쳐내기라도 하려는 듯 다올이 고개를 좌우로 잘게 흔들었다. 작은 얼굴을 야무지게 치켜올리며 다소 뻔뻔하게 굴었다.

“좀 앉지? 그 눈에 힘도 좀 풀고.”

우빈을 쓱 지나쳐 소파로 간 다올이 천연덕스레 소파에 몸을 기대며 저를 못마땅한 듯 쳐다보는 그를 향해 뇌까렸다.

“허,”

“그래서, 넌 여기 얼마나 있을 생각인 거야?”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린 다올이 느긋하게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물었다.

“뭐?”

뭔가 부연 설명을 해도 모자랄 판에 앞뒤 다 댕강 잘라 먹고 다짜고짜 얼마나 있을 생각이냐니. 우빈이 대번에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네가 그렇게 고깝게 쳐다보면 어쩔 건데?”

“……클로이! 못 보던 새 많이 뻔뻔해졌네.”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침묵을 흘리던 우빈이 피식, 소리 내 웃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러는 우빈이 넌, 더 예의가 없어졌고. 누나한테 클로이가 뭐니? 클로이가? 여기 캐나다 아니고 한국이거든. 동방예의지국. 너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누나한테 더럽게 예의 없게 이름 부르는 거 아니고, 꼬박꼬박 누나라고 부르는 곳이라고.”

다올이 누나라는 말에 힘을 꽉 눌러 담으며 눈매를 뾰족하게 늘였다.

저 어린 녀석한테 대체 누나라고 불려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예쁘게 ‘누나! 누나!’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던 녀석이 언젠가부터 무조건 클로이라 불렀다. 이참에 누나 소리 좀 들어보자는 마음이었다. 초장에 저 못된 버릇을 고쳐놓고 우위에 서고 싶다는 마음도 없지 않았고.

“누나는 무슨?”

“그래, 그런 기본예절이야 차차 가르쳐 주면 되는 거고. 그래서 넌 여기 얼마나 있을 거냐고?”

피식 흘리는 그의 헛웃음은 지금 내 신경을 거스르는 게 아니라는 듯, 다올이 회심의 미소를 씩 날리며 되물었다. 조금 전 그녀의 말에 우빈이 살짝 움찔하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바로 봤으니까.

“같은 세입자 처지에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뭐, 뭐? 같은 세입자라니? 야, 한우빈! 엄연히 여기 내가 사는 집이거든.”

우위를 점하고 싶었던 다올의 바람과 달리 시큰둥하다 못해 시큼 떨떠름한 우빈의 대답에 다올이 펄쩍 뛰어올랐다.

“이거 이모 집이잖아. 내가 알기로는 이모 집에 네가 전세 사는 거로 아는데. 전세금이 20만 달러라고 했던가?”

다올이 펄쩍 뛰어오르건 말건, 우빈이 나직하게 피식거리며 팩트 공격을 이어갔다.

“우, 우리 엄마가 그래?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너한테 다 말했다고?”

급기야 소파를 박차고 일어난 다올이 우빈을 쏘아봤다. 아뿔싸! 이렇게 발끈하면 기 싸움에서 완전히 지는 건데, 하는 늦은 후회와 함께.

“그 나이 될 때까지 70만 달러도 못 모으고 뭐했냐? 지금은 더 있어야 사려나?”

우빈이 또 한방의 강력한 팩트 폭격을 날리며 쓰윽 아파트를 훑었다.

“70만 달러가 애들 장난인 줄 알아? 그게 얼마나 큰 돈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자그마치 7억이라고. 7억!”

찰나의 순간, 조금 전 샤워를 하면서 간신히 찾았던 마음의 평화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러니까, 7억도 없냐고? 공부한다고 프랑스 유학까지 갔었는데.”

“거기서 유학 얘기가 왜 나와?”

유학이라는 말에 괜히 뜨끔하고 만 다올이 커다란 눈을 또르르 굴러 내렸다.

“나 진작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설마 나 떼어 놓으려고 일부러 파리까지 간 건 아니지? 분명 내가 밴쿠버로 가겠다고 했는데. 그 말 끝나기 무섭게 유학가더라.”

“뭐……?”

아니, 이 귀신 같은 녀석을 봤나?

찰나의 순간, 눈과 입을 동그랗게 벌린 다올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제대로 정곡을 찔렸다고 해야 할까. 정말 귀신 같은 녀석이었다.

“그러는 저는? 저도 7억 없을 거면서?”

그의 물음에 대한 답은 않고 그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다시 7억으로 넘어왔다. 이 또한 좋은 주제는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