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봄날의 어느 날, 너와 나

20XX년 3월 2일. 아직은 춥기만 한 어느 이른 봄날. 달칵. 차 문을 가볍게 밀고 내린 도윤이 싸늘한 아침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다녀와.”

“다녀올게요.”

저를 이곳까지 태워다 준 기사님께 고개를 숙여 인사한 도윤이 크게 숨을 내뱉었다.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폐부 깊숙한 곳까지 들어찼다. 도윤이 떨리는 마음으로 발을 내디뎠다.

[OO 고등학교]

조그마한 새싹이 세상 밖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어느 이른 봄날. 도윤은 새로운 학교에 발을 들였다. 17살. 난생처음 갖게 된 ‘고등학생’이란 이름은 아직은 어색하기만 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학교는 휑했다.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본관으로 가까이 다가간 도윤이 긴장되는 마음을 감추려 애써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예비 소집일 날 한 번 와봤던 학교임에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일찍 온 걸까. 학교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흘끗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도윤이 입술을 잘근 짓씹었다. 시계의 시침은 이제 겨우 7과 8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쩌지….’

코끝이 시려 올 정도로 차디찬 날씨였다. 저를 태우고 온 기사님은 떠난 지 오래였고, 텅 빈 운동장엔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굳게 닫힌 유리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도윤의 시선 끝자락에 낯선 남학생이 들어왔다.

“….”

눈가를 덮은 앞머리와 그 틈으로 보이는 매서운 눈매. 일자로 굳게 닫힌 입술과 추위로 붉게 상기된 양 볼. 셔츠에 조끼, 넥타이에 마이까지.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남학생이 도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멀리서 봤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온 남학생의 키는 도윤과 엇비슷했다. 전체적으로 선이 가냘파서 도윤보다 훨씬 작아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쩐지 시선을 뗄 수 없는 묘한 매력을 가진 남학생이었다. 도윤의 시선은 남학생을 발견한 이후 쭉 그 애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낯설지만 불편하지는 않은 침묵이 도윤과 남학생 사이에 고요히 내려앉았다. 가만히 선 채 남학생에게 시선을 던지던 도윤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안녕?”

도윤의 인사에도 남학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도윤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남학생은 그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도윤이 멋쩍게 하하, 웃으며 남학생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학교로 돌렸다.

“아직 학교 문이 안 열린 건가?”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따갑게 느껴지는 남학생의 시선에 도윤이 뻘쭘한 듯,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낯선 이가 보내는 시선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남학생의 끈질긴 시선에 귀가 점점 홧홧해져 가는 것을 느끼며, 도윤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그런 도윤의 상태를 알아차린 건지, 남학생이 시선을 내렸다. 잠시 망설이던 남학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1학년이야?”

남학생의 음성은 생각보다 고왔다. 날카로운 인상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남학생의 음성에 도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도윤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아, 응! 너도….”

“문 열렸어.”

너도 혹시 1학년이야?

미처 내뱉어지지 못한 도윤의 물음이 입안을 공허하게 맴돌았다. 도윤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 그의 말을 끊어버린 남학생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응?”

“문 열렸다고. 들어가.”

“…어?”

“안 들어갈 거면 말고.”

남학생이 도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한쪽 어깨로 유리문을 힘주어 민 남학생이 학교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이에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어버버하고 있던 도윤이 황급히 남학생의 뒤를 쫓았다.

아무도 오지 않은 학교에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입학식은 9시부터인데 일찍 왔네.”

그리고 그건 저 남학생도 마찬가지인 걸까. 학교 벽면에 몸을 기댄 채 제게 말을 건네는 남학생의 모습에 도윤이 숨을 돌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혹시 선배면 어쩌지. 어색하게 반말을 내뱉은 도윤이 제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무리 친화력이 좋은 도윤이라도 선배에게 반말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 살에서 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어쩐지 그랬다.

그리고 여태까지 도윤이 겪었던 선배들은 후배에게 반말을 듣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혹시 저 남학생이 제게 왜 반말을 하냐며 화를 낼까, 도윤이 조마조마하며 힐끗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글쎄.”

다행히 남학생은 도윤의 반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눈썹을 으쓱인 남학생이 눈을 낮게 내리떴다.

다시금 어색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독한 적막 속, 도윤은 어떤 말을 내뱉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힐끗, 남학생의 눈치를 보다가도 누군가가 와서 이 어색한 공기를 깨트려 주진 않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도윤의 시야 저 너머로 낯선 여인의 모습이 걸렸다.

곧이어 유리문이 벌컥 열리고, 찬바람이 학교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머! 신입생이니?”

“네, 네?”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학교 안에 울려 퍼졌다. 여인의 목소리에 놀란 도윤의 몸이 순간 경직되었다. 저를 보고 딱딱히 굳어버린 도윤을 발견한 여인이 다급히 온화한 미소를 그려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입학식은 9시부터인데.”

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여인은 딱 봐도 학생 같아 보이진 않았다. 재빠르게 여인이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도윤이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도윤의 얼굴 위로 화사하게 피어나는 미소에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르르, 눈꼬리를 접어 내리며 웃는 도윤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했다. 부드럽게 말려 올라가는 입매와 반쯤 접힌 눈매 사이로 보이는 다정한 눈동자. 어쩐지 저 미소가, 저 남학생이 작년에 제가 가르쳤던 학생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여인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도은이 동생이니?”

조심스럽게 묻는 여인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네.”

“맞지! 너 도은이 동생이구나!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했어!”

“하하….”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입학식이라 긴장이 돼서….”

여인, 선생님의 질문에 도윤이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는 사이. 흘끗 남학생이 서 있던 곳을 스치듯 바라본 도윤의 얼굴에 순간 아쉬움이 서렸다. 역시나 남학생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아주 약간의 온기조차 남지 않은 채, 원래 없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져 버린 남학생에 도윤은 알 수 없는 아쉬움을 느꼈다.

*

“다시 한번 여러분의 입학을 축하하며….”

다섯 번이나 반복된 교장 선생님의 축하 인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도윤이 눈을 느릿하게 껌벅였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올라온 도윤을 향해 많은 시선이 집중된 상황이었지만, 도윤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사람들의 시선엔 익숙해질 대로 익숙했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익숙하게 받아치며 목을 뚜둑 꺾은 도윤이 주변을 휘익 둘러보았다.

“…….”

다른 학생들보다 시야가 높은 덕에 입학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강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긴장 반, 지루함 반으로 차 있는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던 도윤이 눈이 설핏 커졌다.

“…찾았다.”

온통 낯선 얼굴들 속, 익숙한 얼굴이 도윤의 시야에 들어왔다. 말 몇 번 나눠본 게 다이지만. 오늘 아침에 겨우 만난 존재이지만. 반도, 성격도, 심지어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지만, 어쩐지 자꾸만 눈길이 가던 남학생.

아침에 만났던 남학생을 발견한 도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남학생은 도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열심히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입학 축하 연설을 하는 교장 선생님을 바라보지도, 그렇다고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듣지 않고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신입생들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남학생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향해 도윤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남학생의 시선 끝에 걸린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린 도윤은 저도 모르게 맑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푸핫….”

남학생의 시선을 따라간 도윤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시계였다. 학생들의 피를 말려 죽일 작정인지, 아주 느릿느릿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시계.

난데없는 도윤의 웃음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의아한 눈으로 도윤을 돌아보았다. 이에 헛기침을 내뱉으며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을 지워낸 도윤이 다시금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나 남학생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아까처럼 소리 없이, 흔적 없이 그렇게 남학생은 자취를 감췄다.

남학생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도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우중충해졌다. 쭈욱 힘이 빠진 도윤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학생에게만 고정돼있던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그제야 주변의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루한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와 학생들의 낮은 속삭임이 도윤의 귓가를 공허하게 채워갔다.

남학생의 시선이 시계에만 고정되어 있던 이유를 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입학한 지 일주일째. 아직은 낯설지만 조금은 익숙해진 친구들과 함께 복도를 이동하던 도윤의 눈이 순간 크게 떠졌다.

“어…?”

“왜?”

도윤과 함께 체육 수업을 가던 친구들이 의아한 얼굴로 도윤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레 복도 한가운데 멈춰선 도윤의 모습에 친구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나, 나 잠시만.”

“응?”

“금방 갈게. 먼저 가 있어!”

도윤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의 등을 쭈욱 밀었다. 황당해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친구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윤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앞서 친구들의 곁을 떠난 도윤이 한 사람만을 향해 우다다다 달려갔다. 학교 복도에서 뛰면 안 된다는 사실은 이미 도윤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안녕?”

도윤이 해맑게 웃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 대상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도윤이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입학식 날의 그 남학생이었다.

남학생은 입학식 날과는 조금 다르게 편한 체육복 차림이었다. 체육복 지퍼를 목 끝까지 잠근 채 도윤을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남학생이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

“안녕.”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학생을 향해 도윤이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남학생의 시선은 넉살 좋은 도윤조차 그의 눈치를 보게 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도윤이 어색하게 웃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남학생을 발견하자마자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달려오긴 왔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남학생을 발견하고 그에게 말을 건넨다. 이게 도윤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안에는 남학생을 만난 후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등에 대한 계획이 단 1도 들어있지 않았다.

도윤이 남학생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도윤이 어색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걸까. 남학생이 작게 입을 벌렸다.

“…안녕.”

듣기 좋은 미성이 도윤의 귓가를 간질였다.

남학생의 대답에 용기를 얻은 도윤이 옅은 미소를 입가에 그려내며 물었다.

“우리 입학식 날 만나지 않았어?”

“……어?”

“나 기억 안 나?”

도윤을 잊은 걸까. 남학생의 얼굴에 순간 당황스러운 감정이 들어찼다. 그러나 이미 저 남학생이 저를 잊었을 거라 예상했던 도윤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니까 그때 이름을 안 알려준 것 같아서.”

“…이름을 굳이.”

“난 서도윤이야.”

“…….”

“1학년 1반 서도윤.”

제 말은 깡그리 무시하고 제 할 말만 하는 도윤의 모습에 남학생의 눈매가 좁혀졌다. 남학생이 저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말을 툭, 내뱉었다.

“…그래서 뭐.”

제 생각보다 훨씬 날카롭게 나간 말에 아차 싶었는지, 남학생이 황급히 제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지만 도윤은 여전히 해맑았다.

“넌 이름이 뭐야?”

남학생의 날카로운 반응에도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도윤의 모습은 남학생뿐 아니라 복도에 있던 친구들에게서도 관심을 끌어냈다.

“몇 반이야?”

도윤이 자연스레 남학생의 옆에 자리를 잡고 발을 느릿하게 옮겼다. 너무도 당당한 도윤에 남학생은 황당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너… 뭐해?”

“응?”

“너, 왜 그렇게 자연스럽게….”

“응? 내가 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순수하고 순진한 도윤의 눈빛에 남학생이 멈칫했다. 왜 나 따라와? 왜, 왜 내 옆에 서서…. 미처 내뱉지 못한 황당함이 남학생의 입안을 멍하니 맴돌았다. 그러나 차마 저 맑은 눈빛에 대놓고 저런 말을 내뱉을 순 없었기에.

“…아냐.”

남학생은 목 끝까지 차올라온 말들을 꾸욱 삼켜냈다.

뜬금없이 이상한 반응을 보이다가, 이내 입술을 꾹 다무는 남학생에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도윤이 눈을 껌벅였다.

“무슨 말 하려던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응?”

“…….”

도윤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남학생을 빤히 응시했다. 남학생이 고개를 획 돌려도 도윤의 시선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가 하려던 말을 알아내기 전까지 도윤이 쉬이 물러날 것 같지 않자 짧은 한숨을 삼킨 남학생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현.”

“어?”

“내 이름, 이현이라고.”

“이현?”

“응.”

이름도 예쁘네.

도윤이 속으로 생각하며 물었다.

“몇 반이야?”

“……7반?”

“7반?”

“으응….”

남학생, 현이 의뭉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반을 말하기 전, 현의 망설임을 그저 ‘중학생 때 반이랑 헷갈리나 보다’하고 생각한 도윤이 고개를 살랑살랑 끄덕였다.

“그럼 혹시 놀러 가도 돼?”

“…응?”

“너희 반에 놀러 가도 돼, 혹시?”

“…아니.”

도윤의 관심이 불편한 걸까. 현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설핏 고개를 내저었다. 현의 거절에 도윤이 아쉽다는 듯 쩝, 입맛을 다셨다.

“아직 그 정도로 친하진 않은가?”

“응.”

현이 단호히 답했다.

다른 아이들이라면 마음에 상처를 입을 만큼 단호한 대답이었지만, 다행히도 도윤은 멀쩡했다.

저런 단호하고 칼 같은 거절은 친누나인 도은에게 질릴 대로 들어본 도윤이었다. 제 제안을 단호하게 잘라내면서도 혹시 제가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하며 눈치를 보는 현은 도윤에게 ‘매운맛’이 아닌 ‘순한 맛’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럼 이제 앞으로 친해지면 되겠네!”

환하게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도윤의 모습에 왠지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 상황 속, 현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멍하니 선 채로 여전히 맑기만 한 도윤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이현!”

그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현이 미간을 티 나지 않게 구기며 제 어깨를 텁, 잡은 여학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현의 고개를 따라 시선을 옮긴 도윤이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여학생을 발견하곤 눈썹을 쓰윽 들어 올렸다.

‘2학년…?’

도윤을 발견하지 못한 여학생이 현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너 어디 가!”

“…….”

“너, 진짜로, 쌤한테 죽으려고…!”

“…저, 저기.”

“너 내가 수업 시간 늦지 말라고 했지!”

“저, 안녕하세요?”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도윤이 조심히 여학생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미친다, 미쳐.”

대차게 무시당했다.

“…저기요?”

“됐고, 쌤이 너 데리고 오래. 너 딴 길로 새지 않게 감시 잘하라고….”

“선배님?”

“예?”

현은 입을 닫고, 여학생은 쉴 새 없이 조잘대고, 도윤은 그런 여학생을 향해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그렇게 대답 없는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다.

제 어깨를 조심스레 톡톡 치는 손길에 그제야 도윤을 발견한 여학생의 몸이 퍼뜩 떨렸다.

“안녕하세요.”

도윤이 여학생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상치 못했던 도윤의 등장에 여학생이 당황한 건지, 어버버하며 고개를 마주 숙였다.

“아, 안녕. 1학년이에요?”

“네, 네.”

“아, 난 2학년 이새벽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1학년 서도윤입니다!”

여학생, 새벽이 사람 좋은 미소를 싱긋, 그려내며 말을 이었다.

“혹시 이현이랑 같이 어디 가는 중이었어요?”

“아, 아뇨. 그건 아니에요.”

도윤이 현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새벽의 손을 흘끗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냥 제가 현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어, 현이랑?”

“네.”

새벽의 눈동자가 세차게 요동쳤다. 새벽이 당황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읽어낸 도윤이 의아해하기도 전, 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배님.”

“……예?”

“저 왜 부르셨어요?”

고요해진 복도에 잔잔한 현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여전히 멍하던 새벽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고왔던 새벽의 얼굴이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