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남

푹푹 찌는 날씨였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른다.

덥다, 더워.

수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카페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말임에도 카페 안은 한적했다. 습관적으로 카페 창가에 앉아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봤다.

오후 3시 15분.

약속시간보다 일찍 온 것 같았다. 그냥 기다리자니 따분할 것 같아서 그녀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그녀의 나이 올해로 32살. 주변에 다른 친구들은 이미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그녀는 지금껏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했다.

나, 이러다 평생 시집 못 가고 노처녀로 늙어죽는 것 아니야?

갈수록 나이는 먹어가고 맞선도 여러 번 봤는데 아직도 적당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자 가끔은 섬뜩한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때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고소하면서도 기분 좋은 쓴맛이 혓바닥을 감돌았다. 입술에 묻은 부드러운 거품을 혀로 핥은 그녀는 이제 곧 만나게 될 맞선남에 대해 궁금해 했다. 오늘 맞선은 평소 친분이 두터운 선배언니가 주선한 자리였다. 이번만큼 조건 좋은 남자는 못 봤다며 언니는 잘해보라면서 그녀를 적극 응원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혹시 오늘 저랑 선보는 공수영 씨?”

창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기 좋은 중저음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말끔하게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깜빡거리던 그녀의 두 눈이 갑자기 화등잔만큼 커졌다.

“저기……!”

“네, 맞습니다. 김재준입니다.”

언니가 맞선남의 이름을 알려주었던가? 아니면 자신이 제대로 듣지 않았거나.

몹시 놀라 하는 그녀만큼은 아니더라도 재준도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침착하게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것은 우연인가, 인연인가. 어떻게 저 사람이?

내담자와 심리상담사로 만났던 사이였다. 그것도 바로 어제의 일이다. 그런데 어제 만났던 내담자가 오늘은 자신의 맞선남으로 짜잔! 하고 등장하다니.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일이었다.

수영은 아직도 들썩이는 가슴을 진정하려는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많이 놀라셨나봅니다.”

안 놀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예요. 하지만 수영은 내색하지 않은 채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조금요.”

“저도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만. 그럼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말씀할게요.”

아니, 뭘 더 얘기해요? 이러면 게임 오버된 것 아닌가. 내담자와 상담자 사이에 엄연히 결계가 있는 법인데, 만남은 여기서 끝이어야 했다. 만약 남자가 심리상담을 계속할 예정이라면 이렇게 된 이상 상담사도 바꾸는 게 치료적 관계에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고민이 많은 그녀와는 달리 남자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더 충격적이고 폭탄 같은 말을 던져왔다. 그것도 단도직입적으로.

“나랑 결혼합시다.”

“미, 미치셨어요?”

그녀가 냉큼 받아들일 만한 말이 아니어서 저절로 심한 말투가 나왔다. 하지만 남자는 어제보다 몹시 여유로워 보였다.

“보다시피 전 지금 멀쩡합니다.”

어제보다 정신이 또렷해 보이긴 했지만.

“싫은 이유라도 있습니까?”

멍청해 보이지 않는데 정말 몰라서 이렇게 묻는 걸까. 수영은 남자의 의도가 궁금했다.

재준은 생각에 잠긴 듯한 수영을 찬찬히 살펴봤다. 수영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차분하게 설명했다.

“김재준 씨, 우리는 엄연히 말해서 내담자와 상담자로 맺어진 치료적 관계에요. 모든 직업엔 직업윤리라는 게 존재하잖아요.”

“단지 그것뿐입니까? 그럼 그런 관계를 떠나서 공수영 씨는 제가 남편감으로 전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수영은 남자를 차분하게 살펴봤다.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이목구비와 얼굴선을 가진 남자였다.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름은 김재준, 나이는 34세, 직업은 변호사, 에니어그램 성격유형 중 1번 완벽을 추구하는 원칙주의자였다. 그리고 남자에겐 공황장애가 있다는 것까지가 그녀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수영은 자연스럽게 어제 남자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남자는 어제도 오늘처럼 말끔하고 깨끗한 정장차림을 하고 상담실을 찾아왔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어제는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는 점 정도일까. 완벽을 추구하는 원칙주의자답게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엄격한 타입이었고, 자기방어가 심한 사람이었다. 분명 과거에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것이 틀림없는데도 그는 쉽사리 자신이 겪었던 일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수영에게 이런 유형의 내담자를 경험하는 것은 한두 번이 아니라서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이럴수록 인내심이 필요했고, 초기의 치료적 관계에 필요한 신뢰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했기에 남자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달랐다. 그는 늘 결과물만 추구하는 목적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어제만 해도 그는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두 번 다시 공황장애를 겪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으니까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요.”

“공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남자는 단호했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그녀에게 똑바로 알려주었다.

재준은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는 눈앞의 여자를 찬찬히 여겨봤다. 단정하고 깔끔한 단발에 너무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부드럽고 선한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그동안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또다시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것보다 더 심한 것은 언제 불쑥 나타날지 모르는 공황장애였다. 그러다 보니 일과 생활 사이의 균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하는 수 없이 심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어제 만난 심리상담사는 마음에 들었다. 부드럽고 선한 인상이 좋았고, 너무 꼬치꼬치 캐어묻지 않아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맞선상대라니. 처음엔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인연인가, 우연인가. 어쨌든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어쩌면 꿩 먹고 알 먹는 좋은 노릇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 저한테 심리적 장애가 있어서 싫은 겁니까?”

“아, 그런 것은 아니에요.”

행여나 남자가 오해라도 할까봐 수영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 심리적 장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민되는 것은 직업윤리였다. 그리고 처음 맞선자리에서 다짜고짜 결혼하자고 하면, 네 좋아요! 대답하는 여자가 몇이나 되냐 말이다. 아마 정신머리 똑바로 박힌 여자라면 고민해보는 게 당연한 일이다.

“원래 뭐나 복잡하게 생각하는 편입니까?”

“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 이런 맞선 이제는 한두 번이 아닐 테고, 이런 거 이젠 지겹지 않습니까?”

네, 물론 지겹죠. 이러다 진짜 시간 낭비할까 걱정되고 평생 시집못가고 늙어죽을까 불안하거든요.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싶었다. 남자가 너무 서두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수영이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라서 조금 당황스러워서요.”

잠시 뒤 수영이 솔직하게 말하자 재준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에 대한 기본정보는 이미 다 알아봤을 테고 나머지는 천천히 알아가죠. 저는 수영 씨가 마음에 듭니다. 동시에 수영 씨 입장 충분히 이해합니다. 고민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해보고 연락 줘요. 그리고 저는 상담자를 바꾸지 않을 겁니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곧 의뢰인을 만나러 가야 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재준은 그녀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뭐가 그리 급한지 마실 것 하나 주문하지 않고서 용건만 끝내고 그대로 가버린 남자였다. 수영은 멀뚱한 얼굴로 앉아 손으로 그가 남긴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만약 치료적 관계로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수영은 생각했다. 언니의 말처럼 남자의 조건은 상당히 좋았다. 돈 잘 버는 변호사라서 평생 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고, 성격이 까칠하고 딱딱해도 매너 좋고 예의가 있었다. 결혼상대로 이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직업적인 윤리 의식이 마음에 걸리며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

책상 앞에 앉은 재준은 최근 새로 담당한 사건에 대한 서류를 보고 있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결혼은 살면서 누구나 한번 쯤 겪는 인생의 중대사지만 그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일과 승소였다. 평생 워커홀릭으로 살아도 별 지장이 없었지만 문제는 부모님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하게 전화를 걸어와 언제 결혼하느냐며 재촉을 하지 않으면 타박을 했다.

그는 누군가에게 강요받거나 누군가가 자신을 재촉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리하여 부모님의 전화는 고스란히 그에게 스트레스가 되었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자면 정말 아무 여자나 잡고 결혼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아무 여자와 결혼할 바엔 그래도 이해심이 넓고 착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이런 면에서 볼 때 공수영은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결혼 상대였다. 게다가 그녀는 심리상담사이다. 어쩌면 그의 공황장애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주기적으로 심리 상담센터를 찾게 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류에서 눈을 뗀 재준은 습관적으로 담배를 찾았다. 담배는 한 대 밖에 남지 않았다. 점심을 건너뛰었기에 배도 고팠다. 라면으로 대충 때우면 되겠지. 편의점에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킨 재준은 지갑을 챙기고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바깥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아파트 주변은 한산했다. 편의점은 여기서 멀지 않았다. 재준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빨리 걸었다. 드물게 바람이 불어와 그의 얼굴을 근질거렸다. 요즘처럼 찜통 같은 더위에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기분이 좋았다. 조용하던 주변이 갑자기 시끄러워진 것은 그가 한창 기분 좋음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교복을 입은 남학생 서너 명이 욕설을 퍼부으며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쭈, 이놈의 자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쌈질이나 하다니.

요즘 애들 무섭다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리는 더 커졌다.

“야, 니들 여기서 뭐해?”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그냥 못 본 척 지나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지랖 넓게 나섰던 것은 혹시라도 남학생이 맞아 죽을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후회했지만.

거리가 좁혀지자 남학생들이 잠시 발길질을 멈추었다. 그중에 싸움 좀 하게 생긴 키 크고 덩치 큰 남학생 한 명이 건방지게 재준을 째려봤다.

오호, 요것 봐라. 어른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불고 있다니.

그러나 금방이라도 뭘 꼬라봐, 하며 자신에게 덤빌 것 같은 남학생들의 험악한 기세에 재준은 조금 움찔한 상태였다. 그래서…….

“니들, 밥은 먹었니?”

이게 아닌데, 전혀 이상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덩치 크고 불량스러워 보이는 남학생이 피식,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뇌까렸다.

“아저씨는 그만 꺼져 줄래요?”

조금 전까지 맞고만 있던 남학생이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니들 밥은 먹었니? 하고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며 불쑥 끼어든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멍청한 말을 하나, 그런 표정이었다.

“음, 금방 갈 거야. 근데 니들 여기서 싸우면 안 돼.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집 가라.”

“그냥 제 갈 길이나 가지. 당신 때문에 괜히 일만 복잡해졌잖아.”

맞고 있던 남학생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아니, 맞아 죽을 뻔한 걸 구해줬더니 고맙다는 말은커녕 보따리 내놓으라 하는 격이다. 재준은 어이가 없었다.

덩치 큰 남학생들이 점점 거리를 좁혀오며 빈정거렸다.

“아저씨, 재수 없어.”

이놈의 자식들 진짜 버르장머리하곤!

그들을 혼쭐내야 하는 게 마땅한데 재준은 그런 생각과는 달리 어떻게 하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고 틈만 노렸다. 인원수가 많은데다 모두 키 크고 덩치가 컸다. 괜히 맞붙었다간 자신만 손해 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이를 잔뜩 먹고, 고삐리들한테 맞으면 너무 쪽팔리니까. 그리고 자신이 조금 전 구해주었던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남학생은 생각처럼 나약해 보이지 않아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아하, 니들 진짜 좋은 말로 해서 못 알아먹는구나. 경찰에 신고……”

그러나 뒷말은 바람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는 주먹에 파묻혔다. 하지만 재준은 상한 곳 없이 멀쩡했다. 어느새 휙 귀신처럼 곁에 다가온 남학생이 재준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잽싸게 받아냈기 때문이다.

“어, 너……?”

“이제 그만 꺼져줄래요?”

엄연히 말해서 그를 구해준 사람인데 뭐가 그리도 마땅치 않은지 남학생이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재준은 어안이 벙벙해서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 맞고만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혼자서 서넛을 상대로 빛의 속도로 휙휙 날아다니며 싸우는 것 보면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행동이 매우 빠르고 민첩한 녀석이었다.

바람소리와 주먹이 맞부딪쳐 나는 마찰음, 그리고 욕설소리는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너, 이 새끼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콱 뒈져버려!”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뒤 소란스러움이 잦아들면서 발소리도 점차 멀어져 갔다. 배은망덕한 남학생이 터벅터벅 몇 걸음 걸어오더니 땅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신경질적으로 어깨에 걸쳤다.

“야, 너 진짜 싸움 잘하더라.”

재준이 그에게로 걸어가며 감탄하듯 말했지만 남학생은 아예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까는 왜 맞고만 있었니?”

남학생이 잠깐 걸음을 멈추고 재준을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 참 사람 귀찮게 하는 어른이었다. 만약 끼어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일찍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부러 맞고 있었는데. 남학생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재준이 바싹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너, 병원 가야겠다. 얼굴 입술 다 찢어졌네.”

눈 주위가 붓고 멍이 들어 분명 아플 텐데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는 남학생을 보고 재준은 혀를 찼다.

“아, 진짜 사람 귀찮게 하는 아저씨네. 아저씨, 그렇게 할 일 없어요? 연애 안 해요? 얼른 집 가서 밥이나 먹어요.”

재준에게 잡힌 팔을 거칠게 풀어내며 남학생이 신경질을 냈다. 기가 막혀하던 재준이 남학생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조그만 게 진짜 까분다!”

“아, 씨!”

남학생이 입술을 비틀며 휙 자신을 노려보자 재준은 지레 쫄았다. 이러다 괜히 성질 나빠 보이는 남학생에게 한 대 맞는 게 아닌가, 했다. 그는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차근차근 타일렀다.

“야, 인마. 너 그 꼴로 집 들어가면 식구들 걱정하잖아. 그리고 상처 제때에 치료하지 않으면 큰 일 나!”

정말 귀찮았지만 도리 없는 말은 아니었기에 남학생은 하는 수 없이 동의했다. 하지만 남자를 따라 병원에 들어서서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을 치고 후회해야 했다.

상처를 치료하고 꿰매고 나면 저 남자가 저절로 알아서 떨어져 나갈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보호자에게 연락하란다. 자신이 부담한 치료비를 받겠다는 것이다. 생긴 것과 달리 치사하고 찰거머리 같은 인간이다.

남학생은 재준을 비딱하게 노려보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깟 돈 안 떼먹어요. 계좌 찍어주세요.”

“내가 그 말 어떻게 믿니?”

“속고만 살았어요?”

“널 믿을 수가 있어야지.”

행여나 자신이 도망갈까 앞에 장승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남자의 기세를 보니 이대로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지금 누나에게 전화를 하면 누나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한달음에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흉한 몰골을 보고 식겁하며 대충 넘어가지 않겠지. 아, 생각할수록 골치 아팠다.

복잡한 표정을 짓는 남학생에게 재준이 재촉했다.

“야, 퍼뜩 전화안하고 뭐해? 여기서 날 샐 거야? 나 굉장히 바쁜 사람이야.”

에이 씨!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게 분명했다. 아까 딱 버티고 남자를 따라 병원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이다.

“지금 한다고요! 정말 짜증나!”

남학생이 재준에 대한 분노를 담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소리쳤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낸 남학생이 누군가에게 전화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재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은근히 신경 쓰이게 하는 녀석이었다. 남에게 맞아 죽든 말든 그때 그냥 지나쳤다면 모를까. 도와줄 바엔 몸도 성하지 않은 애를 보호자에게 넘겨주고 가면 시름이 놓일 것 같았다. 그래서 치료비를 핑계로 보호자에게 얼른 연락하라고 재촉했던 재준이었다.

통화가 끝났는지 남학생이 찌푸린 얼굴로 재준을 쏘아봤다. 이제 만족하시냐고!

재준은 짐짓 팔짱을 낀 여유로운 표정으로 남학생의 옆에 앉아 곧 만나게 될 보호자를 기다렸다.

남학생의 보호자는 그로부터 30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수혁아, 수혁아…….”

전화를 받자마자 곧바로 뛰어왔는지 트레이닝복 차림을 한 여자는 숨이 찬 목소리를 내며 수혁을 불렀다.

“누나.”

누나가 걱정할까 괜찮다는 듯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수혁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그의 얼굴을 잡고서 요리조리 살펴봤다.

“너 얼굴 왜 이래? 누구한테 맞았어? 어?”

이것은 우연인가, 인연인가. 짧은 시간 동안 벌써 세 번째 만남이었다. 우연이 세 번이면 인연이라 했는데.

공수영, 공수혁. 남매였나.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대한 놀라움을 숨긴 재준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수영이 그제야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간편한 옷차림에 슬리퍼를 신었지만 그래도 잘생긴 건 여전한 남자의 얼굴이 눈동자에 오롯이 들어왔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손짓했다.

“어, 어, 저기……?”

“네, 김재준입니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침착하게 말하는 재준과 옆에 어정쩡해 있는 수혁을 번갈아 보던 수영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재준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혹시 댁이 얘를 때렸어요?”

엄한 사람 잡는 것도 집안내력인가. 물 빠진 놈 건지니 봇짐 내놓으라는 격의 수영의 반응에 재준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때린 게 아니라 애들한테 맞아 죽을 뻔한 걸 구해준 겁니다.”

“웃기고 자빠졌네! 대체 누가 누굴 구해?”

재준의 침착한 설명에 옆에 앉아 있던 수혁이 흥, 하고 콧방귀를 꾸며 비웃었다.

남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수혁이 오늘처럼 얼굴 다치고 입술 찢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상황을 찬찬히 정리해보던 수영이 수혁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아, 씨! 아파.”

얼굴을 찡그리는 수혁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며 수영이 따발총처럼 잔소리를 했다.

“이놈의 시키. 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또 애들이랑 쌈질했니? 오늘 학원도 땡땡이 쳤지? 너, 진짜 단단히 미쳤구나. 공부는 할 거야, 말 거야?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니?”

그녀의 부드러운 모습만 봐왔지, 이런 과격한 모습은 처음이라서 재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수혁이 그런 재준을 휙 째려봤고, 수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사람을 면전에 두고 이 무슨 추한 짓인지. 그것도 짧은 시간 동안 연속 세 번이나 만난 남자 앞에서.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수영은 재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였다. 깍듯하게 남자에게 인사하는 누나의 순진함에 수혁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빨리 만날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또 보니 반가워요.”

반가워하는 재준이와는 반면 수영은 뜻밖의 만남에 조금 당황스러워 했다.

뭐야, 두 사람 아는 사이라도 돼? 남자와 누나를 유심히 관찰하던 수혁의 표정에 의문이 서렸다.

“아, 참 치료비는 얼마였죠?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어요.”

수영이 미안해하며 서둘러 지갑을 꺼냈다.

왠지 이번 만남이 끝이 아닐 것 같았다. 곧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에 재준은 극구 사양하며 먼저 자리를 떴다.

오호, 이것 봐라. 치료비 때문에 보호자에게 연락하라고 난리법석을 떨 땐 언제고, 지금은 가증스럽게 위선을 떨다니.

꼴사나워 못 보겠다는 듯 가방을 들쳐 멘 수혁은 앞장서서 걷는 재준을 한달음에 따라잡았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터덜터덜 걷는 재준의 정수리로 서늘한 시선이 바싹 따라붙었다.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자 입가에 비딱한 비웃음을 걸친 수혁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저씨, 다음에 또다시 오지랖 넓게 남의 일에 끼어들면 그땐 아마 큰 일 날 걸요. 밤길 조심해서 가요.”

수혁의 경고 비슷한 어투에 재준은 맞받아치는 대신 피식 웃었다. 어느새 뒤쫓아 온 수영이 대화를 엿들은 모양인지 수혁의 머리통을 콩 하고 쥐어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