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슬픈 운명의 시작

추적추적 내려야 하는 비가, 몽글몽글하게 내리는 이상한 한여름 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부슬부슬 떨어지는 비의 자태가 영롱하니 아름다우면서도 뭔지 모르게 처연하고 슬프게도 보이는 묘한 날이었다.

래환은 평소와는 달리 피곤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여유 덕분이었다.

저녁 시간엔 늘 사업차 약속이 존재했다. 하지만 10년을 함께한 남 비서가 이대로 가다간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길 것 같다며 강제적으로 일정을 잡지 않았다. 그 덕에 래환은 여유로운 저녁을 맞이할 수 있었지만, 집에서 뭘 해야 할지 아주 몹시 난감했다. 홀로 덩그러니 집에 있는 이 시간이 더없이 낯설었다.

게다가 비라니.

고요함 속에 빗소리까지 더해지니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꿀렁거렸다. 쓸쓸한 것도 외로운 것도 같고, 마음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지는 것도 같았다. 누군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했다. 오늘은 그냥 일적인 관계 말고, 지인이나 친구 말고, 아주 낯선 이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생각을 불러들인 이 쓸데없는 감정들을 지우고 싶었던 래환은, 집을 나와 무작정 차를 몰고 나왔다.

‘끼이이익!’

사고는 순간이었다.

아주 잠시, 차창 밖으로 고개를 1초쯤 돌렸을 뿐인데 그 잠깐 사이 차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은 래환은 다급히 차에서 내려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그는 가만히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여자를 살폈다. 다행히 여자와 차는 닿지 않았다.

정확히 깻잎 한 장 정도의 거리.

빗길에 바퀴가 조금만 더 미끄러졌어도 여자의 허벅지를 쳤을 것이다. 경기도 외곽 한적한 시골길 2차선 도로에 속도를 내어 달리지 않아 망정이지, 큰 사고가 날 뻔했다.

다행이다 싶은 안도감도 잠시, 의문이 불쑥 튀어 올라왔다.

이 야심한 시각.

시골길 도로 한복판에 왜 서 있는 걸까?

그것도 이리 비가 내리는 날에.

기괴하고 괴이한 감정이 들려던 찰나였다. 납량특집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 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들던 그 공포감은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다만, 그 사이로 아주 몹시 놀라고 당혹스러운 감정이 튀어나왔다.

“어? 당신은.”

그때 그 여자다.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도도하게 그림만 뚫어져라 봤던 신비로워 보이던 갈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 하나 없는 여자.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신비로우면서도 슬프게, 소름 끼치도록 매혹적으로 보였던 여자.

관심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고, 관심이 없다고 하기에는 관심이 갔던 그 여자.

3년 전, 한 정치인 자녀의 전시회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후 잊히지 않았던 바로 그 여자.

왜 이 여자가 이 시간에 왜 비까지 맞으며 여기 있는 거지?

당혹스러운 의문에 갈등이 더해졌다.

처량하게 젖은 이 여자를 아는 척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더 굵어졌다.

이미 많은 비를 맞은 이 여자를 비에 더 노출시킬 수는 없다.

“안지안 씨 맞죠? 나 신진건설 강래환 사장입니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 차에 타시죠. 비가 많이 옵니다.”

그의 말에 안지안이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맞춘다.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텅 비어 버린 위태로운 눈빛.

그는 안지안의 시선에 멈칫했다.

너무 슬퍼서, 그 슬픔을 감출 엄두도 못 내는 자포자기한 여자의 자태.

뭔데,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 여자에게 어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구나 직감하는 것도 잠시, 그는 그 궁금증을 내려놓고 다시 안지안에게 말했다.

“잠깐, 부축 좀 하겠습니다.”

‘타세요.’라는 말로 권유를 해 봤자 차에 오를 것 같지 않은 안지안을 차에 태우기 위해 그는 미리 양해를 구하고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안지안은 어떤 거부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이끌림을 순순히 따랐다.

안지안을 차에 태운 그는 차 뒷좌석에 걸어두었던 정장 재킷을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비를 흠뻑 맞은, 단추가 세 개나 풀린 하얀 블라우스가 몸에 찰싹 달라붙어 안지안의 속살과 몸 라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빗물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그녀의 목덜미도 아주 위험하게 보였다. 그 모습이 다른 사람에겐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에게는, 아주 위험했다.

그는 자신의 재킷을 건네고 일부러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입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안지안의 움직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힐끔 고개를 돌려 안지안을 확인했다. 안지안은 그저 무릎 위에 재킷을 가만히 둘 뿐, 입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지안의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얼굴에 묻은 빗물이 또르르 안지안의 하얀 목덜미로 굴러떨어진다. 빗물은 움푹 팬 쇄골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아무래도 일단 저 빗물부터 처리해야겠다.

그는 다급히 차 안에 휴지를 찾다 문득 습관적으로 넣어 다니는 손수건을 떠올렸다. 다급히 뒷주머니에 속을 넣자 손수건이 잡혔다.

“감기 듭니다. 이걸로 닦고 옷 입으시죠.”

그 말끝에 미동도 없던 안지안이 그의 손아귀에서 손수건을 챙겨 들었다.

안지안은 손수건을 펼쳐 조심스럽게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그는 무심코 안지안을 쳐다봤다.

하얀 피부 결에 반달눈썹, 반달 곡선의 이마를 따라 내려오는 콧날, 조금은 도톰한 붉은 입술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새까만 검은색에 웨이브를 준 긴 머리.

너무 깡마르지 않은, 그렇다고 통통하지도 않은 적당한 살집을 가진 품에 안으면 쏙 들어올 작은 육체.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귀여운 작은 새처럼 생겼으나 결코 함부로 취급할 수 없을 것 같은 고급스러우면서도 청초한 아우라를 가진 여자. 그리고 아주, 아주 미묘하고도 신비로운 투명한 갈색빛의 눈동자를 가진 여자.

예쁜 건 알고 있었는데.

흠씬 비를 맞은 모습이 이렇게 예쁠 일인가.

쿵.

그는 자신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너무 예쁜 안지안의 모습이 그의 심장을 너무 강하게 강타했다.

“큼.”

절로 헛기침이 튀어나올 만큼.

이거, 진짜 위험하네, 젠장. 정신 차려라, 강래환.

그는 순간적으로 드는 감정에 잠시 마음의 동요를 안식시키려 하던 그때, 안지안이 불쑥 손수건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안지안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화답했다.

그 대답 끝에 복숭아 향에 가려진 알코올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다.

“부딪힌 거 같진 않은데, 그래도 놀랐을 테니 병원부터 가는 게 좋겠죠?”

“…아니요. 병원 가고 싶지 않아요.”

“그럼… 혹시 근처에 일행 있습니까?”

“아뇨. 없어요, 일행.”

“이 시간에 여길 혼자 있었습니까? 차 가지고 왔어요?”

“걷다 보니, 온 거예요.”

“네?”

아니, 어디서부터 걸었길래, 서울에 사는 사람이 경기도까지 걸어왔단 말인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그는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술에 취해 보이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 어디시죠? 안 회장님댁은 청담동으로 알고 있는데.”

그의 말끝에 안지안이 고개를 꺾어 그를 응시했다.

“기억력 좋으시네요. 우리 3년 전에 딱 한 번 봤지 않나요? 김 의원님 딸 미술 전시회에서.”

어? 뭐야. 날 기억해?

이번엔 그가 놀랐다. 안지안이 이렇게 정확히 그를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3년 전 아주 잠깐, 방금처럼 무슨 일하는 누구입니다, 정도의 인사만 나눴을 뿐이었는데, 이 여자도 그날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재밌네, 이 상황. 우연치고는 참.

“안지안 씨도 기억력 좋으십니다. 그걸 기억하시고.”

“…집 말구요. 서울에 잘 아는 술집 있음 데려다주세요.”

술집을 데려다 달라니, 상관할 일은 아닌데 말이야.

안지안이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담담하게, 태연하게 그렇지만 어딘지 처량하게 말을 이었다.

“아님 이 근처에서 나랑 술 한잔할래요?”

상관할 일은 아닌데, 이 여자 자꾸 상관하고 싶게 만드네.

“나도 같이 술 한잔하면 좋은데, 안지안 씨가 이미 많이 마신 거 같으니까 다음에 하죠. 집으로 가요.”

“강래환 씨 여자친구 있어요?”

술을 진짜 많이 마셨군.

대화가 너무 두서없다. 하나의 화제로 이어지지 않고, 이리저리 튀어 다닌다.

종잡을 수 없는 안지안의 질문에 그는 헛웃음이 터졌다. 앞뒤도 없이, 맥락도 없이 질문을 툭툭 던지는 이 여자가 웃긴다.

“없습니다. 그건 왜 물어요?”

“그럼….”

“….”

“오늘 밤 나랑 같이 있어 줄래요?”

“…네?”

“나랑 있어 주면 안 돼요? 오늘, 하룻밤만.”

하.

하하.

뭐, 뭘 해 달라고?

그는 진심으로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그 웃음 끝은 길지 않았다. 정면만 응시하던 안지안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그 시선 때문이었다. 많이 취했군, 이라고 치부하기엔 진심처럼 보였다.

진심을 넘어서 절실해 보이기까지 했다.

래환은 오늘,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아주 멀쩡한 정신을 가진 날이었고, 어떤 날보다 이성이 충만한 그런 날이었다.

다만 비가 너무 아름답게 내려서, 낯선 이와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곁에 누군가가 있어 주었으면 하는 그런 날, 난데없이 등장한 낯선 이 여자가 그의 본능을 슬그머니 끄집어내어 버렸다.

*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입맞춤이었다. 본능적인 움직임은 성급했다.

호텔로 오는 내내 인내심 테스트를 치러야 했던 그는, 이제 1초라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인내가 한계치를 넘어서 버렸다. 그는 호텔 룸으로 들어서자마자, 안지안의 목덜미를 두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더욱 그녀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기 위한 손길이었다.

안지안도 그의 목덜미를 팔로 감으며 끌어안았다.

더욱더 깊게 들어와 달라는 신호처럼.

그는 거친 키스를 이어가며 침대 위로 안지안을 눕혔다. 안지안의 심장인지, 그의 심장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으나, 그의 가슴에 둥둥둥 울림이 들린다.

그는 잠시 키스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안지안을 내려다봤다.

“후회 안 하겠습니까?”

안지안의 촉촉한 눈동자가 흔들린다.

안지안의 눈동자는 내면의 갈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안지안의 갈등에 아차 싶었다.

안지안의 입에서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주는 극도의 짜릿함을 느끼기 위함이었지, 진짜 안지안이 후회할까 고민하게 만들기 위한 물음이 아니었다.

그저 안지안이 후회하지 않는다며 자신을 더 끌어안아 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말에 흔들리다니.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아니, 안지안이 멈춘다 한들 그는 못 멈춘다.

안지안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며 입을 벙긋거렸다.

“후회한다고 하면, 멈출 거예요?”

“그러기엔 늦었죠.”

그는 다시금 안지안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미 차 안에서, 안지안의 입을 타고 오늘 밤 함께 있어 달란 말이 흘러나온 그 순간부터, 이 상황은 멈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천천히 안지안의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점점 아래로, 빗물이 고였던 그녀의 쇄골의 곡선이 손바닥에 찰싹 붙는다. 그가 검지로 안지안의 쇄골라인을 따라 그녀의 척추를 쓸어내리자, 손등 위로 안지안의 차갑게 젖은 블라우스가 무겁게 짓눌렀다.

안지안의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언제부터 이렇게 차가웠는지 알 길은 없지만, 일단 안지안의 몸을 데우는 것이 급선무 같다.

“당신 몸부터 녹여야겠군.”

그는 안지안 곁에 모로 누웠다. 그러고는 안지안의 머리 아래로 팔을 쑥 집어넣고,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을 향해 모로 눕도록 만들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커다란 이불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지안의 온몸을 덮듯이 꼭 끌어안았다.

안지안의 작은 몸이 그의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뜨거운 그의 살결과 차가운 안지안의 살결이 만났다.

뜨거움이 갑작스러운 차가움을 만나서인지,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자 안지안이 손에 힘을 주어 그의 가슴팍을 밀었다.

“내가, 너무 차갑죠? 뜨거운 물로 몸 좀 녹이고 올게요. 그게 낫겠어요.”

“이게 더 빨라요. 가만있어요.”

그는 자신의 가슴팍을 밀고 있는 안지안의 손을 자신의 목덜미에 내려놓고는 품 안으로 더욱 그녀를 끌어당겼다. 잠시면 되겠다 싶었다. 이렇게 꽉 껴안고만 있으면 이 여자의 몸이 금방 녹겠다 생각했지만, 그 생각이 짧은 생각이었음을 알았다.

젠장.

그저 가만히 안고만 있을 수가 없잖아, 이건!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의 몸체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포옹만 하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먹잇감을 눈앞에 놓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한 마리의 짐승이 먹잇감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있을 수 있나.

그 본능은 눌러도 눌러질 수 없는 거다.

육체는 이미 그의 정신적 지배를 벗어난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는 안지안에게 바짝 몸을 밀착시켰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그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지안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잠깐도 못 참겠어요.”

어떤 통제도 먹히지 않는 제멋대로의 움직임.

“앗, 잠깐!”

당황한 안지안의 제지가 있었으나 그 제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안지안은 항복하듯 그의 팔뚝을 꼬집듯 움켜쥐었다.

안지안의 몸은 예상보다 빠르게 녹아갔다. 점점 뜨거워지고 있음이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러니까 당신 몸이 더 빨리 녹는군.”

그는 안지안의 가냘픈 목덜미를, 부드러운 손을, 탄탄한 허벅지를, 앙증맞은 발을 차례로 만져보았다. 어느 곳 하나 열기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녀의 작은 발끝까지 온전히 온기가 가 닿았다.

예열.

안지안의 몸은 충분히 예열되었다. 그를 받아들일 수 있게, 그를 더욱 큰 흥분에 젖을 수 있도록 뜨겁게, 뜨겁게 예열됐다.

그는 손으로 안지안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안지안, 당신 몸 뜨거워졌어.”

“…흠. 더 따뜻하게 만들어줘요.”

“그래주지.”

그는 부드럽게 안지안의 입술을 머금었다. 하지만 부드러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안지안의 들숨과 날숨이 거칠게 요동쳤다.

“하아, 천천히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아플 지경이에요.”

그의 뜨거운 키스가 버거웠던지 안지안이 그의 어깨를 밀치며 힘겨운 눈빛을 보내왔다.

그는 그런 안지안의 구겨진 이맛살을 검지로 꾹 눌렀다.

“그거 압니까? 신은 인간에게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준다는 거. 감당할 수 있는 거니까 좀만 참죠. 곧 좋아질 테니. 내가 좋아지게 만들어 줄게요.”

진심이었다.

안지안에게 오늘 밤, 두 번 다시 없을 황홀함을 선사해주고 싶었다.

강래환을 각인시켜주고 싶었다. 영원히 잊지 못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는 다시금 안지안의 입술을 집어 삼켰다.

더욱 뜨겁고 짙게, 그러면서도 보드랍고 달콤하게.

안지안이 이 환희의 맛을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안지안에게 강래환을 각인 시키겠단 계획은 엉뚱하게도 안지안이 아닌 자신에게 통해 버렸다.

스치듯 본 안지안의 촉촉한 눈동자를 마주치자마자, 강래환 심장에 안지안 각인.

그는 안지안을 품에서 떼어냈다.

“하! 하하하!”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과 함께 욕설도 튀어나오려 했다.

젠장. 어이가 없다.

안지안에게 강래환을 각인시키겠다고?

안지안 눈빛 한 번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안지안한테 빠져 버려 놓고선?

인내심이라고는 지나가는 똥개한테 줘 버려 놓고선?

안지안에게 강래환을 각인시키겠단 계획은 이 안지안 눈빛 한 번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것이 그는 놀라우면서도 황당하다 못해, 기막혔다.

이렇게까지 참을성 없던 적이 있었나?

이렇게까지 여자 앞에서 이성을 잃었던 적이 있었나?

분명, 키스를 하고 있음에도 키스를 하고 싶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망을 품어 본 적이 있었나?

이렇게까지 계속,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란 적이 있었나?

그는 안지안을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안지안도 그의 품에서 어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 이제 그만 일어나도 돼요?”

내내 가만히 그의 품 안에 갇혀 있던 안지안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안지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 밤을,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다는 마음을 담아서.

“이제 시작인데 벌써 일어나면 안 되죠.”

그는 안지안이 어디로 도망가지 못하게 그녀의 목덜미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이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부질없는 마음을 담아서.

이토록 깊은 잠을 잔 적이 또 있었을까?

그는 저 멀리 무의식을 밀며 서서히 들어오는 의식 속에서 첫 의문을 떠올렸다.

아홉 살, 신진그룹의 적자이나 친어머니가 죽고 자신보다 나이 많은 서자를 둘이나 데리고 들어온 새어머니 최 여사로 인해 입지가 극도로 불안해진 그 순간부터, 그는 잠을 편히 잔 적이 없었다.

막아줄 배경 하나 없는 적자로 사는 삶은 불안했다. 그는 두려움과 공포심에 사로잡혀 삶을 살아내야만 했다.

성인이 되었을 땐,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를 매섭게 짓눌렀다. 잔뜩 뒤엉킨 불편한 감정들이 그를 편히 잠들 수 있게 해주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는 숙면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여자를 품에 안은 채 이렇게 편히 그야말로 죽은 듯이 깊은 잠에 빠져든 건.

지금껏 그 어떤 여자도 이런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 그 어떤 여자의 품에서도 숙면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사실, 그 어떤 사람의 품에서도 잠들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거추장스러웠다. 오히려 곁에 누군가가 있으면 잠들지 못했다. 아무리 격한 운동을 했어도.

어제는 달랐다. 안지안은 달랐다. 안지안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이 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어처구니없는 마음이 샘솟을 만큼.

평온 그 자체였다. 그 평온함 속에서 언제 잠에 빠져들었는지 모르게 잤다. 그 마지막, 그녀에게 한 말만 생각이 났다.

“내일을 기약합시다. 안지안 씨.”

그 말을 끝내고 마치 수면제라도 먹은 사람처럼 잠이 들었다.

그 생생한 기억에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무의식이 완전히 걷히고 의식이 들어오자 눈을 떴다. 그러고는 본능적으로 옆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