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여진여몽

“대체 왜 접으라는 거야. 대체 왜!”

30분 전, 조교실에 울려 퍼지는 한 통의 전화에 발걸음은 지도 교수님의 연구실로 향했다. 난감한 표정을 드리우며 한껏 긴장한 얼굴로 그곳에 발을 내딛자 마주치기 힘든 그림자는 자리를 함께했다.

“자네가 우수인가?”

“네. 총장님.”

“시간 좀 내주지? 할 말 있어서 그러는데.”

총장님의 말에는 물음표가 빠져 있었고 걸걸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다. 지도 교수님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들키지 않을 만큼의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총장님. 하실 말씀이…?”

“으흠, 저기 그게 말이야. 자네가 논문 준비 중인 거 말인데…….”

총장은 자신의 말이 어떤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지켜보고 있던 지도 교수님은 살며시 손을 잡으며 입술을 뗐다.

“저번부터 했던 말이라… 예상할 거로 생각해. 부탁인데, 네 논문… 다른 주제로 바꾸면 안 될까?”

“교수님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유라도 알려 주셔야 제가 생각이라도 해보지 않겠습니까? 혹시 학교에 후원하는 기업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총장님과 교수님을 향해 직설적으로 말을 내뱉자 둘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연구실 안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안을 비추던 햇살이 구름에 가리자, 감정은 점차 증폭되어 갔다. 그러자 걸걸한 목소리를 품은 남자는 자신 앞에 놓인 얕게 피어오르는 커피를 한잔 마시더니 곧 말을 내뱉었다.

“이미 다 아는 거 같으니 돌리지 않고 말하는 게 어떻겠나, 이 교수.”

“우수야, 우리가 너 불러서 말할 정도면 어떤 상황인지 짐작은 가는 거야?”

“교수님, 대학이 고작 기업의 오더에 좌지우지되는 곳입니까? 그리고 우리 학과가 얼마나 예산을 받았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나도… 나도 모르겠어. 근데 어떻게 하냐, 네가 논문 준비 중인 초상화에 대해서 연구하지 말라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그 초상화만 하지 말래.”

“교수님!”

“우수야 내가 너 진짜 아끼잖아. 내가 너한테 부탁한 적 있어? 이번 한 번만 교수님 믿어 줘라. 아니, 살려 줘라.”

“이유가 뭡니까 대체. 총장님 합당한 이유라면 접겠습니다.”

총장과 교수는 고개를 좌우로 절레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그건 우리도 모르네.”

“모르시다니요?”

“우리도 몰라. 단지 대표의 딸이 이사가 됐는데 너의 논문을 반대한다는 거야. 그것만 해결해 주면 아낌없이 지원해 주겠다고…….”

“이유도 없이 반대하는 걸 제가 포기해야 하는 겁니까?”

“그럼 내가 제안 하나 하지. 한번 들어 보고 결정할 시간을 주겠네.”

“제안이요?”

“주제를 바꿔서 낸다면 논문 심사 이의 없이 통과시켜 주겠네. 단, 표절 검사 시스템에 통과한다면 말이야.”

“총장님 이거 문제 되는 거 아시죠…?”

“우수 군, 자네만 입 다물면 돼.”

“우수야, 어때? 너 국사 선생님 하고 싶다고 교직 이수까지 했잖아.”

“잠깐만, 교직 이수를 했어?”

“네. 총장님…….”

“그럼 자네가 원하는 우리 재단 내 학교, 국사 교사로 채용해 주겠네.”

“정말이십니까?”

“임용 떨어져도 채용해 주겠다는 소리야. 한번 잘 생각해 봐.”

하얀 찻잔에 담긴 커피가 비워지자 총장은 어깨를 살며시 어루만지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교수는 긴 한숨을 내뿜으며 창문 너머의 먼 풍경으로 시선을 향했다. 한 손에 들린 안경, 창문에 비친 교수는 눈물을 보였다. 자신이 줄곧 지켜온 신념은 현실의 냉혹함에 무릎을 꿇자 한동안 어떠한 말도 내뱉지 않았다.

“교수님… 조교실로 가보겠습니다.”

“우수야…….”

“네… 교수님.”

“넌, 나처럼 안 됐으면 좋겠다.”

“…….”

그렇게 돌아온 조교실, 함께 자리를 지키던 녀석들은 말을 내뱉었다.

“교수님이 또 그러시는 거야?”

“역사학과가 예산을 많이 받는 과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하신대.”

“오빠 괜찮아?”

같이 말을 내뱉는 녀석들을 보며 극으로 치닫던 감정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안에서 나누었던 내용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파장의 강도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했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의 흐름 속 어느새 달님과 별님의 공존이 시작되자 조교실엔 어느 한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끼이이익… 득… 드득….’

아이보리색의 녹슨 철문을 밀자 도서관에서 느껴 볼 수 있는 종이의 냄새가 코끝을 간지럼 태웠다.

‘이 냄새 때문에 여길 온다. 여길 와.’

수많은 서적과 오래된 나무에서 풍겨 오는 세월의 냄새에 의해 분노는 해소되었다. 그렇게 검은색의 노트북만이 어두운 자료실의 빛을 밝혔다.

“하아, 좋다 좋아. 다시 논문 좀 써볼까.”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문제의 초상화였다. 이름 하나 적혀 있지 않은 초상화, 입은 옷으로 보아 분명 신분 높은 사람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꽃무늬에 금박을 하고 홍색 띠를 둘렀으며 머리에는 대댕기와 도투락댕기를 장식했다. 분명 조선 시대의 공주나 옹주 혹은 궁녀나 사대부 부녀자들로 좁힐 수 있었으나 누구의 초상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한 검은 눈썹과 쌍꺼풀이 인상적인 초상화 속 그녀, 입꼬리의 양 끝이 올라갔으며 미소 지은 모습에 한동안 시선을 고정했다. 이국적이기까지 한 초상화 속 그녀에 의욕은 점차 솟구쳤다.

“우수야, 생각은 해봤어?”

날이 밝자 지도 교수님은 종이컵에 담긴 블랙커피를 주며 말을 건넸다. 전과 같은 상냥한 억양은 귓가에 닿았지만, 표정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교수님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해 가지 않는 쪽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수야 정말이야? 고맙다. 진짜 고맙다.”

“교수님.”

“응. 우수야, 말해 봐.”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부탁?”

“제가 만약 논문 주제를 바꾼다면 그래도 저 초상화, 혼자만이라도 연구할 수 있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절대로 논문을 쓰거나 어디에 발표하거나 하진 않겠습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내가 그 정도는 들어줘야지. 근데 하나만 묻자.”

“네?”

“뭐가 그렇게 너를 저 초상화에 매달리게 한 거냐?”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저 초상화에 나타나는 시대적 배경과 옷차림으로 추측할 수 있는 사실들을 좀 더 연구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

“네. 교수님.”

“총장님한테 내가 잘 말할 테니 혼자서 한번 해봐. 알았지?”

“감사합니다. 교수님.”

“약속은 지켜야 한다. 알았지?”

“네!”

드러난 지도 교수의 표정은 조금 풀린 듯 보였다. 지저귀는 하늘의 새들, 바삐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더니 검은 구름과 함께 웅장한 굉음이 귓가를 자극했다.

‘우르릉 쾅! 쾅!’

연달아 이어지는 천둥의 소리와 뒤늦게 반짝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번개, 발걸음은 다시 자료실로 향했다.

‘어? 왜 노트북이 꺼져 있지?’

전원 케이블을 뽑아 다시 콘센트에 꽂았지만,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뱉는 욕설과 함께 창문 너머로 거센 비바람은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또각… 또각… 또각….’

들려오는 복도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곧, 노크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똑… 똑… 똑….’

‘이상하다. 지금 올 사람은 교수님 말고 없는데… 교수님이신가…….’

조심스레 문을 열자 중후함의 짙은 냄새를 풍기는 노인은 옅은 미소와 함께 입술을 뗐다.

“여기가 역사학과 자료실 맞습니까?”

“네. 교수님과 약속하셨나요?”

“그런 건 아니고, 자네가 우수 맞지?”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죠?”

검은 정장에 하얀 머리카락과 정돈된 하얀 수염, 거침없이 건넨 이름에 당혹감을 내비치자 노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놀라지 말게. 잠깐 나랑 갈 곳이 있는데 같이 가겠나?”

“어르신이 누군지 알고 제가 갑니까?”

“나랑 가는 게 자네한테 이득이 생길 텐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총장님과 이 교수하고 이야기가 끝났네. 잠시만 나한테 시간을 투자해 주겠나? 부탁하네.”

노인은 스마트폰에 찍힌 교수의 번호를 보여주며 경계심을 사그라트렸다. 하는 수 없이 의자에 걸려 있던 코트를 입은 채 노인의 등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나섰다. 학과 건물 입구에 웬 하얀색 외제 대형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앞자리에 앉게.”

그는 수행 비서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더니 운전석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에 캠퍼스를 벗어나 익숙지 않은 시외 지역으로 들어섰다. 검은 구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며 높은 건물 하나 없는 시골 풍경이 눈앞에 나타나자 긴장감은 사라지고 옅은 미소가 품어졌다.

“어르신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거의 다 왔네.”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괜찮네. 말해 보게.”

“혹시 제 논문을 막은 기업의 대표님이십니까?”

빨간불에 멈춰서자 한동안 말이 없던 노인은 입술을 뗐다.

“맞네. 내가 그 기업의 회장일세.”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왜 자네 논문을 막냐고 물어보고 싶은 거 아닌가.”

“맞습니다. 왜 제 논문을…….”

“가보면 알 걸세.”

노인은 어떠한 힌트도 내뱉지 않은 채 바퀴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아스팔트 도로가 시선에 사라지더니 곧, 비포장도로가 눈에 띄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래되어 보이는 기와집이 눈에 띄었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기와집, 연한 갈색의 나무가 아닌 거무스름한 갈색을 띠었으며 나무의 냄새는 코끝을 간지럼 태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넓은 한옥의 웅장함은 바깥과 다르게 다가오는 그림자를 맞이했다.

“여기는 어떤 분의 집입니까?”

“과거도 현재도 미래에도 여긴 나의 소유네.”

“그게 무슨 말이신지…….”

노인의 그림자를 바짝 붙여 따라가자 마당 크기의 연못이 등장했으며 중앙에는 작은 사당으로 보이는 한옥 건물이 눈에 띄었다. 검붉은색으로 칠해진 나무 기둥과 녹색의 나무 문, 노인은 조심스레 문을 밀며 말을 건넸다.

“왜 안 들어와? 안 잡아먹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저기 어르신.”

“두려운가?”

“그게 아니라, 이 집을 조금 더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그럼 같이 둘러보며 소개해 주지.”

“아닙니다. 혼자 둘러보겠습니다.”

“여기에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마음 좀 가다듬고 오게.”

노인은 미소를 품으며 그림자를 감췄다. 이상한 기류를 느낄 수 있었지만 어떠한 말도 건네지 못했다. 역사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쉽사리 볼 수 없는 전통 가옥과 규모였고 발이 닿는 모든 곳엔 책과 자료로만 봐오던 것들이 존재했다.

‘저분은 대체 뭐지… 이런 곳을 가지고 있고 말이야. 나라를 위해서 역사를 위해서 이곳을 알려야 하는데 왜 알리지 않고…….’

발걸음을 내딛을수록 의문은 계속 피어났다. 이상하리만큼 금방이라도 누가 쓴 물건 같았고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코끝에 느껴졌다. 꼭 누가 있는 것처럼…….

‘배고파서 그런가 보다. 다시 거기로 되돌아가자.’

발걸음을 내딛자 보이지 않던 새들은 검은 기왓장의 담벼락 위로 몸을 맡겼다. 녀석들은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시선을 고정했으며 불어오는 바람에 긴장감은 눈 녹듯 사라졌다.

“어르신,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마음은 어때? 괜찮으신가.”

“네. 어르신.”

“그럼 들어오게.”

신고 온 운동화와 노인의 구두를 가지런히 정리한 후 빨간 나무 바닥으로 내디뎠다. 발바닥으로 전해 오는 나무 바닥의 한기는 온몸에 전해지며 과거로 향한 것만 같았고 조심스럽게 당긴 녹색 나무 문을 보자 노인은 양반 자리로 손짓하며 우수를 맞이했다.

“여기에 앉게.”

“네, 어르신.”

“잘 돌아봤는가?”

“네. 이렇게 오래된 큰 한옥이 있는 것을 처음 봤습니다.”

“그럴 테지. 내가 자네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네.”

노인은 말을 끝내며 자리에 일어섰다. 자신의 키만 한 작은 나무 문을 열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은 휘둥그레졌으면 어떠한 소리도 귓가를 자극하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상황에 찾아온 것은 깊은 적막감이었고 숨소리조차 미안할 정도로 노인은 입술을 꾹 닫은 채 바라볼 뿐이었다. 귓가를 스쳐 지나치는 새소리, 짧은 숨을 여러 번 고르며 말을 건넸다.

“왜… 같은 초상화가 여기에 있는 겁니까?”

말을 기다렸다는 듯 노인은 초상화로 눈을 돌리며 입술을 뗐다.

“자네 이분이 누구인지 아는가?”

“모릅니다. 그래서 연구하고 있던 겁니다.”

“그래…? 이분은 나의 제자이자 공주님이시네.”

“공주님이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잠시 나와 갈 곳이 있는데 내 손을 잡게.”

“그것보다 먼저 설명해 주십시오. 이곳이 대체 어떤 곳인지 그리고 같은 초상화가 왜 있는 것인지…….”

“앞서 이야기는 설명해 줬지 않은가. 초상화가 왜 있는지는 자네가 확인해 보면 될 걸세.”

“어르신의 따님이신 이사님이 오늘 교내 방문한다고 했습니다. 논문 포기한다고 하니까 온다고 하셨어요. 얼굴 보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 반대하는지…….”

“우수 군, 급한 일이 안 생긴다면 딸은 여기로 올걸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리로 오라고 했어.”

“그럼 만나 보고 어르신을 따라가겠습니다.”

“오는 데 오래 걸릴 거 같으니 같이 걷지.”

노인과 함께 기와집 밖으로 나섰다. 비포장도로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꽤 넓은 토지들이 눈에 띄었으며 기와집과 초가집은 더러 시선에 잡혔다.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가옥들, 이상하리만큼 사람의 손이 묻어 있었다.

“공기가 참 좋지?”

“네. 도시에 있다가 시외로 나오니까 너무 좋네요. 어르신께서는 여기 자주 방문하십니까?”

“당연하지.”

“초상화에 얽힌 이야기를 왜 안 알려 주시는 겁니까? 자꾸 겪어 보라고 말씀하시고.”

“운명일세.”

“운명이요?”

“좀 이따 나와 가게 되면 이해할 거야.”

노인의 말에 두려움의 싹이 피어났다. 입 안은 바짝 타들어 갔으며 한숨은 계속 쏟아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대체. 아, 그냥 자료실에 처박혀 있을걸. 외제 차에 혹해서 진짜…….’

밝았던 표정은 점차 사라져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자 노인은 발걸음을 멈추며 입술을 뗐다.

“걱정하지 말래도.”

“네?”

“얼굴에 쓰여 있네. 그리고 말에 떨림이 있고.”

“떨림이요?”

“두렵거나 무서운 존재를 맞이했을 때 사람은 자연스레 말이 떨리지. 학생이 지금 그래.”

“솔직히 말하면 걱정됩니다. 이해하지 못 할 말만 계속하셨어…….”

“딸이 오려면 좀 오래 걸릴 거 같으니, 다시 사당으로 가지.”

“네…….”

다시 그곳으로 발을 내딛자 이상한 점이 시선에 잡혔다. 담벼락에 놓여 있던 커다란 싸리 빗자루는 입구에 놓여 있었으며 나무 문은 환기를 시키는 것처럼 전부 열려 있었다. 노인에게 시선을 고정하자 그는 아무런 말 한마디 없이 인도했다.

“자네에게 시간이 좀 필요한 거 같네.”

“아닙니다. 어르신 이야기를 들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나의 이야기라… 한 가지만 약속해 줄 수 있겠는가?”

“어르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먼저 여쭈어봐도 될까요?”

“말해 보게.”

“어르신 말씀하시는 투와 억양이 꽤 혼란스럽습니다. 어떨 때는 어르신 연배의 어투 같지만 한 번씩 꼭 그 이전의 어투로 말씀하십니다. 꼭 사극에서 보는 듯한 말투 말입니다.”

“벌써 그 정도까지 이해했어? 대단하네. 대단해.”

“숨기시는 게 있으신 거 맞죠?”

“숨기는 게 아니라 곧, 자네가 겪을 삶일세.”

“제가 겪을 삶이요?”

“그럼. 우선, 이 초상화에 대해 조금만 설명해 주겠네.”

“정말입니까? 그럼 차에 있는 다이어리 좀 가져와도 되겠습니까?”

“자네 가방 여기에 있네.”

“네?”

왼쪽 구석에 항상 손에 들고 다니던 검은 가방이 눈에 띄었다. 분명 노인은 사당에 있었으며 함께 거닐 때는 자동차 근처로 간 적이 없었다. 입을 살짝 벌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검은 가방을 열자 다이어리가 시선에 잡혔다.

“어르신…….”

“말해 보세.”

“어떻게 제 가방을 가지고 오신 겁니까? 분명 저와 함께 걸을 때도 자동차 근처로 간 적이 없었고 어르신은 사당에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난 가방을 가져온 적이 없네.”

“그럼 누가…….”

“자네가 가져온 거야. 자네가.”

“네?”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공포감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고, 잘 생각해 보게.”

노인의 옆에 앉아 초상화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차에 내린 순간부터 천천히 되짚었다. 그러자 바늘로 찌르는 듯한 순간의 고통이 온몸의 털을 곤두서게 하더니 짙은 안개를 뚫는 것처럼 되살아났다. 습관적으로 가방을 들고 온 것이 분명했고 싸리 빗자루는 함께 발걸음을 나설 때 노인이 옮긴 거였다. 눈을 뜨며 안도의 한숨을 내비치자 중후한 그림자는 연한 청색 빛을 품은 찻잔을 건넸다.

“이제 기억이 났나 보군. 한잔 천천히 마시며 이야기를 들어 보게.”

“죄송합니다. 어르신.”

“아닐세.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된 기억으로 고통을 받기도 하네.”

“네…….”

“내가 했던 말 기억하는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여긴 나의 소유라는 것을.”

“그 말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과거는 그렇다 쳐도 미래에도 어르신의 소유라니요?”

“자네가 저 초상화의 여인이 궁금하다면 내가 그곳으로 인도해 줄 수 있네. 이후의 삶은 자네가 결정할 수 있고 되돌리고 싶다거나 이곳의 아쉬움이 남는다면 날 찾으면 된다네.”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간다는 이야기이십니까?”

“비슷한 이야기일세. 궁금하지 않은가?”

“그게 사실이라면 두렵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봐.”

“내가 말하지 않았나. 자네가 원한다면 올 수 있다고.”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곳에 온 자도 있고 간 자도 있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하지만 쉽사리 믿을 수 없었고 주제를 바꾸며 재차 초상화에 대해 말을 내뱉었다.

“저분이 공주님이시라면 기록을 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난 지금, 역사는 저분을 평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줄의 기록도 없고 오직 남은 것은 초상화 두 장인데 어떻게 공주라는 것을 제가 믿겠습니까.”

“당연히 그런 말, 할 수 있네. 근데 자네, 솔직히 말해 보세. 분명 지도 교수에게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탐구하고 싶다고 형식적인 말을 했을 거야. 근데 사실은 저 초상화 속 여자가 궁금한 게 아닌가. 지금 시대에 저런 외모를 가진 사람이 흔치 않을뿐더러 자네 저 여인을 좋아하는 거 맞다 보는데?”

“그게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보십니까?”

“자네 연애 한번 해본 적 없지? 딱 봐도 감정 하나 알지 못하는 거 보니…….”

노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니, 지도 교수에게 거짓말로 상황을 회피했다. 모든 감정과 생각을 읽는 것처럼 말을 건넸고 사실이 까발려지자 부끄러움에 몸사림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