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5년만의 첫 키스와 부질없는 오해

“아이고 젊은 아가씨가 크라운 팰리스에 살아? 부모님이 부자신가 봐. 좋겠어. 요즘 부모 잘 타고 나는 것도 운이야.”

택시 운전사의 요란한 물음에도 뒷좌석에 앉은 여자는 묵묵부답이었다.

“큼….”

이내 이어지는 침묵이 어색했는지 그가 헛기침을 해댔다.

부모 잘 만나 잘 먹고 사는 게 싸가지는 밥 말아 먹은 겐가. 그가 속으로 연신 혀를 찼다. 뒤에 앉은 여자는 목도리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칭칭 감은 채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게 한서희. 그녀는 지금 내로라하는 유명 연예인이었다. 그나마 서희는 기사 아저씨가 자신을 연예인인 걸 못 알아봐 다행이라 여겼다.

집안이 잘 사는 부잣집 딸내미인줄 알겠지. 휴. 맞장구 쳐줄려다 더 큰일 나.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말을 아꼈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서희는 혹시나 그가 알아볼까 목소리 톤을 반쯤 깔고 개미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기사의 소란스러운 성격으로 보았을 땐 서희가 연예인인걸 알면 동네방네 자랑할 눈치였다.

조용히 넘어가는 편이 좋았다.

그래서 서희는 택시 기사와 함께 팰리스 안까지 들어갈 자신은 없었다.

탁- 그녀는 택시의 문을 우악스럽게 닫았다. 그리곤 뭔가에 쫓기듯 후다닥 내렸다.

길가에 내린 그녀는 그제야 숨통이 트인 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 받는 걸로 돈을 벌면서도 그걸 감당해야 하는 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녹록치 않은 처지에 어딘가 투정부릴 곳도 없다는 점이 그녀를 항상 외롭게 했다.

누가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 여기겠지.

특히 송강혁 대표가 불현듯 머릿속에 스치듯 떠올랐다.

그렇게 떠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송강혁.

이름 석 자에 서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이젠 그와 마주칠 일도 엮일 일도 없을 건데 왜 이리 허전한 마음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난생 처음 사랑이란 감정을 알려준 그 남자 강혁을 영영 떠나보내는 순간이 언젠가 오리라

마음의 준비를 굳게 했어도 그가 서희의 삶에 차지한 비중은 형언할 수 없었다.

사사로운 정말 별 것 아닌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서희가 마음을 가다듬으며 밝은 쪽을 따라 한 걸음씩 발걸음을 움직였다.

어스름한 가로등 불빛을 따라 팰리스 정문을 향해 걸었다. 영하권으로 떨어진 추운 날씨에 아스팔트는 꽝꽝 얼어 있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하이힐에 닿는 지면 위로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안 그래도 서희는 온종일 힐을 신고 한 촬영 때문에 발목이 아작 날 것 같았다.

하루의 마지막 고비라 여기고 막판 스퍼트를 낼 무렵이었다.

이 순간만 참으면 집에 가서 쉴 수 있겠지.

이 사실 하나를 머리에 상기시키며 서희는 악착같이 버텼다.

하지만 온몸에 기분 나쁜 서늘함이 감돌았다. 좀 전과는 다른 공기의 흐름이 머리털을 쭈뼛 서게 했다. 날카로운 불길함이 그녀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찌르르 서희의 마음을 관통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쫓아오던 그 놈의 열렬한 구애와 스토킹. 서희에겐 꽤나 불쾌한 기억이었다. 그놈이 주변에 있다. 서희는 육감으로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타박타박 -

서희를 향해오는 발걸음은 점점 좁혀져만 왔다. 올가미를 죄는 것처럼 조여 왔다. 소속사 해지 수준을 밟자마자 나타난 그놈이 누군지 유추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소란스럽지 않게 하지만 검은 모자를 푹 눌러 쓴 그 형상은 치밀하게 계산한 거리로 점점 좁혀 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강 매니저 말 듣는 건데. 서희가 뒤늦게 후회해 봐도 뒤쫓아 오는 그림자를 따돌릴 방법은 없을 게다.

불과 강 매니저와 실랑이를 벌인 게 20분 전 일이었다.

“나 혼자 갈 수 있어.”

“톱스타를 그냥 택시 태워서 보내는 게 어디 있어요.”

“새 소속사 구할 때까지 만이야. 나 좀 내버려 둬.”

재빨리 택시 문을 닫고 떠나온 게 후회가 되었다.

서희는 가까운 거리라 별일 없을 거라 단정 지었다. 스토커 그놈이 다시금 이런 기회를 틈타 자신을 노릴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 잰 걸음이 잦아지자 서희의 의심이 확신으로 점차 변해갔다.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택시 기사의 요란함을 피하기 위해 일찍 내린 게 화근이었다. 추격하는 발걸음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직한 거리였다. 차라리 서희만의 오해이길 바랬다.

소속사 계약 만료가 된 시점을 노렸다고?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잖아. 물가에 홀로 떨어진 어린 양 신세일 때까지 기다렸다는 게 소름 돋을 정도로 치밀해.

하지만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서희의 거짓된 망상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 남자의 걸음걸이는 조금 특이했기에 뇌리에 남아 잊히지 않았다. CCTV로 수도 없이 지켜 본 그녀의 기억의 조각과 일치했다.

그러니 서희는 현실부정 할 시간에 도망치는 게 빠를 거라고 판단했다.

고급 진 아파트 주변을 늦은 새벽 그것도 추운 날씨에 걷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희의 뒤에선 점점 잰 걸음으로 쫓아와 그녀의 숨통을 압박했다.

서희도 점차 속도를 내야 했다. 하지만 고조되는 긴장에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고 발에 모래주머니라도 달린 듯 움직임이 무거워졌다. 땀을 잘 흘리지 않는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보폭은 점차 좁혀졌다. 어느샌가 서희와 그 남자간 물리적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이힐을 신었던 고통을 잊을 만큼 그녀는 냅다 내달렸다. 꽝꽝 얼은 지면 위로 구두의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한 겨울이지만 여러 겹을 입어서 인지 몸이 무거웠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촬영 씬 빼고는 이렇게 전력질주 한 게 언제더라, 그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혼이 나갔다. 밤중에 아닌 달리기라니. 무릎에 직통으로 오는 고통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피해야만 해.

그 간절함이 무작정 길거리를 달리게 만들었다.

아파트 넓은 입구 쪽 경비실에만 도착하면 돼. 좀 더.

심장의 요동은 온몸을 관통하는 긴장감으로 쿵쿵 뛰었다.

하지만 뒤에서 바짝 쫓아오는 놈의 걸음은 야속하게도 서희보다 빨랐다. 아찔한 정신에 뒤를 보니 그 남자는 서희의 어깨를 잡을 정도의 거리에 와 있었다.

쉬지 않고 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살얼음이 어린 가장 미끄러운 아스팔트 위를 밟자마자 줄곧 달리던 서희의 무게가 앞으로 쏠리며 그대로 넘어졌다.

팍-

“아….”

서희의 외마디 신음과 함께 차가운 바닥에 그녀의 손바닥이 닿았다. 그대로 고꾸라진 서희의 코트에서 휴대폰이 자연스레 미끄러지듯 나왔다.

따라오던 남자가 마지막 서희의 희망의 불씨를 꺼뜨려버렸다.

쾅쾅-

넘어진 서희가 바닥 위로 자신의 휴대폰이 밟히는 장면을 여과 없이 봐야 했다. 남자는 무자비하게 휴대폰을 망가뜨리더니 발로 툭 쳐서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보라고 이제 도움 청할 때도 없어. 내가 다 밟아버렸으니까.”

“헉”

그의 잔인함에 치를 떨었지만 서희는 어서 몸을 추슬러야 했다. 타박상을 입은 다리가 아팠지만 초인적인 힘으로 겨우 일어섰다.

“그냥 가세요.”

서희가 긴장으로 우물대는 입을 겨우 떼고 말했다.

“우리 이제야 말해보네? 난 항상 한서희 씨를 봐왔는데 지켜만 보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

서희는 그 남자 입에서 나온 우리라는 단어가 꽤 거슬렸다.

하지만 단어 하나에 에너지 낭비할 시간은 없다. 어서 빠져나가는 게 중요할 뿐이었다.

“그건 모르겠고. 놔 줘요. 나중에 얘기해요.”

“우리한테 나중이란 게 있나? 겨우 잡았는데.”

서희를 줄곧 따라다니는 놈은 그녀를 독안에 든 쥐처럼 쳐다보았다. 눈빛에는 미묘한 승리감도 어려 있었다.

“당신 홀로 남겨진 상황은 별로 없잖아?”

서희는 그의 말이 심히 거슬렸다.

홀로 남겨졌다 라니. 서희가 몸서리치며 뒷걸음질 쳤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너무 정확하게 사실을 말해 소름이 끼치고 구역질까지 올라올 뻔했다.

언제부터 알았던 거지?

“당신 헌터엔터랑 계약 만료 된 지 꽤 지났잖아. 계약 끝났다고 송강혁이 바로 내치네. 소속사 배우 애지중지 여기더니 봐봐. 바로 팽 당하는 꼴이 웃기지 않아?”

얼마나 기사를 정독했으면 내 행적들을 이렇게까지 알고 있지?

그가 얼마나 서희의 모든 걸 샅샅이 살피고 있었는지 입증했다. 서희에 대한 세세한 정보까지 꿰뚫고 있었다. 그녀는 오들오들 떨면서도 동시에 그 놈에게 싸대기라도 한 대 날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도와 줄 이가 없다 생각하니 시야가 아찔해졌다. 그놈도 빠져나가려는 서희의 모든 틈을 봉쇄하려는 듯 두 어깨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꽉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갈 때 쯤 끝났다고 생각했다.

“놓으라고 여기!”

마지막으로 발악이라고 여기고 소리라도 질러보자. 그 방법밖엔 없어. 서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직 믿을 건 자신이라고 여기면서도 서희의 뇌리 속을 스치는 이가 있었다.

‘송강혁'

떠올리기 싫어도 서희의 머릿속엔 오직 그 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했으면서 막상 강혁 만을 떠올리고 찾을 수 없는 현실이 비참했다.

하지만 출구는 없을 것이다. 이제 소속사 따위는 없으니까 혼자 헤쳐 나가야 했다. 근데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절망 속에 빠졌다.

콰앙-

기적처럼 굉음이 조용하던 공기를 갈라놓았다. 귓속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가 없었다면 진즉 서희는 도망가는 걸 포기했을 테다. 시야에서 부셔지는 빛과 굉음, 서희에게 이리도 반가운 적은 처음이었다.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날카롭고 눈부신 것들은 모두 서희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항상 방해 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구세주 같았다. 평소엔 신경질 적으로 만들었던 자극이 반갑기까지 했다.

헤드라이트 사이를 비집고 온 남자가 재빨리 걸어오고 있었다. 서희는 실루엣만 보고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바로 ‘강혁’이었다. 큰 키에 완벽한 비율, 달려오는 모습까지 멋있는 사람은 서희 기준에선 그밖에 없었다.

두 눈을 마주치고, 서희가 잠시 머뭇거렸다. 항상 예민함이 돋보이던 그에 눈빛에는 걱정이 서려있었기 때문이다.

장신의 블랙 수트핏 그리고 완벽한 포마드 머리에 여백 없는 외모까지. 코 끝 턱 선 심지어 눈 꼬리까지. 자로 잰 듯 완벽한 비율이 그의 뛰어난 비주얼의 품격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설명되었다. 모든 이가 잘생김을 넘어선 ‘조각’이라 불리는 그의 외모를 납득하게 했다.

혹시, 설마하고 부풀었던 마음이지만 서희는 막상 그가 올 줄은 몰랐다. 그 사이 스토커는 서희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쏜살같이 도망갔다. 서희에게 허탈함과 허무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결국 강혁에게 벗어나고자 한 모든 움직임은 헛수고인 것처럼 여겨졌다.

모든 이들에게는 삶의 제약이 있지 않는가. 서희의 경우에는 강혁이 그랬다. 그와 얽힌 인연을 떼어내는 일은 그저 계약해지로 끝나지 않았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고?”

그가 서희의 여러 곳을 요리조리 살피며 물었다. 참으로 따뜻하고 배려 깊은 인사였다.

“없어요 괜찮아요.”

서희는 그에게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왜 다시 자신을 찾아온 건지. 그 자체로 의문스런 감정이 들었다.

여기서 매몰차게 굴지 않는다면 내 탓도 있는 거야.

서희가 그렇게 스스로 다짐했지만 오랜만에 겪는 충격적인 일에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강혁이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질 수도 있었다. 그가 자신의 거대한 몸으로 서희를 지탱해 주었다.

“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서희는 강혁에게 떨어지라고 신경질을 낼 수도 반항 한 번 할 수도 없었다. 다시 무서운 그놈이 언제 쫓아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추위에 떠는 발이 시려오기 시작했다. 어찌나 달렸는지 무릎이 시큰거렸다.

“우리 집으로 갈래?”

강혁이 걱정스레 물었다. 오늘 큰 받은 큰 충격으로 으레 알아서 서희가 가겠거니 예상했지만 의외의 대답이 파리한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아뇨. 제가 왜요.”

똑똑하고 차분한 음성이었다.

서희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고 나름 스스로 만족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용케 감췄지만 흔들리는 눈빛은 숨기지 못했다.

“그 놈이 집 앞에서 죽치고 있으면 어쩌려고.”

“대표님 봤으니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내심 두려운 서희는 강혁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 순순히 수락하기 싫었고 무엇보다 자신보다 회사를 위해 일해 온 냉혈한 같은 남자였다. 그래서 더욱 매몰차게 거절해야 해야 했다.

“하…. 한서희 항상 제멋대로지 넌.”

강혁의 한숨이 밤거리 공기로 흩어졌다. 그는 큰일을 겪고도 자신을 노려보는 서릿발 같은 서희의 시선을 묵묵히 견뎠다.

“한서희. 여배우가 무슨 혼자 택시를 타고 가. 미치겠네.”

강혁은 걱정된 마음에 격앙된 목소리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평소 서희는 자신의 타입이 아니라 그렇게 세뇌했건만. 강혁도 남자인지라 그녀의 여신 같은 미모 앞에선 큰 화도 누그러지는 모양이다.

정확히는 마음이 굴복했다.

안색은 창백했고 뛰느라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았지만 그 파리함이 오히려 서희의 청순함을 돋보이게 했다. 하얀 피부 티 없이 맑은 눈망울과 오똑한 코 적당히 도톰한 입술이 어우러졌다. 흠잡을 곳 없는 황금 완벽한 비율에 시선을 거두려 애썼다.

“만약에 그놈이 칼이라도 들고 왔다면 어쩔 뻔했어.”

강혁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멀쩡한 서희의 모습을 보자 안심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화를 내는 일은 무모하단 걸 알았다. 그녀가 다쳤을까, 줄곧 걱정과 긴장 속 졸여왔던 마음이 탁 풀렸다.

“안 갖고 왔잖아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대표님이야말로 이 시간에 왜 오신 건데요.”

서희는 또박또박 따졌다. 그녀는 이젠 ‘전’ 소속사 대표가 될 강혁의 말을 무시하려 했다. 그리곤 애써 놀라서 부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뒤돌아 가려 했다.

“왜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어? 오늘은 위험하니 우리 집으로 가자.”

돌아서려는 그녀를 붙들고 강혁이 따지듯 물었다.

“대표님이 친절한 적이 있었나요? 인제 와서 이러시는 거 안 좋아 보여요. 여배우랑 소문날까 봐 식사도 같이 안 하시던 분이잖아요.”

서희가 격앙되려는 목소리를 잠자코 낮추며 말을 아꼈다.

“네가 위험하잖아. 이건 네가 자칫하면 다칠 뻔했어.”

“거짓말은. 그저 회사에 도움 되는 거라면.”

서희가 쳇 하는 소리를 뱉으며 입꼬리 한쪽을 올리곤 고개를 숙였다.

한서희, 그녀의 태도가 자신에게 왜 이리도 냉소적일까.

강혁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짐작 가는 바가 있어 한숨을 푹 쉬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계약 연장 건.’

아마 5년간의 헌터 엔터 생활에 마침표를 찍지 않고 연장하자고 덤빌까 봐 그러겠지.

하지만 확실히 해둬야 했다.

서희에게 자신이 회사의 이익이 아니라 단순히 ‘네’가 걱정 돼서 그러는 거라고.

“걱정 돼서 그래, 한서희. 그냥 날 믿어줘. 네가 뭐 때문에 그러는지 알아. 지금 휴대폰도 망가지고 방금 너 쫓아다닌 그놈한테 큰일 당할 뻔하고도 자존심 내세우는 거 자신한테는 가혹하단 생각 안 들어?”

서희가 강혁의 눈을 바라보았다. 책망하는 듯한, 허나 오히려 애정 어린 가까운 묵직한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생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따스한 보살핌이 이윽고 계약 만료와 함께 끝이라는 걸 상기시켰다. 오늘 밤이 그와 얼굴을 같이 하는 마지막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의 호의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어쩌면, 강혁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스레 멀어지겠지. 그는 절대 선을 넘지 않았으니 안심해도 될 남자였다. 다만 자신의 심연 깊숙이 자리 잡은 강혁에 대한 미묘한 이성적 감정, 그것만 풀어내지만 않으면 된다. 서희는 그렇게 자부했다. 그를 ‘남자’로 느낀 일말의 생각만 컨트롤한다면 아무 일 없을 거라 자부했다.

하, 지금 집에 들어가 봤자 벌벌 떨면서 잠도 못 잘 거면서. 송 대표 앞이라고 센 척하진 말자. 그가 곁에 필요한 건 사실이잖아. 오늘은 마지못해 그냥 그의 말을 따르는 게 낫겠지.

서희의 고집이 한풀 꺾였다.

“알았어요. 대표님 뜻대로 할게요.”

**

서희가 쭉 밖에서 보기만 했던 고급 펜트하우스에 발을 들인 건 처음이었다. 5년의 계약 기간 동안 서희가 그의 집에 드나든 적은 없었다.

아마 여배우와 대표 간 염문설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 항상 그가 거리를 뒀기 때문이다.

곁에서 본 그는 섭섭할 정도로 그는 사무적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희에게 ‘강혁’은 남자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에게 특별히 남자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과거형일 뿐이다. 집 앞 현관을 들어서며, 서희는 자신에게 세뇌시켰다.

신인 시절 서희는 열렬히 강혁을 좋아했고 흠모했다. 홀로 뒤에서 짝사랑했다.

하지만 강혁은 서희가 끈질긴 벌레처럼 들러붙는 것처럼 취급했다. 그녀의 행동을 티 나게 경계했다. 그런 그가 선을 넘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의 가장 사적인 공간인 ‘집’에 서희를 집에 초대한 것이다. 물론 서희가 스토커에 쫓겨 곤란했고 위험에 처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무슨 신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싶었다. 그녀의 갸우뚱거리던 고개가 무색하게 그의 합리적인 의도를 찾을 수 있었다.

계약 연장 건? 송강혁 네 회사를 위해 헌터 엔터에 기필코 재계약해야 하겠지. 그토록 날 필요로 하니까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일 테고.

서희는 강혁의 사업가적인 면모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너절한 상념 따위는 집어치워 버렸다.

어차피 계약할 곳이 정해졌고 모든 건 끝났다. 이적할 소속사인 AM 엔터는 뮤지션과 연기자를 동시에 케어하는 엔터테인먼트였다.

그녀를 연기자이자였지만, 가수로서 리어를 쌓고 싶었다.

음악적 재능을 빛나게 할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곳에서 마음대로 날개를 펼치리라.

노래에 실력이 뛰어난 서희는 자신의 선택이 최고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집 안을 둘러보니 테이블과 높은 의자로 놓인 공간이 바 형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소문으로 듣기는 했어도 이리도 화려하고 근사한 곳인 줄은 몰랐다. 아까 그대로 서희가 자신의 집으로 직행했으면 후회할 뻔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만큼 유리로 치장한 근사한 곳이었다.

몇 년 전 놀러 온다고 했을 땐 극구 만류했으면서 이제 와 데려오는 그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 그녀가 씁쓸한 속을 쓸어내렸다. ‘걱정’이란 포장지로 달콤하게 그의 말을 믿어버린 자신이 바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