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얽힌 인연의 시작

넓은 나뭇잎 끝에 달린 날카로운 가시와 핏방울이 맺혀 달린 것 같은 붉은 열매에 붙여진 이름은 호랑가시나무라 했다.

또 다른 의미는 나뭇잎으로 호랑이가 등을 긁는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했고, 호랑가시나무를 꺾어 정어리 머리에 꿰어 처마 끝에 매달면 나쁜 잡귀가 물러간다는 부적의 뜻도 있다 했다.

붉은 열매가 탐스러이 보이지만 예쁘고 아름다운 것엔 독이 있는 법. 그러나 이 호랑가시나무는 사람이 아닌 동물에게는 위해를 가하지만, 인간에겐 한없이 좋은 약재로 사용되었다.

“채온아.”

“왜, 할미.”

“우리 채온이는 호랑가시나무와 같은 운명을 태어났단다.”

“할미야, 어려워서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넌 그렇게 꼭 붉고 탐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야. 이 할미가 꼭 그리 만들 것이니. 채온아 다른 건 다 잊더라도 이것만은 기억해라. 네 이름은 채울 채, 따뜻할 온. 따뜻한 온기를 채우는 아이라는 뜻이란다.”

“할머니! 할머니!”

벌떡. 낡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채온의 하얀 얼굴을 타고 투명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채온은 창백하게 식은 제 얼굴을 묻어 넣었다.

툭. 툭. 툭.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는 채온의 눈물에 이불이 젖어 들었다.

꿈속의 채온은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이었다. 엄마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것을 두고 떠난 엄마 서라는 무척이나 그림을 잘 그렸다 했다.

겨울이면 문 사이로 들어오는 매서운 바람 때문에 할머니 순임은 장에 나가서 두꺼운 비닐을 제법 많이 사 오곤 했다.

창문과 문마다 비닐을 대고 못질을 해 바람을 막고 따뜻한 아랫목에 늘 채온을 두고 순임은 늘 윗목에 몸을 뉘었다.

“우리 채온이 많이 춥나?”

“아니, 할미 품이 난로같이 따뜻해서 하나도 안 춥다.”

“누구 닮아 이리 이쁠꼬.”

“할미 닮아 예쁘지.”

엄마 아빠가 없어도 채온은 늘 행복한 아이였다. 세상천지에 할미만 있으면 그러했다.

채온이 7살이 되던 해. 마지막 달 12월, 막 눈이 오기 시작한 겨울이었다.

늘 이맘때면 순임은 채온을 위해 호랑가시나무로 예쁜 장식을 만들어 주었다.

오늘도 한아름 예쁜 붉은 열매에 채온의 시선이 빼앗긴 그때였다.

낯선 차 한 대가 채온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동시에 흙먼지가 바람까지 겹쳐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옇게 날아올랐다.

운전석 문을 열고 나온 남자가 폴폴 날리는 먼지로 연실 기침을 쏟아냈다.

“콜록, 콜록, 정말 이런 곳에 그런 용한 사람이 있다는 게 맞아?”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여자의 인상이 매섭게 바뀌었다.

“아! 맞다니까. 내가 얼마나 수소문해서 알아낸 건지 당신이 알아?”

“길도 구불구불, 무슨 오지산간도 아니고. 이런 쓰러져가는 집은 또 뭐람.”

“뭐 그야 그렇지만, 점사도 안 봐준다는 거 아는 사람 통해서 부탁하고 설득해서 봐주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구시렁댈 거면 따라 들어오지도 말아! 실례합니다.”

오만 인상을 쓴 남자의 쓴 눈빛에 여자의 눈이 따라 움직였다. 용하고 유명해 만나기 어렵다 했던 사람이 거주하기엔 그 말대로 너무도 초라했다.

여자는 고개를 슬쩍 흔들었다. 그런 사소한 것을 운운하려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었기에 서둘러 입을 뗐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에서 맑은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들어오시죠.”

깜짝 놀란 여자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먼저 돌아서 들어가는 순임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방으로 두 남녀가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비싼 옷을 걸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깔끔한 차림을 하고 머리를 곱게 빗어 넘겨 묶은 순임의 외관이었지만 풍기는 아우라는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들으셨겠지만. 전 이제 점사를 보지 않습니다.”

“예.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런데도 여러 번 부탁하셨다기에 만나 뵙자 했습니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연락이었다.

재주라 할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쓰임을 이토록 바라는 이를 물리는 것도 예가 아니란 생각에 주소를 내어주라 했던 순임이었다.

“실은 저희 남편이 몇 년 전부터 친구와 동업을 하는데 그 일이 불같이 잘되는 터라 잘될 때 더 일어나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재수굿을 부탁드리려고요.”

촤르륵. 순임의 손에 들려있던 부채가 펴지며 공간을 울렸다.

“생년월일.”

재수굿 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순임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어 흘러나온 목소리 또한 강하고 단단하게 바뀌어있었다.

“아… 네… 하는 일이 동업이라 그쪽 집안 것까지 싹 적어왔어요. 뭐 이런 것도 잘 맞아야 서로 흥한다기에.”

순임의 눈동자가 주룩 써 내려간 생년월일 중 한 곳에 그리고 또 한 곳에 한참을 머물렀다.

부채를 든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가는 것을 앞에 앉아있는 여자가 보지 않게 풀어내느라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찾을 땐 그리도 잔혹하게 보이지 않았던 운명의 아이들이 스스로 눈앞에 찾아왔으니 기뻐해야 마땅했다.

과히 그랬어야 했지만. 순임의 낯빛은 결의에 찬 듯 차갑게 굳어졌다.

얼굴을 다 가릴 만큼 하얀 부채 위에 먹으로 쓰인 글씨가 빼곡했다.

탁! 그 부채가 접히는 소리와 동시에 벼락이 치듯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감히 누구 앞에서 시험을 하려 드는 게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한 꺼풀 가려 아무 일 없다 하면 세상만사 전부 네가 원하는 모양새로 만들 수 있는 이가. 왜 굳이 나 같은 잊힌 무당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는가.”

순임의 호통 치는 목소리에 여자가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보살님!”

“귀한 고명딸이 무당이 될 팔자라.”

입이 떡 벌이지는 순간이었다.

미심쩍게 방안을 둘러보던 남자의 낯빛도 파리하게 바뀌며 여자의 옆에 달싹 달라붙어 고개를 숙여 내렸다.

“방도가 있다 들었습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들어도 상관없으니 제발 막아주세요.”

막아 달라. 말하는 이의 눈빛이 어찌 저리 차곡차곡 욕심이 들어찬 것인지.

그 순간 순임의 귓가에 예전 일이 아우성치듯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뭐…? 무당이 될 팔자라고? 하… 엄마로도 모자라서 내가 낳은 아이까지 무당? 난 싫어! 절대 절대 싫어!”

그날 밤 어린 채온을 두고 떠난 순임의 딸 서라의 목소리였다. 순임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떨어지지 않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통의 운명을 타고난 아이가 아닌 것을. 딸이 무당의 길을 피할 수 있는 방도는 단 하나뿐.”

“그게 뭡니까?”

“말씀해주세요. 무엇이든 구해오겠습니다.”

그게 무엇이라도. 욕심 많은 부모일지라도 자식일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순임은 부채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흘러나오던 살벌했던 기운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온화한 표정을 한 얼굴에 걸맞은 순임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흘렀다.

“아주 특별한 부적을 곁에 두고 12년을 보낸다면 그 팔자의 모양이 바뀔 터.”

“특별한… 부적이요?”

“같은 해 같은 일시에 태어난 붉은 점 일곱을 지닌 여아를 집으로 들이시오. 사람의 죽음과 불행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을 지닌 아이를 집안에 모심으로 그 집안에 건강과 평안을 가져오리.”

두 남녀는 서로를 황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가 순임을 바라보았다.

“그런 특별한 아이를 어디에 가서 찾는단 말입니까.”

“찾았다 하더라도 누가 아이를 선뜻 남에게 맡기겠어요.”

“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입니다. 이미 금기를 입에 담았으니 전 아마 얼마 못 가 죽게 되겠지요.”

이미 정해진 운명을 바꿔내는 금기. 이를 행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해를 입게 된다 했다. 순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꿇어 앉아있던 두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왜… 그렇게까지….”

“때론 남을 위해 행하는 일이 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의미심장한 이야기에 여자의 눈빛이 몹시도 혼란스러웠다.

“한 가지 약속을 해주신다면 그 북두칠성의 아이를 만나게 해드리지요.”

만나게 해준다. 이 또한 모두 내다봤다는 얘기였다. 순임의 영험함에 남자의 눈이 번뜩거렸다.

“무슨 약속입니까?”

“꼭 19살이 되는 해까지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게 그리고 따님과 같은 배움까지. 약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지… 지킬 수 있습니다!”

“꼭 그리하겠습니다.”

금기를 어겨 목숨을 내어놓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랬을까 너무도 시원스런 대답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순임이 요구하는 조건이라는 것이 너무 쉬웠다. 고작 그 정도로 제 딸의 인생이 바뀐다니 속으로 신이 절로 났다.

“이틀 뒤 밤에 아이를 데리러 오시죠.”

“정말 감사합니다.”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인사를 한 두 사람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순임의 집을 나섰다.

그날 밤 순임은 곤히 잠들어 있는 채온의 머리맡에 앉아있었다. 얼마나 쓰다듬었는지 채온의 볼, 이마, 머리카락이 반질거렸다.

“채온아, 네 탓이 아니란다. 주어진 네 삶을 살아내렴. 비록 그 과정은 고달플 것이나 참고 견뎌야 한다. 붉은 일곱 개의 별 중 여섯 개의 별이 빛을 잃는 날. 질긴 팔자의 뒤바뀜이 이뤄지고 남은 하나의 별이 어둠에 휩싸인 그 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두 사람의 삶에 빛이 가득 채워질 것이라.”

이틀이 흐른 뒤 채온이 눈을 떴을 땐 할머니 순임이 보이지 않았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그들은 채온에게 순임이 아파 자신을 이곳에 맡겼다 말했다.

입양.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밀어 넣어 밥을 먹여주고 학교를 보내주는 정도의 아이로 자라났다.

그들의 집안은 채온이 들어온 이후로 날로 번창했고 그로 인해 준재벌에서 재벌 끝자락에 이름을 올릴 지경이 되었다.

***

“남채온 씨?”

채온은 조금 전 들은 말이 제대로 들린 것이 맞는지 의심에 빠져있었다.

눈알이 오른쪽으로 데굴, 또 왼쪽을 데구르 굴러갈 때 즈음 귓가에 천천히 울리는 제 이름에 채온의 눈이 번뜩였다.

“네?”

“제가 했던 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습니까?”

맞다. 정자세로 앉아 말끔한 차림새를 하곤 말간 얼굴을 한 남자가 조금 전 한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다만, 더욱 충격인 것은 저 남자의 존재 자체였다.

“전… 오늘 면접을 보러 온 것입니다.”

꾸욱. 겨우 누르고 눌러 최대한 어색하게 내뱉은 채온의 대답이었다.

“저 역시 면접을 주관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녀의 말에 부응하듯이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채온의 눈이 그를 힐긋거렸다.

면접을 보러 발을 딛었을 때부터 느껴진 서늘하다로는 부족한 싸늘한 느낌. 단 한 사람이 피워내는 분위기였다.

빤히.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빛은 정말로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볼 정도로 긴장감을 밀어 올렸다. 늘 예외라는 것은 존재하는 법. 채온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려 올라갔다.

“특이한 면접이라는 얘기를 듣고 오긴 했지만 이런 신박한 희롱은 또 처음이라서요. 면접 도중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내고 목덜미를 보여 달라는 것이 정상적이라 생각하시나요? 한 로펌의 대표로서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채온은 처음엔 제가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질문을 했다. 한 로펌의 대표. 이름은 지우재라 했다. 그는 아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졌다.

미친놈이세요? 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가려는 것을 간신히 달래 물린 뒤에 터진 채온의 입.

제 생각을 말하는 그녀에겐 망설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우재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정확히 마주하자 채온의 눈빛이 흔들. 춤을 췄다. 날카로운 시선에 베일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그가 주는 위압감 때문에도 아니었다.

한참이나 지나도 잊히지 않았던 짙고 검은 눈동자. 그 안에 들어있던 어둠과 외로움까지 그대로였다.

“겨우 참고 있겠군요.”

“뭘요?”

다시 흘러나온 단조롭기 짝이 없는 우재의 말에 아프게 찔린 듯 채온의 이마가 눈에 보일 만큼 찌푸려졌다.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싶은 욕구를.”

“지금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오묘하게 말을 이어가는 우재의 화려한 언술이 훅하고 채온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냉소적인 목소리였다.

“내일부터 출근하시죠.”

“뭐라고요? 장난하세요?”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무슨 손바닥 위에 장기 말을 올려둔 사람처럼 자신의 지위와 힘을 이용해 사람 한 명을 이리저리 움직이다니 최악이었다.

채온의 감정은 상관없다는 무표정을 이어가던 우재의 입이 다시 떨어졌다.

“아니요. 장난 아닙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아까 제가 했던 그 질문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에는 다양한 유형들이 있었습니다. 한마디 말을 못 한 채 나가든지 아니면 억울해서 울거나 정말로 단추를 풀어내던.”

“하….”

“그런데 오늘 남채온 씨는 울지도 말을 못 하지도 단추를 풀어내는 행위를 하지 않고 본인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했죠. 물론 욕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로펌에서 일을 하다 보면 많은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마다 당황해서 화를 내거나 울거나 그 요구에 맞춰 일일이 들어주는 사람은 채용할 수가 없습니다. 금세 그만둘 테니까요.”

기가 막히게 흘러나오는 말은 청산유수 그 자체였다. 고개가 자연스럽게 끄덕여질 만큼의 논리에 채온 역시 자신도 모르게 수긍의 말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옹졸한 마음이 먼저 빼꼼하고 출발선에서 빠르게 나아가고 말았다.

잡을 겨를도 없이.

“제가 고졸이라 우습게 보신 건 아니고요?”

“고졸이면. 우습게 봐도 되는 겁니까?”

우재의 입술을 타고 나온 다소 불편한 목소리에 채온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자존심을 챙길 요량으로 내뱉은 말이 겨우 저런 바닥이라니. 바보 같았다.

채온은 진지하게 말을 잇고 있는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었고 더 붙여낼 말이 없어 입을 떼어낼 수 없었다.

“…….”

“본인을 스스로 낮추는 사람에겐 기회는 찾아오지 않는 법입니다. 한국 법대를 수석으로 입학했던 사람이 무슨 이유로 그토록 오랫동안 휴학을 했는지 한 장의 자소서에서는 알 수 없지만, 이토록 생각이 얕은 사람인 줄은 몰랐습니다. 아까 채용하기로 한 것은 취소하도록 하죠.”

서로 뭐 실망할 것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왜 그는 제게 실망한 눈빛을 보내고 저는 또 그 눈빛에 목 끝이 조이는 느낌이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뭐… 라고요? 취… 소?”

채용한댔다 취소한댔다. 아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는 것이냐는 말이 목구멍을 타고 기어 나오려는 순간.

우재의 입술이 먼저 열리며 건조롭고 단출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 그만 나가시죠.”

채용은 취소입니다. 나가시죠. 분명 존대와 함께 정중한 목소리였다. 더는 말을 덧붙일 수 없는 분위기에 뒤돌아 나오던 채온이 들으라는 듯 속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었다.

“별… 미친….”

쾅.

채온의 불쾌함이 고스란히 담긴 문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꼿꼿이 세우고 있던 우재의 등이 스르륵 무너져 내리듯 의자에 기대어졌다. 이어 허탈한 표정과 함께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름이 남채온이었나.”

우재가 살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졌어야 했던 그 날은 하루하루 더욱더 선명하게 우재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

“저기요.”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위스키 바에 물 흐르듯 들려오는 채온의 목소리에 우재의 고개가 부드럽게 돌아갔다.

아직 술을 많이 마신 것이 아닌 상태라 믿었는데 꽤나 술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그럴 리 없고 그럴 수 없는 현상이 눈앞에 펼쳐지다니 정신을 차리려 우재는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저기요.”

다시 우재를 부르는 맑은 목소리에 긴 속눈썹으로 덮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떻게? 왜? 무수한 질문이 우재의 눈동자를 타고 흩어졌다.

“왜 당신 같은 남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요?”

한 손으로 하얗고 조그마한 얼굴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었다. 흰 피부와는 상반된 길고 까만 흑색 머리칼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긴 속눈썹이 오르락내리락했고 중심으로 곧게 뻗어 있는 코가 적당히 매끄러운 선을 이었다.

그리고 옴폭 패인 인중 아래 머물러 도톰한 입술은 탐스러운 앵두 빛이 은은하게 물들어 있는 것 같았다.

우재는 채온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할 뿐 아무 대답을 내어 놓지 않았다.

술에 취했다고 치부하기엔 너무 멀쩡한 정신이었다. 반짝이다 못해 일렁여 어지러울 지경인 여자의 눈빛에 결국 우재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러는 그쪽은 왜 그런 눈으로 울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