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클로저>

#1.

“후우우….”

고요한 정적을 뚫고 들리는 긴 호흡소리.

윤이 앞에 앉은 성태의 수신호를 보며 고개를 가로 젓는다.

두 번의 거절 끝에 마침내 예스.

긴 호흡을 내 쉰 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손을 서서히 머리 위로 올리고….

온 힘을 오른손 손끝에 집중하여….

퍽!

“스트~~~~라이크!”

“경기 종료! 9회말 2아웃 만루의 위기를 서 윤 선수가 삼진으로 마무리 합니다! 4:3의 스코어! 지한과 성산의 빅매치, 지한 터틀스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의 함성소리가 퍼져나간다.

***

“네? 스포츠부요!?”

“그래… 이번에 스포츠부 애들이 단체로 중인일보로 넘어갔어. 각 파트에서 지원 보내라니까 유 기자가 당분간 지원해 줘.”

시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는 사수의 지시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하….”

자리로 돌아온 시은은 짐을 챙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영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 지 3년 차.

이제 사회부에 좀 적응할 만한데 난데없이 스포츠부라니!

게다가 야구… 파트…?

야구장은 태어나서 한 번도 안 가 본 곳인데…?

“저 가볼게요.”

“유 기자, 그동안 고생했어. 힘내고!”

시은은 힘없이 사회부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자 선배 기자들은 시은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사회부를 나와서 영 떨어지지 않는 발바닥을 억지로 떼어가며 조심스럽게 스포츠부 출입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오늘 스포츠부로 발령 난….”

“왔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말하던 시은의 목소리를 끊고 우렁찬 환영이 들려왔다.

“사회부에서 온 유시은 기자, 맞지?”

“네, 안녕하세요. 유시은입니다.”

오매불방 시은을 기다렸던 여진이 시은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녕? 난 스포츠부 팀장 김여진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네, 팀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여진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자 시은도 웃으며 답했다.

낯선 곳에 대한 불안감이 여진의 환영으로 인해 조금은 덜어진 느낌이었다.

“여기는 우리 막내! 야, 상준아 퍼뜩 안 일어나냐?”

“아, 일어나요 지금…. 안녕하세요, 안상준입니다.”

여진의 명령에 자리에 엎드려 있던 상준이 스르륵 일어나 귀찮다는 얼굴로 꾸벅 인사했다.

“네, 잘 부탁드려요.”

“잡다한 일이나 보조업무 있으면 얘 가져다 써! 투덜투덜 대긴 할 텐데 그건 무시하고. 나름 시키는 건 투덜대면서 잘 하니까 막 부려먹어요.”

여진의 부연설명에 상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시은이 웃음을 터트리며 알겠다고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연예부에서 온 이승민입니다.”

그 때, 세 사람의 뒤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다 왔군! 어서 와요, 역시 이 기자가 올 줄 알았어.”

여진이 환하게 웃으며 승민을 맞이했다.

승민까지 소개하고 난 후, 여진은 각자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가운데 위치한 여진의 자리를 기준으로 왼쪽에 막내 상준이, 오른쪽에 시은과 승민이 나란히 앉았다.

“참, 내일 터틀즈 인터뷰 따야 하는데…. 음, 유 기자가 한 번 해볼래?”

“터틀…즈요? 거북이…?”

여진의 말에 시은이 당황한 눈으로 되물었다.

“크큭, 거북이는 맞는데 야구단 이름이에요. 유 기자님, 지한 터틀즈 몰라요?”

옆에 있던 승민이 웃음을 참으며 시은에게 말했다.

“아…. 네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당황한 시은은 얼굴이 붉어진 채 황급히 대답하곤 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하하, 유 기자 이제 스포츠부 적응 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거북이 인터뷰 말고 야구선수 인터뷰 따와야 해!”

“거북이 인터뷰 싣는 것도 파격적이고 참신한데요, 뭐….”

여진의 말에 이어 상준까지 피식대며 중얼거리자 시은은 더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당장 야구에 대해 공부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지한 터틀즈 인터뷰면 김성태 선수에요? 서 윤은 안 되겠죠?”

시은이 인터넷에 지한 터틀즈를 검색하고 있을 때, 옆에서 승민이 물었다.

“서 윤 인터뷰면 대박이지, 다른 기사 다 필요 없이 그거 하나만 내보내도 될 걸?”

승민의 질문에 여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서 윤이요…?”

시은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승민에게 물었다.

“국가대표 마무리 투수이자 지한 터틀즈의 철벽 클로저! 이게 서 윤 선수한테 붙은 수식어에요.”

“그보다 유명한 수식어가 야구하는 영화배우지.”

승민의 설명에 이어 여진이 덧붙였다.

“본업이 영화배우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잘생겼거든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시은을 본 승민이 옆에서 설명해 주었다.

“서 윤 인터뷰까지 안 바래. 그냥 김성태 선수 인터뷰라도 따 와봐.”

“그럼 서 윤 선수 인터뷰 따올게요!”

여진이 부드럽게 웃으며 시은에게 말하자, 시은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 모습에 앞에 앉아있던 상준이 조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패기 있으시네….”

“하하! 유 기자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지 마.”

“왜 무리에요?”

여진의 말에 시은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서 윤 인터뷰는 하늘에 별 따기야. 구단에서 철저하게 서 윤의 인터뷰를 통제하거든.”

“구단에서요?”

“응, 구단이 먼저 통제하는 건지 본인이 안 하겠다 구단에 요청한 건진 모르지만 아무튼 서 윤 인터뷰는 구단에서 막아. 여태 서 윤이 1군 데뷔한 후로 인터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여진의 설명에 시은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 괜한 오기 부리지 말고 김성태 선수 인터뷰 따 와, 유 기자.”

***

다음 날.

잘 빠진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야구장으로 들어섰다.

“어! 서 윤이다!”

야구장 입구에 서 있던 팬들이 윤의 차를 발견하고 우르르 달려갔다.

미끄러지듯 들어온 차는 정확하게 주차라인에 멈추었고, 열린 운전석 문 아래로 길쭉한 다리가 스윽 튀어나왔다.

“오빠! 잘생겼어요!”

“꺅! 오빠, 저랑 결혼해요!”

“윤이 오빠! 사인 해 주세요!”

“서 윤 선수, 사진 한 번만 찍어주세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팬 층을 보유한 윤답게, 순식간에 많은 팬들이 윤을 둘러싸며 외쳤다.

팬들의 외침 사이로 선글라스를 낀 윤이 씨익 웃으며 몇몇 팬들에게 싸인을 해 주었다.

“자자, 선수님 들어 가실게요.”

구단 경호원들이 팬들을 가로질러 윤의 주위로 벽을 치며 윤이 지나갈 길을 만들어주었다.

“3분.”

윤이 바로 옆에 서있는 경호팀장의 귀에 대고 낮게 중얼거렸다.

“3분이나 내가 여기 서서 시달려야 해요?”

입가에 미소를 유지한 윤이 서늘한 목소리로 경호팀장에게만 들리도록 말하였다.

“죄송합니다.”

경호팀장의 사과를 듣고 나서야 윤은 팬들을 향해 다시 환하게 웃어주고 구단 사무실로 향했다.

라커룸에 들어 온 윤은 소파에 몸을 묻으며 야구공을 만지작거렸다.

“윤아, 오늘 컨디션 어때?”

“별로에요. 선발투수들 길게 좀 던지라고 해요. 아님 타자들보고 점수 좀 많이 내라 하던가.”

투수 코치를 맡고 있는 김 코치의 질문에 윤이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알겠어, 알겠어. 가급적이면 너까지 등판하는 일 없도록 할게.”

쩔쩔매는 김 코치의 뒤로 성태가 다가왔다.

“코치님, 얘 그렇게 다 받아주지 말라니까요?”

“야! 성태야!”

성태의 말에 김 코치가 윤의 눈치를 살피며 성태를 막아섰다.

“코치님들이 그렇게 다 오냐오냐 해주니까 얘가 성격이 점점 더러워져요.”

김 코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태는 코웃음 치며 윤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성태의 말에 윤이 인상을 쓰며 성태를 노려보았지만, 성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럼… 푹 쉬고…. 30분 남았으니까 유니폼은 어서 갈아입어….”

김 코치가 윤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하고 라커룸을 나갔다.

“어깨는? 어제 아이싱 하고 잤어?”

성태가 윤을 향해 물었다.

“응.”

윤은 성태를 보지도 않고 야구공을 허공에 던졌다 받으며 대답했다.

“성산 애들 어제 져서 오늘 아마 바짝 약 올라 있을 거다. 게다가 걔네 오늘 1선발이라 우리 애들이 점수내기 힘들 걸?”

“그럼 어차피 질 거 초반에 실점 해.”

“이 자식이 이걸 말이라고! 야 인마, 우리도 오늘 1선발이거든?”

“에이 씨, 어제 던졌는데 오늘도 또 던지는 게 어디 있어? 싫어, 나 안 나갈 거야.”

“너 이번 주 어제 하루 등판했어. 오늘까지는 던져도 되니까 7회부터 몸 풀어라.”

윤의 투덜거림에도 성태는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성태는 구단에서 유일하게 윤에게 할 말을 다 하는 사람이었다.

***

“여기가 야구장인가…?”

시은은 기자 출입증을 목에 걸고 야구장 입구를 두리번거렸다.

“선수들은 다 어디 있는 거야…?”

구단 사무실을 지나친 시은이 아무도 없는 복도를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어? 저기요!”

시은의 부름에 막 라커룸에서 나온 윤이 돌아보았다.

“선수들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해요?”

“네?”

시은의 질문에 윤이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윤은 시선을 내려 시은의 목에 걸린 기자 출입증을 발견하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던 시은은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아, 저는 제영일보 스포츠부에서 나온 유시은 기자라고 합니다. 오늘 김성태 선수 인터뷰하기로 했는데, 혹시 구단 직원이신가요?”

사복차림의 윤을 알아보지 못한 시은은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윤에게 물었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김성태 선수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윤은 시은에게 친절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시은은 윤의 말에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하고 밝게 웃어보였다.

시은을 지나치며 윤은 한 쪽 입꼬리만 올린 채 시은에게 들리지 않도록 중얼거렸다.

“경기 다 끝나고… 4시간 정도면 곧 이지 뭐.”

성태는 윤이 라커룸을 나오기 한참 전에 이미 덕아웃으로 향했다.

***

한 시간을 꼬박 라커룸 앞에서 기다린 시은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쭈그려 앉아있던 시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고, 저 멀리 윤이 다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요!”

유니폼으로 갈아입기 위해 다시 라커룸을 돌아온 윤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시은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이내 친절한 미소를 장착했다.

“어? 성태 형 아직 못 만났어요?”

“한 시간 째 아무도 안 나오던데요? 이 안에 있는 거 맞아요?”

“아…. 조금 전에 주차장에서 봤는데…. 거기로 가 보세요!”

“진짜요?”

윤의 말에 시은이 의심가득한 눈으로 되물었다.

“속고만 사셨나? 진짜니까 어서 가 봐요. 또 놓치기 전에.”

“흠…. 알겠어요. 고마워요.”

시은이 윤에게 탐탁치 않은 투로 감사인사를 전하곤 빠르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 사이 윤은 라커룸을 들어가 빠르게 유니폼을 갈아입고 덕아웃으로 향했다.

“하…!”

주차장에서 또다시 한참을 기다린 시은은 약이 잔뜩 올라 씩씩거렸다.

“김성태고 뭐고 아까 그 개자식부터 찾아 뺨이라도 후려치든지 해야지.”

시은이 씩씩대고 있는 사이, 경기가 종료되었다.

팬들이 하나 둘 주차장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시은은 점점 많아지는 팬들 사이에 끼어 오도가도 못 하고 좌우로 휩쓸렸다.

“곧 서 윤 나오겠지?”

“오늘 경기 안 나왔으니까 일찍 나오겠지.”

“윤이 오빠 차 여기다 주차하는 거 맞지?”

“응, 저기 저 파란 스포츠카. 저게 윤이 오빠 차잖아.”

시은의 옆에 선 여고생 두 명이 들뜬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시은은 서 윤이라는 이름에 귀가 솔깃해졌다.

시은은 곧바로 구단 사무실 쪽을 바라보았다.

김성태 인터뷰는 못 땄지만 운 좋으면 여기서 서 윤을 볼 수도 있다.

인터뷰도 스리슬쩍 시도해봐야지.

“어? 나온다! 윤이 오빠!!”

“서 윤, 서 윤!”

윤이 구단 사무실에서 걸어 나오자 팬들이 우르르 몰려가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틈에 시은도 윤을 보기 위해 고개를 길게 빼면서 팬들에게 휩쓸려 앞으로 다가갔다.

“어? 어어!”

구름떼처럼 몰린 팬들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시은은 앞으로 계속 튕겨져 나갔다.

“아, 밀지 말아요.”

“악! 그만 밀어요.”

팬들은 서로 소리치며 밀치고 있었고, 그 틈에 윤도 휩쓸리기 시작했다.

그 때, 윤의 발이 누군가의 발에 걸리고 윤의 상체가 앞으로 휘청이며 비틀거렸다.

툭.

팬들에게 밀린 시은은 무언가 제 입술에 닿았다 떨어짐을 느끼고 깜짝 놀라 앞 사람을 바라보았다.

시은의 앞엔 윤이 놀란 눈으로 시은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은의 입술에 부딪힌 그것은 윤의 입술이었다.

시은을 뺑뺑이 돌린 그 개자식이 서 윤이었다.

“어어…?”

당황하며 손가락질 하는 시은을 윤이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만요! 질서 지켜주세요. 선수님 지나가실게요!”

뒤늦게 도착한 경호원들이 멍해진 윤을 데리고 이끌었다.

윤은 놀란 얼굴 그대로 경호팀장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차로 향했다.

윤의 이동에 따라 팬들이 우르르 이동하자, 시은은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저 개자식이… 서 윤?”

팬들과 함께 멀어지는 서 윤의 뒷모습에 시은이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경호팀장의 가드를 받은 윤은 자신의 차 운전석에 올라서도 여전히 넋이 나가있었다.

“분명… 입술이었지?”

윤은 입술에 손을 대며 방금 전 감촉을 떠올렸다.

“감히 내 순결을…. 이런 식으로 뺏다니!”

한참 입술에 손을 문지르던 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튀어나오는 말과는 달리 머릿속에선 시은과의 접촉이 계속 떠올랐다.

부드럽고 촉촉한, 하지만 낯선 감촉.

7세 이후, 윤의 입술엔 음식 외에 타인의 신체가 닿은 적이 없었다.

윤은 31세가 되도록 야구에만 몰두하느라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없었다.

잘생긴 외모와 180을 훌쩍 넘는 기럭지, 국가대표 A급 투수라는 타이틀 덕에 주변에 다가오는 여자는 넘쳤지만 20대 때는 야구에만 몰두하느라, 서른이 넘어서는 딱히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없었기에 여자는 관심 밖이었다.

그리하여 서 윤은 서른하나가 되도록 연애경험 한 번 없는 모태솔로가 된 것이었다.

여자 손도 제대로 못 잡아 보았는데, 입술부터 경험하다니!

그 생경한 느낌에 윤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