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점점 드러나는 실체

다음 날 아침, 관아에 도착한 도원은 관아 뜰에 길게 놓인 멍석을 발견했다. 급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심란한 얼굴로 멍석을 내려다보던 현감이 도원을 향해 빨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리, 이게 다 무엇입니까?”

“이보게 설 종사관,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낭패를 당한단 말인가!”

뺨을 부들부들 떨며 한탄을 늘어놓는 현감을 보던 도원이 멍석을 내려다보자 현감은 멍석을 향해 손가락을 흔들었다.

“어젯밤 송산마을의 한 집에서 파진포가 터져 죽은 이들일세.”

“파진포요?”

“그렇네. 파진포. 민간의 초가집에서 파진포가 터지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도원은 얼른 멍석을 걷어내고 바닥에 뉜 세 구의 시신을 살폈다. 심하게 화상을 입은 시신은 여기저기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처참했고 몸에도 뾰족한 쇳조각이 이리저리 박혀 있었다.

“이 자들 말고 또 다친 이는 없습니까?”

도원의 물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현감이 정 포교에게 턱짓하자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없습니다. 가운데 누운 이가 오석만이라는 자인데 저자의 집에 셋이 모여 있다가 일을 당한 모양입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지난 밤 자정 즈음에 큰 폭발음을 들은 이웃이 오석만의 집으로 달려갔더니 불이 난 집안에는 연기가 자욱했고, 방안에서 저 셋이 신음하고 있었다 합니다. 빠른 속도로 불길이 번지기 시작해서 간신히 이자들을 꺼내기는 했으나 모두 숨을 거두었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제가 가 보니 집은 거의 다 탔는데 방이 있던 곳은 바닥이 움푹 팼고 마당에는 부서진 나뭇조각이나 쇳조각이 모래와 함께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럼 파진포인 것은 어찌 알았는가?”

“폭발로 날아간 쇳조각들은 대부분 아륜철(牙輪鐵)이었고 방안에서는 부싯돌로 보이는 돌조각들이 망치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아마 저자들이 파진포인 줄 모르고 망치로 두드린 듯합니다.

“나리, 파진포라면 전쟁 물자가 아닙니까? 그런 것이 민가에 있을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제가 직접 현장을 살펴봐야겠습니다.”

도원의 말에 오만상을 찌푸린 채 관자놀이를 누르던 현감은 알았다는 듯 손짓을 해 보였다.

송산마을 오석만의 집에 도착한 도원은 마당에 떨어져 있는 쇳조각을 집어 들었다. 거북이 등껍질 무늬를 새겨 넣은 조각을 유심히 살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 포교가 데려온 포졸들과 함께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세간이 거의 불타버린 탓에 건질만한 단서가 없었다. 도원은 정 포교에게 다른 두 명의 집을 수색하라고 분부하고는 오석만의 이웃들에게 그에 관해 물었다. 그러나 평범한 농부였다는 한결같은 답만 이어지자 도원은 결국 빈손으로 관아로 돌아왔다.

동헌에 앉아 날이 어두워지도록 현감의 하소연이 섞인 푸념을 듣던 도원은 정 포교의 부름에 그 어느 때보다 반갑게 밖으로 나갔다.

“나리, 천영춘에게 어서 가 보셔야 할 듯합니다.”

“왜?”

“아까부터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지금은 피까지 토하고 있습니다.”

포교의 말에 놀란 도원이 옥사로 달려갔다. 옥사에 들어가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바닥에서 몸을 뒤틀고 있는 영춘이 보였다. 도원은 얼른 옥 안으로 들어가 그를 흔들었다.

“이보게! 이게 무슨 일인가!”

“누구의 짓인가? 누가 자네에게 독을 먹인 것인가! 어서 말을 해 보게!”

입뿐 아니라 코와 눈에서도 피를 쏟으면서도 도원의 소매를 꼭 잡은 영춘이 입을 달싹이자 도원은 얼른 그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한……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간절한 눈빛을 보내던 영춘은 이내 고개를 바닥에 떨궜다. 눈도 감지 못한 채 허공을 향한 피맺힌 붉은 눈에서 생명의 빛이 꺼지는 것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던 도원은 손을 뻗어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 포교에게 옥사를 드나든 이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모으라는 명을 내리고 도원은 한달음에 동헌으로 돌아갔다. 천영춘이 독살되었다는 도원의 말에 현감은 뒷목을 잡으며 쓰러졌고 아전들은 현감이 쓰러지자 온 관아를 뒤흔들 정도로 야단법석을 떨었다.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소동을 뒤로하고 도원은 다시 옥사로 돌아갔다. 도원의 명을 받은 정 포교는 영춘이 죽기 전에 옥사를 감시하던 포졸들을 포함하여 식사를 나른 찬방의 하인들까지 모두 한곳에 모았다. 그들 앞에 선 도원은 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중에 천영춘에게 독을 먹인 자가 있다. 그자를 잡을 때까지는 아무도 나갈 수 없으니 그리 알라!”

도원의 엄포에 모인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두려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쓰러진 현감을 대신해서 정 포교와 함께 한 명 한 명 심문했지만 모두 자신은 아니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잃어버린 상자의 행방은 알아냈지만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한 데다가 길고 긴 심문에도 불구하고 천영춘을 죽인 자도 찾아내지 못한 도원은 의진의 집 사랑방 마루에 털썩 피곤한 몸을 내려놓았다. 어둑어둑한 마당 한쪽에 만들어진 화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근처 개울에서 빈 그릇들을 함지박에 담아 들고 돌아오는 의진이 보였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오. 저녁은 먹었소?”

도원의 축 처진 어깨와 피곤해 보이는 눈가를 확인한 의진이 묻자 도원은 대답 대신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복잡하게 얽힌 사건들은 해결의 기미는커녕 점점 더 꼬여가기만 하는 통에 잠시 기운을 잃었던 도원은 모든 것을 잃었으면서도 씩씩하게 버티는 의진의 모습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시나마 나약해진 마음을 추스른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최대한 끌어 올리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윽하게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버거운데 자신을 향해 근사한 미소까지 걸자 의진은 당황하여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와 단둘이 있으면 몽글몽글해지는 심장은 물론이고 공기의 흐름마저 달라지는 듯한 기분을 떨치려 의진은 냉큼 방문을 열었다.

“안 들어올 거요?”

방문을 잡은 채로 의진이 뒤를 돌아보자 도원은 다시 홀릴 듯한 미소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중요한 일이 두 가지나 있었소.”

방에 들어와 앉은 도원이 입을 열자 동그란 네 개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이오?”

하루 종일 그의 소식을 기다렸는지 눈을 반짝이며 상체를 곧게 세운 사흠이 묻자 피곤이 내려앉은 눈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던 도원이 입을 열었다.

“우선 첫 번째로 상자를 가져갔던 이들의 정체를 알아냈네. 오늘 상자가 터져서 세 명이 죽었다네.”

“그럼 서찰에 적힌 대로 그 상자가 파진포였던 것이오?”

놀란 사흠이 되묻자 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내가 직접 자물쇠에서 떨어져 나간 거북이 등껍질 장식과 상자를 싸고 있던 아륜철 조각을 확인했네.”

사실 며칠 전 바위틈에서 찾아낸 상자에는 비격뢰의 설계도와 함께 서찰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서찰에는 무기를 노리는 이들의 손에 비격뢰가 들어가는 일을 막기 위해 상자를 파진포와 비격뢰의 원리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었다.

따라서 자물쇠를 열줄 모르는 이가 상자를 억지로 열기 위해 충격을 가하면 파진포처럼 터지게 되고 그러면 그 충격으로 안에 들어있던 쇳조각들이 사방으로 날아갈 것인데 그것이 바로 비격뢰의 원리라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서찰에는 비격뢰 모형을 지모산의 첫 자리에 숨겨두었다는 단서도 있었다. 그러나 셋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그자들이 바로 두 분께서 말씀하신 그놈들이 아니요?”

의진의 물음에 도원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쓰읍하고 쓴 입맛을 다셨다.

“집에 불을 내고 그 틈에 상자를 가져간 것을 보면 선생께서 말씀하신 자들이 확실한 것 같은데…. 아쉽게도 폭발이 너무 강해 범인들이 모두 죽고 말았소.”

“죽은 이들은 누구요?”

“송산마을에 사는 오석만, 김도필, 이명순이라는 사내들인데 모두 근처에서 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부들이라고 하더군. 다만 셋 다 천영춘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었고 천영춘과도 가까이 지내는 이들이었소. 하지만 그자들이 송방 선생을 감시한 자들인지, 왜 상자를 가져갔는지를 밝힐만한 증거는 아직 찾지 못했소.”

“흠……. 그럼 천영춘을 심문해보면 되지 않겠소? 그들이 모두 한통속이라면 말이오.”

“그럼 좋겠지만 천영춘 역시 누군가가 쓴 독에 죽고 말았소.”

“천영춘이? 하지만 그자는 옥사에 갇혀 있었잖소?”

놀란 사흠이 묻자 도원은 한숨과 함께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니 옥사에 있던 포졸이나 식사를 준비했던 이들 중에 범인이 있는 것일세. 그리고 범인은 아마 세작일 것이고.”

“그게 무슨 말이오?”

의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것과 달리 사흠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설 종사관이 천영춘이 자기 처가 살해된 것을 몰랐던 듯했다고 하지 않았소? 만일 천영춘이 세작이었다면 뭔가 눈치를 채고 친정으로 가려던 처를 세작 조직 내에서 처리했을 수 있지. 그리고 그런 위험을 예견했던 천영춘이 처에게 가면 안 된다, 큰일 난다고 말했다면 상황이 앞뒤가 맞고 자연스럽잖소.”

사흠의 말에 도원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네. 안 그래도 집에서 왜도가 나와서 궁지에 몰린 판국인데 자결한 줄 알았던 처가 살해당했다는 사실까지 알았으니 천영춘이 모든 사실을 실토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지.”

“그래서 조직 내의 다른 누군가가 천영춘을 제거했다 그 말이오?”

의진의 물음에 사흠과 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천영춘이 세작이라면 한양 풍류각의 세작과 일당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소?”

한 손으로 턱을 쥔 채로 묻는 사흠의 말에 도원은 눈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나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네.”

“그럼 세작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무기도 빼앗으려 했던 것이 아니겠소?”

의진의 추측에 고개를 끄덕인 도원이 두 사람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정황상 두 분께서 말씀하신 그놈들의 존재가 세작일 가능성이 생겼으니 다시 한번 상황을 정리해보세. 사흠 도령의 가족을 몰살한 이가 감명일이라면 송방 선생을 살해한 이들은 세작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찌 보는가?”

도원의 물음에 의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째서?”

“사흠 도령의 가족 같은 경우 다량의 살상으로 사건이 겉으로 크게 드러났소. 그러나 세작이라면 굳이 많은 사람을 도륙해서 일을 크게 만들기보다는 은밀하게 처리하기를 원하겠지.”

“그럼 같은 날 세작과 감명일이 동시에 움직였다는 말이오?”

“그렇지. 하지만 차이는 감명일의 자객은 사흠 도령의 집을 먼저 급습했고, 세작들은 송방 선생을 찾아온 것이오. 실제로 비격뢰의 단서가 선생에게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세작들은 감명일 쪽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하오.”

도원의 추측에 사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왜 같은 날 움직였다고 생각하오? 단순히 우연의 일치였을까?”

“두 분이 돌아가셔서 알 수야 없겠지만 내 생각에 나를 부르신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네.”

“그게 무슨 말이오?”

“두 분이 어떤 위협을 감지하신 것은 틀림없네. 그래서 비격뢰를 더는 이곳에 둘 수 없다고 판단하셨고, 나를 부르셨어. 양명신 영감께 비격뢰를 넘기기 위해서였겠지. 그리고 만일 누군가가 두 분을 내내 감시하고 있었다면 혼례와 같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을 때가 물건을 옮기기에 적기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혼례에 맞춰 나를 부르셨을 것이라 짐작하네.”

“하지만 두 분께서는 비격뢰를 꼭꼭 숨겨두셨지 않소? 수수께끼 같은 단서까지 남기시고.”

의진이 도원에게 묻자 사흠이 침울한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두 분은 이미 죽음을 예감하셨군.”

두 손으로 턱을 감싸 쥔 채 괴로운 한숨을 내쉬는 사흠을 위로하듯 그의 등에 가만히 손을 올린 도원이 대답했다.

“…. 나도 그리 생각하네. 무기를 빼앗기지 않기 위한 최후의 대비를 이미 해두신 상태라고 밖에는…….”

도원의 말을 끝으로 방안에는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주먹을 꼭 쥔 사흠이 결국 눈물을 떨구는 사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의진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나 역시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소.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나를 살려둔 것인지 그 연유를 모르겠소.”

의진의 물음에 도원이 대답했다.

“완전히 믿어지지는 않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으로만 본다면 그대를 살려 둔 것은 무기를 찾아내기 위함인 듯하오. 어쨌든 송방 선생의 유일한 혈육이고 가장 가까이서 그분을 보았으니 말이오.”

“흠…….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가 무기가 든 상자를 찾아냈고, 우리를 염탐하고 있다가 상자를 가져갔다? 하지만 상자를 훔친 것이 감명일의 사주를 받은 이일 수도 있지 않소? 무기를 뺏으려고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였는데 그대로 포기했을 리가 있소?”

“나는 다르게 생각하오. 내가 감명일이라면 가만히 상황을 지켜볼 것이오. 사흠 도령의 생사를 확실히 모르는 이 상황에 섣불리 나설 이유가 없지.”

“내가 모든 누명을 뒤집어쓰면 자신의 죄를 덮을 수 있으니까?”

붉게 충혈된 눈으로 사흠이 묻자 씁쓸한 표정을 지은 도원은 긍정하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렇지. 그자는 자네가 살아 돌아와 자신과의 일을 밝히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겠지. 잡아떼면 그만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시끄러운 사건에 휘말리는 일 자체가 보기 좋지는 않으니. 그러니 내가 그자라면 지금은 굳이 나서서 일을 만들기보다는 모른 척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겠네.”

도원과 사흠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의진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후…….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어서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았으면 좋겠소. 그러면 모든 사실이 드러나겠지.”

“문제는 감명일이든 세작이든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거란 것이오. 상자가 자기들 손에서 터졌으니 무기도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해주면 좋겠지만 오히려 상자 속을 확인하지 못했으니 우리를 계속 감시할 수도 있는 일이오.”

“세작으로 의심되는 이만 벌써 넷이 죽었는데 아직도 우리를 감시할 인력이 있겠소?”

도원의 말에 의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사흠이 대답했다.

“적어도 한 명은 있지 않소? 천영춘을 독살한 자.”

“그리고 또 한 가지. 천영춘이 죽으면서 한 말이 있소.”

“무슨 말이오?”

“한주.”

“한주? 그건 지명이 아니오?”

“그런 듯하오. 천영춘과 죽은 처의 고향이기도 하고.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 소매를 쥐고 말을 한 것을 보면 뭔가 중요한 말 같은데…. 그래서 아무래도 한주에 가봐야 할 듯하오.”

도원의 말에 의진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한주에?”

“세작이 얽힌 사건이라면 반드시 조사해야 할 필요가 있소. 내일이라도 당장 출발할 생각이오.”

도원의 말에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던 사흠이 상체를 곧게 세우며 말했다.

“그럼 설 종사관이 한주에 간 사이에 우리는 모형을 찾아봐야겠소. 서찰에 적힌 ‘지모산의 첫 자리’가 어디인지 알아내야지.”

“허나 지금으로선 그 일보다는 자네의 안위가 중요하네. 혹여 자네가 잡히기라도 한다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일세.”

도원의 말에 잠시 열의를 보였던 사흠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도원은 품에 가지고 있던 설계도를 의진에게 건넸다.

“내가 한주에 가 있는 동안 설계도를 잘 부탁하오.”

설계도를 받은 의진은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가 잘 지킬 테니 설계도는 걱정하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오기나 하시오.”

***

다음날 새벽, 짐을 꾸린 도원이 살그머니 사랑방을 나오자 어느새 따라 나온 의진이 인사를 건넸다.

“조심해서 다녀오시오.”

생각지도 못한 의진의 배웅에 감동했는지 도원은 고른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었다.

“나를 배웅하려고 이 새벽부터 일어난 것이오? 허…. 이런 감격스러운 일이 있나.”

도원이 넉살을 떨며 환한 웃음을 짓자 의진은 멋쩍은 듯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말했다.

“그냥 눈이 떠진 것인데 감격은 무슨…. 시끄럽고 얼른 가기나 하시오.”

그러자 도원은 금세 차분한 눈빛으로 의진을 바라보았다.

“내 얼른 다녀오리다. 나야 워낙에 믿음직스러운 사내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대 마음의 평안을 위해 정화수 떠놓고 비는 것 잊지 말고.”

도원의 헛소리가 기도 안 차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의진이 대꾸 없이 몸을 돌리자 그는 장난스레 웃다가 얼른 그녀의 소매를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양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는 진지하고 깊은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