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태자가 사라졌다.

지난 며칠간 모두 그 이야기뿐이었다.

‘그래서?’

알렉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그 녀석은 프라비아 공국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는데?

‘왕위 계승 서열 1위’라는 신분은 맥스에게 걸림돌이 아니었다. 인생을 100% 즐기며 살 수 있게 도와줬다면 모를까.

프라비아 공국의 황태자인 그의 사촌, 맥스웰은 그런 녀석이었다.

결과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놈.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가고, 당장 내일 중요한 공무가 잡혀 있어도 하고 싶은 일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놈.

이렇게 제멋대로 훌쩍 사라지는 일도 처음이 아니다. 그 녀석의 머릿속에는 ‘의무와 책임감’ 같은 단어가 들어 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모두 자신을 붙잡고 맥스의 행방을 물어볼 때마다 알렉은 그저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알렉이 웃어 보이면 모두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다들 안심하면서 맥스의 빈자리 때문에 생기는 공백을 그에게 메워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황태자’가 아닌 왕위 계승 서열 2위.

죽어라 고생만 하고, 챙기는 건 하나도 없는 허울뿐인 자리가 바로 ‘왕자’인 거라고 알렉은 삐딱하게 생각했다.

왕가란 그런 것이다. 훨씬 더 뛰어난 자질을 타고나서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일해도, 서열에서 밀리면 절대로 왕이 될 수 없다.

그런 억울한 일은 21세기에도 변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두 사람은 늘 그런 식이었다. 생일로 따지자면 알렉이 맥스보다 일곱 달 먼저 세상에 나왔지만, 아버지들의 나이는 그 반대였다.

알렉이 열 살 되던 해, 카레이싱을 즐기다가 모나코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의 아버지는 프라비아의 현 국왕 리오넬 2세의 동생이었다. 그래서 알렉은 언제까지나 사촌 맥스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 서열 2위에 불과했고, 맥스가 결혼해서 아들을 낳는다면 그마저도 뒤로 밀리게 될 서열이었다.

덕분에 알렉은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진리를 일찌감치 깨달았다. 언제나 모든 면에서 그가 맥스보다 뛰어나더라도, 결코 왕이 될 수 없다는 진리 말이다.

맥스와 알렉은 둘 다 외아들이라 궁에서 나란히 형제처럼 자라났다.

알렉은 먼저 글자를 깨우쳤고, 열세 살에 이미 6개 국어를 유창하게 말했으며, 키도 맥스를 훌쩍 앞질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결국 점점 비슷해지긴 했지만.

폴로와 농구, 승마 실력도 맥스보다 좋았다. 수영은 이따금 뒤처질 때도 있었지만 학교 성적만큼은 언제나 맥스를 앞질렀다.

맥스가 고등학교 시절, 일찌감치 클럽을 드나들며 파파라치들에게 좋은 먹잇감을 제공할 때에도 알렉은 조용히 도서관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자기 자리를 지켰다.

그는 누구에게도 흠 잡히지 않았고,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혹시나 자신에게 왕관이 돌아올지도 모를 1%의 가능성을 위해서 자신을 갈고닦는 일에 소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께 영국으로 유학 갔을 때에도 해리 왕자가 여는 바보 같은 파티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오는 것은 알렉이었다.

마지못해 얼굴을 비추긴 했지만 그런 곳에 모여드는 인간들을 내심 경멸했다. 그는 순간의 쾌락에 취해 눈먼 짓을 하는 바보가 아니니까.

이미 열한 살에 자기가 점찍은 소녀와 키스하는 위업을 먼저 달성해낸 맥스에 비하면 여자 문제만큼은 언제나 좀 뒤처졌지만, 그 외의 모든 면에서 알렉은 항상 맥스를 앞질러 왔다.

공무는 뒷전으로 미뤄 두고 틈만 나면 놀러 다니거나, 모델들이 잔뜩 나오는 패션쇼 같은 자리에나 얼굴을 비추고 싶어 하는 맥스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외무성에 소속되어 아침부터 밤까지 착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며 ‘일하는 왕자’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그래도 이변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결국 프라비아의 다음 국왕이 되는 것은 맥스이다.

산뜻한 금발에 푸른 눈동자, 183cm의 훤칠한 키에 눈부시게 웃는 햇살 같은 미남.

잘생긴 외모에 유쾌한 성격을 갖춘 황태자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무능을 용서받는 놈.

프라비아를 포함해 인근 유럽의 다른 도시, 그리고 바다 건너 미국이나 아시아까지 포함해서 21세기에도 ‘왕자’라는 족속에 대해 환상을 품고 있는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두고 있을 그 녀석.

알렉은 이렇게 간절히 바라는 ‘황태자’라는 지위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온갖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는 멍청이인데 말이다!

그런 인간이 왕이 되어 이 나라를 망치는 꼴을 두고 봐야만 하다니 이보다 큰 비극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녀석이 사라진 이유가 바로 ‘여자’ 때문이란 걸 알게 되어도 모두들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있을까? 그것도 ‘자기 아이를 임신한 여자’와의 만남을 피하려고 비겁하게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말이다.

그걸 알아도 다들 이 잘생기고 철없는 황태자를 마냥 감싸 줄 수 있을까?

알렉은 이 흥미진진한 정보가 자신과 맥스의 삶을 어디까지 흔들어 놓을 수 있을지 침착하게 두고 볼 참이었다.

그리고 가장 적당한 순간에 효과적으로 써먹을 생각이었다.

맥스를 파멸시킬 수 있을 만한 순간에 말이다.

***

맥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찾아온 것은 이틀 전이었다.

한밤중인데도 웬일로 말짱해 보여서, 알렉은 정말 심각한 일이 벌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대개 금요일 밤이면 맥스는 파티장에서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해롱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화나 정도를 빼면 약에 손대는 일은 없었지만, 술은 엄청 좋아해서 언제나 고주망태가 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 알렉이 살고 있는 고급 독신자 아파트 문 앞에 나타났을 때, 맥스는 술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내 아이라는 거야!”

그는 소파에 앉아서 머리를 감싸 쥐고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해? 그런 소리 한두 번 들어 본 것도 아니잖냐.”

알렉은 와인 병과 잔 두 개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미성년자 딱지를 막 떼면서부터 맥스에게 그런 소리로 들이대는 여자들은 셀 수도 없었다. 그들을 나란히 줄 세운다면 아마 프라비아 영토 전체를 감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맥스의 화사한 미모는 중학교 시절부터 이미 연상, 연하 할 것 없이 수많은 여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니까.

“이번엔 확실해.”

“뭘로 증명할 수 있는데? 이미 헤어진 사이라며. 그동안 그 여자한테 아무 일도 없었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어?”

“준은 달라. 그런 여자 아니야.”

“하긴. 내가 모르던 애인이라니 범상치는 않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나라고 모든 일을 너랑 공유하진 않아, 인마.”

“퍽이나 놀랍기도 하다.”

알렉은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버린 사촌의 얼굴을 바라보며 와인 잔을 앞으로 밀었다.

“하! 브랜디나 위스키로 할걸. 이걸론 기별도 안 간다.”

맥스가 와인을 물처럼 꿀꺽꿀꺽 들이켜더니 소파에 쓰러져서 또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아껴 뒀던 피노누아를 땄더니만 고작 그딴 소리냐?”

“정말 미치겠어! 진짜 생각도 못 했다니까? 이미 헤어졌는데 뒤늦게 이런 식으로 연락해 올 줄은 몰랐어! 이 여자는 다르거든. 보통 여자가 아니라고!”

“뭐가 얼마나 다른지는 몰라도 헤어지고 나서 이런 일로 연락해 올 정도면 별로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 그래,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한 달쯤? 그리고 나랑 만나는 동안 다른 남자는 없었어. 적어도 그건 확실해. 그러니까 준이 임신을 했다면 그건 내 아이가 맞는 거야!”

“피임은?”

맥스가 그를 흘겨보았다.

“유치한 성교육은 관두자. 응? 아무튼 해결책을 생각해 내야 해.”

“좋아. 뭐, 그렇게 대단히 특별한 여자라면, 너도 맘 잡고 이참에 그냥 결혼하는 건 어때?”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건 알렉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일부러 떠본 것뿐이다.

“하! 장난하냐? 왕관을 포기하면서까지 잡고 싶은 여자는 아니야! 그리고 벌써 헤어진 사이잖아! 뭐, 함께한 시간들이 딱히 나쁘진 않았지만 그냥 그 정도에서 끝내면 되겠다 싶은, 딱 그 정도 만남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고작 서른둘에 아이 때문에 발목 잡히긴 싫은데! 내 인생은 지금부터라고!”

“그래, 너다운 얘기다.”

하루가 멀다고 싸구려 타블로이드의 가십난을 장식하는 사고뭉치다운 발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함부로 몸을 굴리지 말았어야지, 멍청아.

“결혼이라도 하려면 당연히 먼저 프라비아 국적으로 귀화시켜야 가능할 텐데, 그러려면 그 여자가 여기 와서 3년은 살아야 하잖아! 그사이에 애가 먼저 태어나 버릴 텐데 당연히 낭패지! 그럼 황태자 지위는 물 건너가는 거라고! 국법도 문제지만, 여론이 아마 최악일 거야. 의회가 나를 날려 버리려고 할걸? 그런 걸 다 감수할 만큼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아니, 물론 준은 괜찮은 여자야. 좋은 여자고. 하지만 그 정도 가치가 있는 건 아니란 말이야!”

“그럼 그냥 돈을 좀 쥐여 주는 건 어때? 아이에 대해서…… 뭐 그쪽에서 좋을 대로 선택하라고 말이지.”

“그 방법도 생각은 해봤는데. 그건 내가 너무…… 쓰레기처럼 느껴지더라고. 대놓고 그럴 순 없잖아.”

내가 보기엔 지금도 충분히 쓰레기 같은데? 알렉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자기 아이를 가졌다는 여자를 별다른 책임감도 없이 어떻게든 떼어 내지 못해 안달하는 꼴이라니.

남자로서도, 황태자로서도 최악이다.

여자들은 도대체 이따위 녀석의 무얼 보고 덤벼드는 걸까? 물론 ‘황태자’라는 지위가 주는 달콤함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 나라에서 ‘왕비’가 되려면, 반드시 프라비아 국민이어야 하고, 결혼 전에 아이가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고루한 조건이 붙어 있다.

게다가 외국인이 프라비아 국민이 되려면 시민권 신청일로부터 최소 3년간 프라비아에 거주한 이력이 있어야 했다. 그런 조건에 맞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한다면, 맥스는 당연히 황태자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

이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안다면 다들 함부로 맥스에게 접근하지는 않을 것이다. 프라비아에서는 왕비가 된다는 게 그렇게 멀고도 험한 길이라는 걸 안다면 말이다.

호주의 어느 술집에서 맘먹고 황태자에게 접근했다가 손쉽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는 덴마크의 메리 왕세자비나 마약 중독 미혼모에서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노르웨이 왕세자비 같은 경우는 프라비아에서 꿈도 꿀 수 없다. 제아무리 황태자가 아무하고나 자유롭게 놀아나는 망나니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고 그냥 몰래 낳아서 혼자 알아서 키우라고 할 수도 없잖아? 어디 신문사에서라도 뒤를 캐는 날에는…….”

“넌 왕위를 박탈당하겠지.”

맥스는 와인 잔을 내려놓고 다시 두 손에 얼굴을 묻더니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 이 멍청이는 결국 그 자리를 포기할 생각은 없다는 거군.

알렉은 차갑게 맥스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래서 여자하고는 어쩌기로 했어? 다시 연락하겠대?”

“그게…….”

맥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이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이리 오라고 해버렸다. 전화로 할 이야기도 아닌 것 같고. 저쪽도 긴장한 것 같았거든. 그래서 우선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해버렸지. 그런데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아.”

“뭐야?”

알렉이 소리치자 맥스가 움찔했다.

“아니, 전화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는 진짜 반가웠어. 솔직히 헤어지고 가끔 생각났었는데, 정말 독하게 먼저 연락 안 하던 여자였거든. 물론 얘기를 다 듣고 나니 전화를 받지 말걸 싶었지만 말이야. 그래도 다 듣고 나서 또 매몰차게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잖아? 그래서 일을 저질러 버린 거야.”

맥스가 탐스러운 금발을 마구 헝클어트리며 절망적으로 말했다.

“아마도, 음, 그러니까 일요일 오전에 프라비아에 도착할 것 같은데…… 막상 불러 놓고 보니 후회가 되는 거야. 도저히 얼굴을 볼 자신이…… 야! 진짜, 나 좀 도와주라. 내가 누굴 믿겠냐!”

“후…….”

알렉은 일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맥스가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웬만한 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무한 긍정의 대가, 늘 넉살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잘생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걸 보니 확실히 보통 문제는 아닌 듯싶다.

“그래, 직접 만나는 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문제는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잖아. 여자가 울기라도 하면 분명 넌 맘이 약해져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늘어놓겠지.”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어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 예측도 못 하겠더라.”

알렉은 우선 망설이며 생각에 잠기는 척했다.

“글쎄, 하지만 나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건…….”

“넌 달라! 다르다고! 다들 네 말이라면 무한 신뢰를 보내잖냐! 너라면 분명 여자한테 휘둘리지 않고 침착하게 잘 대응할 수 있을 거야! 응? 좀 부탁하자!”

맥스의 눈에 떠오른 절박함을 확인하는 순간, 알렉은 결심했다.

맥스를 도와주기로.

언제나처럼 골치 아픈 일을 대신 떠맡기로.

“좋아. 네가 그렇게 곤란하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떠맡게 될지’는 물론 알렉이 결정할 것이다. 그가 간절히 원하는 ‘왕관’을 손에 넣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래, 여자가 언제 온다고?”

‘아마도 신은 내 편’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알렉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