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두 사람은 주방을 벗어나 성의 서쪽으로 통하는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어쨌든 양쪽의 입장을 다 들어 봐야 한다는 알렉의 주장 때문이었다.

둘 다 아직은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우리가 아는 건 그저 ‘신부가 결혼하기 싫어한다.’는 사실뿐이잖아요. 그 이유에 대해서도 모르고요. 그저 흔히 결혼 전에 찾아온다는 그런 ’메리지 블루‘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냥 짜증일지도 모르고.”

“그런 건 아닌 것 같았어요. 울고 있는 걸 보면 심각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뭘 어쩔 수 있겠습니까? 도망치게 도와주기라도 하자고요?”

“그렇게 함부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당장 뾰족한 방법도 없거니와 배 속의 아이, 맥스, 그 밖의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절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큰아버지 이야기도 한번 들어나 봅시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결혼 전날 밤의 신랑이라면 현재의 맥스가 지내고 있는 서쪽 에이머스 홀에 있을 거라는 게 그의 추측이었다.

“대개 황태자들은 그쪽에서 지내니까요.”

“맥스의 아버님은 황태자로 지낸 기간이 길지 않으셨나 봐요. 아직 결혼을 하기 전에 벌써 즉위를 하신 셈이네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왕위에 오르는 바람에 실수도 많이 했다고 농담처럼 말씀하셨죠.”

너무 이른 즉위와 사별, 그러고 보면 그의 큰아버지는 온갖 불행을 몸으로 겪어 왔던 셈이다.

게다가 그렇게 얻은 아들이 망나니 바람둥이라서 했던 마음고생은 덤이었고.

게다가 이제는 아들보다도 아낀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는 조카가 갑자기 과거로 돌아와서 불손한 생각을 품고 몰래 이야기나 엿듣고 있는 판이니.

그는 너무 마음이 복잡해서 이제라도 다 그만두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자고 말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냥 없던 일로 하고 그 통로를 통해 다시 대성당으로 돌아가면 거짓말처럼 현재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렉이 다 관두고 그냥 돌아가자고 말하려는 순간, 뭔가가 그의 팔을 건드렸다. 내려다보니 준의 작은 손이 그의 소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저쪽을 봐요.”

모퉁이를 막 돌아선 순간, 길고 웅장한 홀이 펼쳐진 참이었다. 한쪽에는 커다란 창문이 줄지어 나 있었고 반대편에는 오래된 미술품과 석상 같은 것들이 세워진 ‘수집의 방’이었다.

그리고 그 중간, 활짝 열린 창문 앞에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알렉은 흠칫 놀라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준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얼른 몸을 낮추고 곁에 있는 커다란 석상 뒤로 숨었다. 서로 열렬히 키스하는 두 남녀를 조각한 실물 크기의 대리석 석상이었다.

“그러게 조금쯤 요란한 총각 파티도 나쁘지 않다니까? 내 말 안 듣더니 결국은 오늘이 오고야 말았지. 이제 와서 아쉬워해도 너무 늦었다고!”

어딘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알렉은 석상의 다리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매사에 규칙을 엄격하게 생각하는 자기가, 프라비아의 왕자,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프린스 알렉산더가 비겁하게 이런 곳에 숨어 들어서 남의 이야기를 엿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당신과 정말 많이 닮으셨네요.”

준이 옆에서 속삭였다. 그제야 알렉은 자기가 아직까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손을 놓았다. 서로의 피부가 맞닿았던 자리가 어쩐지 불에 덴 듯 뜨겁게 느껴졌다.

한쪽 손을 문지르며 앞을 살피던 그는 그제야 자기가 보고 있는 게 누구인지 알았다.

결혼을 앞둔 젊은 국왕의 동생이자, 형보다 빨리 결혼해서 벌써 임신한 아내를 두고 있는 니콜라스 왕자였다.

앞으로 10년 뒤, 카레이싱을 즐기다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뜨는 바람에 내내 그가 그리워하게 될 그의 아버지 말이다.

자기 형보다 짙은 흑갈색 머리카락을 보기 좋게 뒤로 넘긴 채, 한 팔을 허리에 짚고 선 훤칠하고 젊은 아버지는 그와 무척 비슷해 보였다.

알렉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살아 있는 젊은 아버지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순간, 그는 손에 다시 온기가 돌아온 것을 느끼고 내려다보았다. 준이 그의 손을 다정하게 토닥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그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알렉은 그녀의 손을 더듬어서 꽉 잡았다.

“뭐, 별수 없지. 사방에 기자들이 쫙 깔린 판에 어디 갈 만한 데도 없잖냐. 요란한 건 둘째치고 멀쩡한 총각 파티도 힘들 판인데.”

큰아버지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금발까지는 아니었지만 좀 더 색이 엶은 부드러운 밤색 머리카락과 다정한 목소리 때문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 기분은 어떠셔?”

“벌써부터 피곤하다. 그냥 다 했다고 치고, 눈을 뜨면 이미 결혼식이 끝나 있으면 좋겠다니까.”

새신랑이 될 황태자가 빙긋 웃었다.

“하긴 진짜 피곤하겠다. 내일 생각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릴 것 같던데? 이것 때문에 입국한 관광객도 엄청나다는 모양이야. 이런 조그만 나라 왕실 결혼식에 이렇게까지 관심 가질 줄은 몰랐는걸.”

“그래,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세인트 랭 대성당까지 마차 퍼레이드며, 결혼식이며 피로연까지…….”

“뭐 닥치면 별것 아냐. 꽤 할 만해.”

“존경스럽다. 이걸 어찌 다 치렀냐?”

“나야 형 결혼식의 절반 규모니까 더 쉬웠지. 그래도 인생의 선배니까 날 알아 모셔야 할걸.”

“그래, 그래, 알았다.”

형제는 한동안 킥킥거리고 웃었다.

“어때?”

알렉의 아버지 니콜라스 왕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가?”

“음…… 페이스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형이 ‘정략결혼’이라는 걸 감당해 낼 수 있을 줄은 몰랐어. 그런 건 구시대적인 유물이라고 생각하니까.”

“야, 그건….”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레이디 페이스는 엄청난 미인이고, 착한 아가씨잖아. 난 두 사람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하지만 사랑이라는 건 그렇게 싹트는 게 아니잖아. 주변에서 잘 어울린다면서 부추긴다고 하루아침에 덜컥 생기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늘 형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어. 나와 레오노라처럼 그렇게 둘이서 서로를 찾아낸 게 아니잖아.”

준과 알렉은 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미래의 리오넬 국왕이 고개를 숙이더니 잠시 웃었다.

“야, 나도 처음엔 그랬다. ‘괜찮은 혼처’가 있다고 고모님이 말씀하셨을 때 말이야. 21세기에 ‘정략결혼’이라니 이게 웬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일인가 싶었지.”

준이 알렉을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의 만남이 그런 식이었다는 걸 그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도 바보는 아니야. 처음엔 당연히 반항적인 마음이었지. ‘왕위 계승자’라는 이유만으로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 거야? 싶었다고. 그래서 일단 만난 다음에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흐지부지해 버리면 되겠거니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글쎄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이렇게 되고 말았네.”

미래의 국왕이 쿡쿡거리고 웃었다.

“그녀를 ‘진짜’ 좋아하게 되었다는 거야?”

“그래, 이런 일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그렇다면…… 형은 혹시…….”

알렉의 아버지 니콜라이 왕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멀리서는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어조에서 망설임이 느껴졌다.

“그 소문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페이스가…….”

“그 남자를 아직 못 잊고 있다는 소문 말이야?”

맞잡은 알렉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준은 긴장했다.

“알고 있었어?”

“모를 수가 없지. 너 말고도 그 사실을 귀띔해 주고 싶어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그런데도 괜찮다는 거야?”

니콜라스 왕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프라비아의 국왕이 아니라 일개 평민을 사랑한다는 여자와 결혼해도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냐고!”

“글쎄, 우선 요즘 같은 시대에 ‘일개 평민’이라는 표현은 좀 심한 거 아니냐?”

잔뜩 흥분하기 시작한 동생과 달리 국왕의 어조는 차분했다.

“좋아. 그건 인정! 말이 헛나갔어. 하지만 그림을 그린답시고 쓸데없는 짓을 하며 여자들 마음을 현혹하는 그런 인간이잖아!”

“조각가야. 난 그렇게 알고 있다.”

“뭐가 됐든! 예술가인 척하면서 사기를 치는 그런 놈이잖아? 그치가 만들었다는 ‘작품’이라는 걸 봤는데 암만 봐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헉!”

순간 옆에 있던 준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터져 나오는 비명을 막았다.

하지만 알렉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대화에 집중하느라 그녀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상관없어.”

예비 국왕의 대답은 간단했다.

어찌 보면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듣지 않고 그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바라보려는 고집스러운 면은 맥스와 꽤 닮은 것 같았다.

“결국 결혼할 상대는 나니까. 그거면 충분하지. 아직 ‘사랑’까지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사이에도 뭔가 ‘우정’ 비슷한 그런 달콤한 감정이 있어. 앞으로 그녀가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자신도 있고. 결혼부터 하고 나서 나중에 사랑이 싹트는 커플도 분명 있잖아. 아직 사교계엔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나? 아마 차차 시간이 지나면 페이스도 날 사랑하게 될 거야.”

“하!”

니콜라스 왕자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설마 했는데, 둘이 아직도 그런 상태인 거야? 지금쯤은 다 정리되었을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결혼부터 하고 사랑하게 만들겠다니? 그런 건 결혼이라고 할 수 없어!”

흥분한 니콜라스 왕자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는 여자라고! 결혼 전날에 이런 말하는 게 좀 그렇지만, 그럼 그냥 놓아주는 게 어때? 형은 이것보다 훨씬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어. 형이 좋다고 따라다니던 귀족 영애들이 한 트럭은 될 텐데 도대체 뭐 하러 이런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거야?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억지로 하겠다는 걸 보면 페이스는 그저 프라비아의 ‘왕비’라는 자리에만 눈독을 들이는 것 같은데?”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야. 여러 가지가 걸린 문제라고. 그녀의 집안에서도 반대하고 있겠지. 그런 예술가와 함께 하는 미래에 자신이 없을 테고.”

“그 사람들은 당연히 딸을 왕비로 만들고 싶겠지! 그러니까 밀어붙이는 거라고!”

“모든 건 나한테 달린 문제야. 내가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붙잡으면 되는 거 아니냐. 걱정 마. 그러니까…….”

알렉이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준은 뒤로 물러섰다.

거기서 더 이상 대화를 엿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모퉁이를 돌아서 홀을 빠져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에게 손을 잡힌 채 준은 매달리듯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이듯 물었다.

알렉은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별다른 말도 없이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갈 뿐이었다.

“이것 봐요! 알렉!”

준의 다급한 목소리에 알렉이 굳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더 들을 필요도 없어요! 저 사람들을 위하는 길이 뭔지 알 것 같으니까.”

“알 것 같다고요?”

“그래요! 그러니까 갑시다! 레이디 페이스를 자유롭게 놓아주러 가자고요!”

“자유롭게 놓아주자고요? 결심한 거예요?”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함부로 결정할 문제가….”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건… 맥스의 존재를 아예 지워 버리는 셈이 되니까! 그리고 당신의….”

알렉은 당황한 표정으로 아기에 대해 차마 입에 담지는 못하고 준의 몸을 살짝 가리켰다.

“그러니까 당신이나 내가 함부로 나설 일이 아니라고 말이죠. 그리고 나는… 그렇게까지는….”

여기서 자기가 맥스의 자리를 탐냈다는 야심을 드러낼 수는 없다. 그걸 고백하는 일은 너무 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이 감정은 그런 야심이 아니다.

“큰아버지가 저런 생각을 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저건 사랑이 아니죠. 저렇게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람을 곁에 묶어 두고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하는 건… 저건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는 두 사람 다 행복할 수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어요. 가서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든가, 아니면….”

그는 열심히 말하다가 문득 아래를 내려다봤다. 준의 차가운 손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녀를 쳐다보자 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이 보였다.

“뭡니까?”

“저기… 사실은 내가… 큰 실수를 해버린 것 같아요.”

***

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준이 쪽지와 수상한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해 준 뒤, 두 사람은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서 다시 클로덴스 홀로 돌아왔다.

복도에 있던 레이디 페이스의 언니는 보이지 않았고 조심스럽게 노크해 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어쩌죠?”

준이 울상을 지었다.

“아무래도 아까 그 남자가 그 ‘예술가’인 것 같은데 말이에요. 도대체 무슨 쪽지를 전해 준 걸까요? 어떻게 해요?”

“별수 없어요. 부딪쳐 보는 수밖에.”

“안으로 들어가자고요?”

“그 방법 밖에 남은 게 없잖아요.”

“우리가 누구냐고 물으시면….”

“사실대로 말하면 되죠.”

알렉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로이드에서 파견 나온 인력들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그가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준은 그의 뒤에 조심스럽게 따라붙었다.

“레이디? 어, 저희는….”

“다 드신 쟁반을 가지러 왔는데요….”

준이 조심스럽게 덧붙이자 알렉이 뒤를 돌아보며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