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망했다

아… 아아아아악.

망했다, 망했어. 온리유 너 제대로 사고 쳤잖아.

스포츠면, 연예면 할 것 없이 보통의 일반인인 내 얼굴이 대서특필로 떡 하니 1면을 장식했다. 그것도 세계적인 축구 스타 루카스 코크 데본의 아주 바람직하게 잘생긴 얼굴과 함께 말이다. 자괴감을 느낄 새도 없이 리유의 핸드폰은 깨톡과 전화로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희수와 지은, 잘나고 바쁘신 남동생 시유까지 톡은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야, 이 지지배야. 이거 뭐야? 너 거기까지 가서 사고 친 거야?〉

〈꺄아아악, 링링. 넘 멋져! 어때, 어때? 세계적인 꽃미남 스타와의 키스는? 아이! 몰라, 몰라.〉

〈야, 온리유. 너 사고 치지 말랬지? 하다 하다 이제는 글로벌하게 사고를 치고 있어?〉

참으로 톡만 보아도 성격들 나오신다. 희수는 그녀 성격대로 직설화법을 구사해 주시고, 반면 귀엽고 사랑스러운 지은은 톡 마저도 사랑스럽다. 그리고 시크하고 잘 나신 제가 오빠인 양 구는 시유까지도 이렇게 흥분해서 길게 톡을 보낸 적은 없었다. 지금 당장은 누구에게도 답을 할 수가 없었고, 수호에게서 오는 전화도 차마 받을 수가 없었다. 현재 닥친 이 상황이 무슨 일인가 싶고,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기사는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루카스 코크 데본, 숨겨둔 그녀?!’

‘결벽증 루카스를 사로잡은 그 동양 여자는 누구인가!’

‘루카스! 드디어 병을 고치다?’

대체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무슨 큰 사고를 친 건지 조금씩 감이 오기 시작했다. 그렇다. 알코올이 문제였다. 그녀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며 딱 한 캔 마신 맥주를 탓했다. 이 상황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알코올이라도 걸고넘어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기자들이 그녀가 누군지 모르지만, 곧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은 불 보듯 훤했다. 현재 리유가 거처하고 있는 아파트형 숙소는 그녀뿐 아니라 세계 여기저기서 여행 온 여행객들만 해도 8명이었고, 주인 언니와 남편까지 10명 되었다. 누가 봐도 기사에 뜬 사진은 그녀 자신과 판박이였으므로. 누구처럼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장착했어도 대번에 정체를 알 수 있는데 자신은 아무 필터링 없이 쌩얼 그대로 기사에 나갔으니 말 다 했다.

이렇게 되면 영국에서의 일정은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막막했다. 지금 거처하고 있는 숙소는 아직 열흘이나 계약이 남아 있는 상태이고, 영국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넘어가는 비행기 티켓팅도 이미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미 잡은 호텔도 취소할 수가 없었다.

특별히 히트 친 작품도 없는 그저 그런 웹소설 작가가 과감히 장르 변경을 하겠다고 그 기념으로 심기일전하려고 지금까지 모은 비자금을 탈탈 털어 큰맘 먹고 떠나온 지 5일밖에 되지 않았다. 엄마인 연주에게 시집은 안 가고 무슨 여행이냐며 등짝 스매싱을 당하고, 남동생 시유의 한심하다는 눈초리와 잔소리를 감내하고, 아빠 정수의 열렬한 지지와 응원에 힘입어 어떻게 떠나온 여행인데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되지. 힘내자, 온리유.

그녀의 초긍정 마인드는 여기에서 또 빛을 보게 된다. 검은색 캡모자를 쓰고 집에서 몰래 가져온 엄마 연주의 커다랗고 시커먼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앞으로 닥칠 일은 예상도 못 하고. 하지만 그것이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드르륵, 드르륵. 핸드폰 진동음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수호였다. 더 이상 안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나, 나 수호야. 지금 어디야?

“수호야, 나 지금 숙소에 있어.”

⎯누나, 아무 말 말고 거기 정리하고 일단 우리 집으로 옮기자.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는데 누나 뜻대로 해주고 싶어서 붙잡지 않았는데… 하아….

“아냐, 난 괜찮아. 여기서 마저 일정을 마치고 가야지. 설마 누가 날 알아보겠어?”

⎯누나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루카스 그놈은 아주 기자를 몰고 다니는 놈이야. 누나가 어디 있는지 하루 이틀이면 사람 찾는 덴 도가 튼 놈들이 기자라고. 언제 그 앞으로 들이닥칠지 몰라. 그러니까 옮기자. 내가 지금 매니저 보낼게.

“후우…. 알았어. 그럼 당분간 신세 좀 질게.”

수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폰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같은 골목 옆집에 살면서 가족같이 지낸 친동생 같은 아이였다. 그의 형 은호와 리유는 유치원부터 거의 남매처럼 지낸 데다, 그녀의 동생 시유와는 둘도 없는 깨복쟁이 친구였다. 그렇게 남자 셋의 중심에 리유가 있었던 터라 그녀는 늘 과잉보호를 받았고, 그들의 등쌀에 제대로 남자친구도 사귀어 보지 못하였다.

리유의 뒤에서 그녀에게 접근하는 친족을 제외한 어떤 누구를 막론하고, XY 염색체를 가진 사람은 그들 셋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게 만들고 말았다. 단 리유는 전혀 눈치 못 채게 말이다. 그렇게 리유의 연애 사업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문을 닫게 되었지만, 정작 그 세 놈들 본인들은 자유연애를 했다나 어쨌다나…….

자칭타칭 꽃미남으로 유명한 은호와 검게 그을린 피부와 남자답게 잘생긴 수호, 범생이 도련님처럼 샤프한 외모를 가진 남동생 시유를 보고 자란 그녀는 어지간한 외모에는 면역이 생겨 있었다. 그 면역이란 것도 루카스 코크 데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지만…….

형인 은호와는 달리 수호는 제 재능을 믿지 않고 어려서부터 성실하게 꿈을 향해 가는 아이였다. 최연소 청소년 국가대표 선수를 필두로 최연소 국가대표와 독일을 거쳐 지금은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맹활약을 떨치고 있는 이름만 대면 온 국민이 다 알 정도인 축구선수였다. 제 형인 은호보다 유독 리유를 친누나처럼 따르던 아이였다. 사실 공부밖에 모르는 시유보다 더 정이 가는 동생이었다. 런던에서 보름 정도 살아 보기 결정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도 그래서였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제집에 와서 편히 지내라던 수호였지만, 혼자 떠나온 여행인데다 잠시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 보고 싶었고, 어쨌거나 수호는 유명한 축구 스타인데 그 집에 얹혀서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엔 사고를 친 덕에 민폐 아닌 민폐를 끼치게 만든 리유는 자신을 탓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 * *

창밖으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다 싸 놓은 캐리어를 닫고 일어서며 무슨 일인지 창밖을 내다보았다. 기자처럼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헐. 설마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 설마가 리유를 벌써 찾아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 보니 숙소 주인인 엘리아나였다.

⌜리유, 밖에 잔챙이들이 우글대요. 1층 뒷문으로 나가면 기다리는 기사가 있을 거예요.⌟

엘리아나는 윙크를 날리며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리아나, 미안해요. 갑작스럽게 방을 빼게 되어서요. 나머지 열흘분은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아니에요. 귀여운 아가씨. 좀 더 오래 있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워요. 별일은 없을 거예요. 즐거운 여행 되기를 바라요.⌟

⌜짧은 시간이지만 친절하게 대해 줘서 너무 감사했어요.⌟

⌜그래요, 리유. 행운이 함께 하길.⌟

엘리아나의 배려로 뒷문을 통해 몰래 빠져나오니 검은색 벤츠가 서 있었고, 수호의 영국 에이전시 회사 매니저로 보이는 진한 갈색 머리의 남자가 다가왔다.

⌜헤이, 수호의 매니저 클라인이에요.⌟

⌜아, 반가워요. 리유라고 해요.⌟

⌜일단 어서 차로 갑시다.⌟

클라인은 리유의 캐리어를 차 트렁크에 넣고 그녀를 뒷좌석에 태운 후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 * *

루카스 코크 데본은 무릎 부상으로 인해 한 달 정도 강제 휴식을 가져야 했다.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앞두고 사우스햄 팀은 꼭 잡고 가야 할 팀 중 하나였다. 리슨 감독은 시즌 우승과 UEFA 우승을 위해 무리하지 말라며 잠시 쉬라고 조언했고, 팀 닥터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쉬게 되었지만, 그라운드에서 뛰지 못하니 아쉬움이 컸다.

오늘 있을 사우스햄과의 경기를 직접 보러 오게 된 동기도 TV 중계로만 보고 있기엔 답답하기도 했고, 계속 집과 재활 치료만 반복하다 보니 그라운드의 함성이 그립기도 했다. 다른 때 같으면 팀 벤치나 VIP 지정석에 앉아 편히 경기를 관람하겠지만, 오늘은 급작스럽게 변덕을 부린 결과 매니저 대니로부터 어쩔 수 없이 일반석 좌석 티켓을 받아 들고 살짝 들떠 있었다. 그 이유는 축구팬들의 함성을 바로 옆에서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루카스의 여성 접촉 거부증은 유명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지만, 지금은 겨울이라 두터운 패딩을 입고 털모자까지 눌러 썼으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전직 축구 스타인 아버지 라이언 데본과 유명 여배우인 어머니 올리비아 코크 사이에서 태어난 루카스는 어려서부터 너무 많은 사람의 손을 탔다. 특히나 여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 자라다 보니 어머니와 손위 누이인 미아 외의 여자와는 몸에 닿기만 해도 불쾌감과 역겨움이 올라왔다.

오늘도 제발 옆자리에 여자가 앉지 않기를 바라며 상대 팀 홈구장인 런던 스타디움에 입장했다. 런던 스타디움은 7만 명 정도가 입장할 수 있다더니 그가 속한 카스널 팀의 A 스타디움 보다 좀 많은 수용 인원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이 꽉 찼다.

다행하게도 그의 자리는 통로 바로 옆이라 왼쪽에 있는 사람만 여자가 아니길 바라야 했다. 그러나 웬 작은 동양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래. 그나마 소녀라서 다행인가. 더군다나 선글라스까지 장착한 상태라서 인지 몰라도 그가 누구인지 몰라보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그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경기가 시작되고 옆에 있던 검은 머리 소녀가 소리를 지르고 중얼거리기 전까지는 그녀가 상대편 팬인 줄 몰랐다. 이쪽은 루카스의 팀 응원석 쪽이었는데 말이다. 곧 그 소녀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작고 소심하게 상대 팀을 응원했다.

루카스는 평소에도 술을 즐겨 하지 않았지만, 특히나 경기장 내에서의 음주는 혐오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맥주를 팔고 다니는 사람을 그 소녀가 부르더니 3파운드를 주고 한 캔을 사서 쭈욱 들이켰다. 아직 스무 살이 채 될까 말까 한 여자애였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더 이상의 관심은 접어두고 이내 그는 경기에 집중했다. 오늘따라 그의 팀 선수들의 몸이 무거워 보였다. 그런 반면에 상대 팀 선수들은 몸도 가볍고 패스도 정확했다.

경기 시작 20분쯤 지났을까. 상대 팀 선수가 중거리 슛을 날렸는데 정확히 골문 안에 빨려들 듯 꽂혔다. 상대 팀의 현이 어시스트 한 공을 케이 윙크스가 받아 찬 공이 그대로 골문 안으로 들어갔고, 그의 팀 골키퍼인 위고는 막지 못했다. 선제골을 내준 셈이었다.

그렇게 전반전이 끝나고 휴식 타임에 옆에 앉은 그 소녀는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기고 있는 것이 기쁜지 맥주 한 캔을 더 사서 쭈욱 들이켰다.

요즘 애들은 하며 혀를 끌끌 찬 루카스는 정작 27살밖에 되지 않았다. 여성 접촉 거부증과 함께 고지식한 면도 다분히 많은 그였다. 선글라스 안쪽에 있는 그의 눈이 소녀의 검은 눈동자와 우연찮게 마주치게 되었다. 쌍꺼풀은 없지만 제법 큰 눈이었다.

소녀는 그 큰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더니 ‘하이.’ 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양 볼에 오목하게 보조개가 피었다. 그 보조개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고개만 살짝 숙이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시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몇 번의 고배 끝에 마커스가 차올린 공을 애덤이 헤딩 슛으로 마무리하면서 경기 10분여를 남기고 겨우 동점 골을 만들었다. 동점 골이 들어가자 카스널 응원석은 그제야 난리가 났다. 이제 10분밖에 남지 않았지만, 역전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무승부로 끝나는 게 나았다.

그때였다. 상대 팀 현이 혼자 골을 몰고 가면서 그의 팀 선수들을 다 제치고 골을 넣기까지 채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순식간에 골문 앞까지 가서 골을 넣자, 장내 아나운서가 ‘골, 고올, 골인’하고 외친 그 순간 사우스햄 런던 스타디움은 그야말로 함성으로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옆자리의 그 검은 머리 소녀도 작게 ‘수호, 수호.’하며 현 선수의 이름을 말하는 듯하더니 골이 들어간 순간 ‘예쓰.’ 하며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가 상대 팀 응원단들의 눈총을 받으며 다시 주저앉았다.

순간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 소녀는 입을 가린 채 흥분을 주체 못 하더니 급기야는 두 손으로 루카스의 얼굴을 부여잡고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더니 ‘땡큐, 땡큐.’를 연발하며 너무 좋아하였다. 루카스는 얼떨결에 기습 키스를 당하고 멍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둘의 키스 장면이 전광판에 크게 잡혔다는 사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갑자기 경기장의 함성이 더 커진 다음에야 전광판에 자신의 모습이 잡혔다는 사실에 화가 난 루카스는 그 소녀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그 순간에도 소녀는 헤실거리고 있었다. 스킨십에 대한 불쾌감으로 인해 키스도 하지 못하던 루카스이기에 동양의 조그만 소녀에게 불시에 당한 키스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씩씩거리며 경기장 밖으로 나온 루카스는 그의 차가 주차된 곳까지 뛰다시피 가면서도 한 가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둑 입맞춤은 학교 퀸에게도 받아 보았다. 무슨 자신감에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불쾌하기 짝이 없었고, 토가 나올 정도로 역겨웠다. 그 길로 화장실에 가서 입술을 박박 문질러 씻어 냈다. 그걸로도 모자라 이를 닦고 가글을 몇 번이나 했는지….

그런데 희한하게 화가 나 씩씩거리면서도 그 작은 소녀의 말캉한 입술의 감촉이 전혀 불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맥주까지 마셔서 살짝 알코올 향까지 났었는데도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는 망치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하얘졌다.

#2. 여름이었다

쏟아져 내리는 뜨거운 햇살로 인한 쨍한 열기에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의 시작 점에서 리유는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앞마당에는 그녀의 모친인 연주가 좋아하는 하늘빛 수국이 만발하게 피어 있었다.

싱그러운 꽃내음이 더운 바람에 실려 흘러 들어온다. 여름의 전령사라 할 수 있는 능소화가 마당 한쪽 끝에 자리한 감나무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어릴 때 잭과 콩 나무 동화를 읽고는 그 능소화를 타고 올라가면 하늘 끝에 닿을 것이라 환상을 가진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무맹랑한 순수함이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동화책을 좋아하고 또 그런 상상을 꿈꾸었기에 현재 웹소설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꿈 많던 어린 시절이 있겠지만, 집 옥상에 그녀의 부친인 정수가 일주일에 걸쳐 만들어 준 평상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며 꿈을 꾸었더랬다. 주로 나는 무엇이 되겠다는 꿈보다 책에서 읽은 주인공의 삶에 푹 빠져 그녀만의 공상의 나래를 펼치곤 하였다. 주로 책의 내용을 비틀어서 주인공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하는 상상을 하다 잠이 들기도 하고, 그러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모기에게 그녀의 피를 헌납하기도 하였다는. 크흑, 그래서 빈혈이 심했던 건가…….